신앙 고백/투병일기-2011년

♠♣ 상처도 고통도 달란트가 되어

김레지나 2011. 12. 23. 11:45

상처도 고통도 ‘달란트’가 되어

 

  항암 3차 치료를 앞두고, 동료 선생님들의 마음을 담은 위로 편지와 위로금을 전달 받았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그분들에게 어떻게 신세를 갚을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부족하지만 진심어린 기도로나마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2년 새해 달력을 받아들고 한 날짜에 한 명씩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쭈욱 적었습니다. 9월까지 빼곡하게 이름이 적혔습니다. 그날 하루의 수고와 기도를 1순위로 달력에 적힌 분을 위해 바치기로 했습니다.

 

  친구들과 동료들 외에도 생각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루게릭병에 걸려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면서도 얼굴도 모르는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해주시는 분, 고리기도를 해주시는 성소분과 자매님들, 새로 가입한 인터넷 카페에서 만난 가족같은 분들, 이것저것 먹거리를 챙겨주시는 보나 언니, 54일 기도를 해주고 있는 레지오 단원들, 수녀님께서 소개해주신 환우, 유방암으로 누님을 여읜 J님, 매일 새벽 저를 위한 기도를 다니신다는 엄마 친구분, 같은 병실에 입원한 결혼을 앞둔 선생님, 우연히 들어간 블로그에서 알게 된 20대 후반의 환우, 암병동 선물가게에서 가발을 고르고 있던 선한 눈매의 자매님, 근심스런 얼굴로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겠다던 정수기 코디님, 환우카페에서 알게 된 시한부 선고 받은 환우, 제 블로그에 매일 아침을 저를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답글 달아준 분,...... 정말이지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특히 그분들의 선종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분들이 임종하는 순간에 하느님을 용서하고 가족과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되기를 청할 것입니다. 최근에 제가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해보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항암치료를 받은 후 여러 날 동안, 이겨내고 있는 줄 알았던 어릴적부터의 상처와 원망들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래, 그들 때문에, 그 일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래, 그들이 조금씩만 나를 배려해주었어도.......지금도 마찬가지야. 이건 십자가가 아니라 불의야.....억울해.’

  마음이 아픈 것은 몸 아픈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괴로웠습니다. 아무리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애써도 허사였습니다.

  문득 ‘내가 이러다 죽기 전까지도 온전히 용서를 못할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덜컥 겁이 났습니다. 주님의 위로 안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고 싶은데, 용서도 못하는 상태로 어떻게 주님의 위로를 청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혼자 남아서 맘껏 울고 있었는데, ‘하느님도 지금 이런 한심한 꼴을 보고 계시겠지’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부끄러워하는 대신 더욱 화를 내며 울었습니다.

“하느님도 나빠요. 조금만 더 양보해주시지. ....조금 더 조심하게 하실 일이지.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엉뚱한 고생 시키시고.....하느님이 저를 속이신 거예요...용서 못하는 고통을 알기나 하세요? 그건 모르시죠? 하느님도 용서 못해욧!”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하느님께 울며불며 패악을 부렸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기쁘게 사노라고 떠들고 다녔던 기억은 저를 더 비참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괴롭고 원망스러운 마음 그대로 미사참례를 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나는 유다와도 같이 살았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나는 그를 용서했다...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신부님께서 루카 복음 17,7-10에 대한 강론말씀으로 43년간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시다가 편지 한 장 써놓고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신 두 분 수녀님의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순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를 체험했던 영화 ‘벤허’의 주인공처럼, 제 마음에 맺혔던 원망들이 스르르 물러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부끄러움과 안도감과 감사의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대체 아무 잘못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지셨길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실 수 있으셨을까. 잘못투성이인 나는 얼마나 큰 용서를 받고 있는지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구나. 주님께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기쁘게 아뢸 수 있는 겸손이 부족한 탓인 것을.’

  미사 중에 주님으로부터 더욱 겸손해지라는 책망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놀라워서, 제 부족함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통해서도 저를 당신께로 불러들이셨습니다.

 

  그렇게 한 바탕 크게 앓으면서 저는 용서 못하는 고통, 특히 임종 시에까지 용서를 못하는 상처들이 얼마나 깊이 한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용서에 서투르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이웃과의 관계도 엉망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저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깨달았습니다.

