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용서

김레지나 2011. 10. 26. 23:16

자기에게 잘못한 형제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현실의 삶 안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며 아예 손을 내젓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닐뿐더러 실제로 그런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1981년 5월 13일, 요한 바오로 2세는 불과 3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터키 청년 알리 아그자가 쏜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수술 끝에 다행히 목숨을 건진 요한 바오로 2세가 병원을 나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감옥에 갇힌 알리 아그자를 방문하고 그를 용서하는 일이었다.

아직도 그 분은 교황이셨으니 그렇게 할 수 있었지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어느 할머니의 다음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십 수 년 전 여의도 광장에서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고 주말을 맞아 붐비는 불특정의 군중들을 향해 자동차를 돌진하여 많은 사람을 죽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 ‘광란의 질주’로 손자를 잃은 한 가톨릭 신자 할머니는 손자를 죽인 그 사내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옥바라지를 해가며 세상과 화해시키는 일을 하는데 남은 생을 바쳤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나를 죽이려는 사람을 용서하고 내 가족을 해친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죽기보다 힘들 것 같은 용서를 실천하는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살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용서는 노력의 결과이자 오랜 훈련의 산물이다.

원한과 복수의 칼을 갈며 마치 죽음의 골짜기를 걷는 것과 같은 음산한 독기를 떨쳐버리고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통해 너를 살림으로서 동시에 나를 살리고 또한 그럼으로써 온 세상을 살리는 희망에 찬 새 삶은 다음과 같은 피나는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첫째, 내면이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웃의 눈 속에 든 티끌을 보기 보다는 내 눈 속의 들보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 너 뿐 아니라 나 역시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먼저 용서를 비는 사람이 또한 상대를 용서할 수 있다.

둘째, 용기 있는 자가 용서할 수 있다. 타인을 죽이는 복수를 위해서는 때로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타인을 해치는 대신 자신을 한 번 크게 죽이는 용서를 위해서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셋째, 주님의 용서법을 따라야 한다. 겸손과 용기라는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질 것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해져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자신을 죽이려는 군중을 내려다보며 주님께서 아버지께 바친 기도를 들어보자.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가23,33)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너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는 기도는 우리들의 용서를 보다 완전한 차원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닮은 사람이 바로 용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18,34)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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