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신자들과 함께 봉헌하는 오후 미사의 당번을 맡고 있다. 오늘은 갑자기 미사 시작 5분전에 전례 담당 수녀님이 제의실에 들어오시더니 평일 미사 대신 성 비아죠 기념미사로 봉헌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빨간 줄로 묶인 두 개의 하얀 막대기를 주시더니 미사 후에 신자들의 목에 끼우고 목 관련 질병을 없애 달라는 기도문을 외워 달라고 하셨다.
이 곳 이탈리아 신자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많은 성인들을 기념하는데 오늘의 성 비아죠는 목병을 앓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라서 특별히 목 관련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노인 신자 분들이 미사에 많이 나오셨다는 것이었다.
미사 시작 바로 전에 하얀 막대기를 받아들고 입당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다른 도리가 없어서 미사 중에 속으로 신자들의 목에 대고 바치는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또 미사 경문은 순교성인을 위한 미사로 펼쳐져 있지 않고 연중 평일미사로 펼쳐져 있어서 여기저기 페이지를 찾아가면서 미사를 봉헌했어야 했다.
경솔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이탈리아 말 미사에 많이 익숙해 졌으니까 경문을 넘겨가면서 읽지 않고 그냥 외운 대로 읊어대기로... 하지만 처음에는 잘 나가는가 싶더니 얼마 가지 않아서 사고를 쳤다. 예물기도를 마치고 찰라지간에 미사 후 목병관련 기도문에 대한 분심을 하다가 그만 감사송 “Il signore sia con voi(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을 해야 하는데 다시 미사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비송 “Signore pietà(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해 버렸다.
말을 내뱉는 순간 ‘아, 틀렸다’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고 그 뒤에 난감해하는 신자들의 약 2-3초간의 침묵 - 내게는 2-3년간의 침묵처럼 느껴졌다 - 이 이어지자 그 짧은 순간에 갑자기 식은땀이 주루룩 이마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말 감사송을 어떻게 바쳐야 하는지 생각은 하나도 안 떠오르고, 미사경문을 펼쳤으나 자꾸 ‘부활시기에 바치는 순교성인 감사송’만 나오고, 그날따라 내 옆에는 평소에 웃음이 많기로 유명한 중국신부 하나만 소리 죽여 킥킥거리고 있고, 연세 드신 신자 분들은 영 못미더운 표정으로 주례사제만 바라보고 있고......
그 순간에 어떤 선배 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할 때 절대 경문을 외워서 바치지 말고 항상 정성스럽게 ‘읽으라’고 내게 해 준 충고가 떠올랐다. 하느님과 미사에 참석한 신자 분들에게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어 정말 미칠 지경이 다 되었다. 미사를 마치고 신자 한 분, 한 분의 목에 막대기를 대고 목병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문을 외우고 퇴장을 하고 나니 한 십년은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온 정성을 다 바쳐 미사성제를 드리는 사제이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함께 나 또한 그 분을 따라 온 몸과 마음을 예물로 바쳐가며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는 제사를 바쳐드리고 싶다. 오늘은 특별히 희귀병을 앓고 있는 분들을 위한 지향으로 미사를 봉헌하고자 했었는데 미사 내내 정성을 들여 그 분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또 마음에 걸린다.
하느님 아버지! 저의 뽐내는 힘을 부수어 언제 어디서나 겸손한 사제로 엎드려 살게 하소서.
“너희의 뽐내는 힘을 부수리라.”(레위2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