 

  고통도 달란트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부족함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고통도 달란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힘들어했던 기억에 힘입어, 고마운 분들이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과 가족들과 온전히 화해할 수 있기를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 못난 상처와 고통이 제가 고마운 분들의 선종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동기가 되고 재능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를 살리신다는 것, 이것이 고통 가운데 제 위로입니다.(시편 119:50)

 

  “하느님, 제가 하느님을 용서 못하겠다고 악쓰기 전부터 저를 벌써 용서하시고 마음 아파하셨지요? 죄송해요. 제 상처와 고통이 기도를 간절하게 잘 할 수 있는 ‘달란트’로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년 내내 고마운 분들의 선종을 위해, 그분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실 수 있도록 졸라댈 거예요. 잊지 마시고 꼭 은총을 베풀어주세요.”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30:3-4)

 

                                                                                      2011년 12월 22일 엉터리 레지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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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모임에서 말씀 나누기를 하던 중에 어떤 분이, ‘하느님을 용서 못한다.’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표현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셨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시는데, 우리가 뭔데 하느님을 용서하네 못하네 할 수 있느냐는 말씀이셨지요. ^^. 맞지요. 그분 말씀이, 그분 믿음이 백 번 옳습니다.^^ 그분 말씀이 옳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감정으로는 틀린 소리를 해대는 제가 한심한 거지용.

 

* 그분께 혼이 난 후에 겁이 좀 나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을 용서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송봉모 신부님의 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송봉모 신부님께서 기가 막히게 정리해주셨네요. 휴~ ^^

 

“  하느님을 향한 분노․미움․원망이 마음에 있는 한 그분과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단절되기까지 한다. 사실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은 그분과의 단절로 끝나지 않고 내 삶의 모든 가능성과의 단절로 이어진다. 신학자들이 흔히 말하듯 하느님은 우리 존재의 근거요 지평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께 대한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생명에 찬 삶을 다시 살아가려면 하느님을 용서해야한다.

 

  그분과 하나되기까지 보통 다음 네 단계를 거친다.

  첫째 단계는 자신이 하느님한테 상처 받았다고 인식하는 단계다. 여기서 상처는 스스로 자초한 상처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살려고 했는데도 받게 된 상처다.

  둘째 단계는 우리에게 그런 상처를 준 하느님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있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단계다.

  셋째 단계는 하느님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와 함께 고통을 겪으셨고 내 옆에 늘 계셨음을 깨달으며 그분을 용서하는 단계다.

  넷째 단계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첫째, 둘째, 셋째 단계를 오가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결국 하느님과 화해하는 길로 나아간다. 고통이 남긴 힘겨운 결과를 인정하면서 더 이상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며 그 하느님과 하나 되어 남은 인생을 함께 살아가기로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절대자이신 하느님 없이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언젠가 그 광풍이 가라앉은 다음엔 자신의 존재 깊이에 있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마음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렇기에 희망을 잃지 말기를 진정 바란다.“

 

                                                                                               송봉모 신부님의 책 <미음이 그친 바로 그 순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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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과 관련하여 어떤 분으로부터 받은 두 번째 질문입니다.

 

“난 가끔 유다가 불쌍합니다. 팔자라고나 할까요.

유다의 마음과는 달리 사탄이 들어가 --- 희생자를 찾았다고 생각이 드는데

참으로 불쌍합니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희생자로 낙인이 찍혀있다는 것이...“

 

두 신부님의 묵상글을 답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올립니다.

 

<성주간 화요일>(2011. 4. 19. 화)(요한 13,21ㄴ-33.36-38)

 

<유다의 배반>

 

예수님께서는 왜 유다를 제자로 삼으셨을까?

그가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왜 막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로 삼으셨다면,

그에게 배반하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유다의 책임이 줄어들거나 없는 것이 아닌가?

또는 유다의 운명이 배반자가 되는 것이었다면 그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부활이고, 부활이 있으려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고,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에 한몫을 했으니 그도 부활에 한몫을 한 것이나 같고,

그렇다면 유다도 구원 사업의 한 조력자가 아닌가?

너무 유다만 배반자라고 욕을 먹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가?

 

그런 질문들이 그럴듯하긴 하지만 한 가지 놓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만을 보고서 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과론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일들을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도 그 일 그대로 미리 알고 계셨을 것이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너무 순진한 고정관념이고 착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일 그대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도 ‘그것만’ 알고 계셨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는

유다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결과보다 더 많은 다른 가능성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미리’ 아시는 것 외에도, 수없이 많은 다른 경우의 수를 알고 계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전지(全知)’입니다.

그런 뜻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배반은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하나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의 배반이 반드시 필요했던,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여간에 유다는 배반자가 될 의무가 없었습니다.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건 그 자신이 선택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면 유다가 자기의 자유의지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 일이라면,

또 더 넓게 생각해서 모든 인간이 각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인간이 자꾸만 예측 불가능한,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행동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그 결과를 미리 다 아실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는 그대로 진행된다면 그건 자유의지가 아니지 않은가?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표현하면

그런 표현 자체가 모순 아닌가?

 

그렇습니다. 모순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미리 다 정해놓으신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계획 속에 있다는 말과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인간 스스로 결정하도록 맡기셨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결과를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은 모두 모순입니다.

(논리학에서는 모순이라고 하는데, 신학에서는 ‘신비’ 라고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인간 세계를 초월한 하느님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모순’이라는 말이 인간에게서 왔습니까? 하느님에게서 왔습니까?

인간의 논리학이 인간의 것입니까? 하느님의 것입니까?

왜 하느님이 인간의 논리와 사고방식의 틀에 갇혀야 합니까?

왜 인간의 자유의지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자유의지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정말 아는 것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어떻든 유다는 배반을 했고 자살을 했습니다.

그가 중간에 마음을 돌리고(회개하고) 배반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 사업을 진행하셨을 것이고,

그것이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어떤 성당에서 성탄절 직전에 불이 나서

성전 건물이 모두 타버리고 재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전기 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당은 비닐하우스에서 성탄절과 그 겨울을 지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몰려들었고, 아주 훌륭한 새 정선이 세워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낡아서 새로 지을 필요가 있었던 성당이었는데,

신축 기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미루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성전 봉헌식 때 모인 사람들이 다들 하느님의 섭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 그런데 ‘하느님의 섭리’ 라는 말... 지나고 보니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만 믿고 지금 자기가 있는 성당에 일부러 불을 지를 수 있습니까?

 

같은 이야기인데,

지난 1977년도에 익산역(당시 이리역)에 엄청난 폭발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이나마이트 등을 실어놓은 화물 열차가 폭발한 것인데,

역사를 비롯해서 그 지역 일대가 모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람도 많이 죽고 다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깨끗하고 번화한 새 시가지가 되어 있습니다.

원래 그곳은 너무 낙후되어서 재개발을 해야만 하는 곳이었는데,

아무도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 후에 아주 쉽고 빠르게 새로운 시가지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지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심지를 일부러 폭발시킬 수 있습니까?

(익산역 폭발사고 때문에 새 시가지를 쉽고 빠르게 건설할 수 있었던 일은

전화위복이 아니라 재난을 극복한 일입니다.)

 

저는 어쩌다가 안식년 휴가 기회를 놓치고 계속 본당 사목을 하면서

속으로,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서

진짜로 본당사목에서 물러나서 이렇게 쉬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느님 은총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쉬고 싶어서 일부러 병에 걸린 건 아닙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고 믿고서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배반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으실 것이라고 예상도 못했고,

예수님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후회를 하면서 자살을 해버렸습니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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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할 수 있을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I can do it!”, “I can do it!”합니다.

자신감의 표현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정말 야고보의 형제들은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기능의 문제이고,

능력의 문제라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그런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지레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아예 시작도 못하는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수난의 잔을 마시는 것인데,

수난의 잔을 마시는 것은

기술의 문제도, 능력의 문제도 아닙니다.

굳이 능력의 문제라고 한다면 사랑의 능력입니다.

사랑만큼 고통을 감수하고

사랑만큼 고통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사랑이 없으면

누구도 고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길가는 사람,

그래서 아무런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물을 주기 위해

내가 이 무더위에 찬물을 들고

길가에 서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고통은커녕

작은 수고도 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편이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미우면

물 한 잔 청해도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하고 거절할 것입니다.

 

그러니 수난의 잔을 마시는 문제는

“I can”의 문제가 아니라

“I will”의 문제가 먼저입니다.

할 수 있는지를 따지기에 앞서

할 마음과 의지가 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할 마음이 있다면

할 수 있는지를 봐야 하는데

이 역시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만큼 고통 감수 의지가 있고

사랑만큼 고통 감당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의 형제는

수난의 잔을 마실 의지가 있었을까요?

마실 능력은 있었습니까?

이어지는 얘기를 보면 그가 마시려고 했던 것은

수난의 잔이 아니라 영광의 잔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수난의 잔을 마시게 되자

야고보는 도망쳐 버린 것이지요.

 

그런 그가 그러면 어떻게

수난의 잔을 마실 수 있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제일 먼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되었을까요?

 

"I can"이라고 하지 않고

"I can't"라고 하였기 때문이고,

"I can't"라고 하였지만

"I will not"라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려고 하나

제가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고,

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유다와 다른 점은

똑 같이 수난의 잔을 거부했지만,

배반의 수치스러움과 죄스러움을

겸손으로 견딘 점입니다.

 

유다는 수난의 잔을 함께 마실 의지도

함께 마실 수도 없었던

자신의 그 치욕스러움을 못 견디었지만

야고보는 그 치욕스러움이

바로 자기의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너도 마시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었고,

주님께 그 힘을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힘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성령입니다.

없다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주시니

사랑 없다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