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며칠간 계속해서 점심시간만 되면 인터넷을 할 수 있는 2층 복도에서 서성이는 나이지리아 출신 임마누엘 신부를 만났다. 오늘도 무심히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지나치려 하는데 어쩐지 오늘은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무엇인가를 묻고 싶어졌다.
“어이, 임마누엘신부. 벌써 점심 끝낸 거야?”
대답대신 검은 피부와 너무 대조되는 하얀 이를 씨익 드러내며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을 보내는 임마누엘 신부와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눴는데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럽고 속상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학기가 시작된 지 벌써 2달이 지나도록 임마누엘 신부는 언제나 점심을 걸러왔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함께 점심을 먹자는 나의 제의를 고맙다고 하면서도 정중하게 거절하는 그를 남겨두고 혼자서 점심을 먹는데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가 없다. 속이 상했다.
나 역시 유학생의 신분으로 어떤 식으로든지 사치를 하며 살아가지도 또 그렇게 살아갈 처지도 되지 못하지만 이렇게 점심을 굶고 지내야 할 정도로 어렵게 유학 생활을 꾸려나가는 신부님들을 대할 때마다 드는 상대적 풍요로움은 항상 나를 부끄럽게 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물질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는 만큼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다. 영혼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만큼 나는 편안한 삶에 더욱 익숙해져 가며 내가 처한 현실의 문제들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곳에 와서 많은 가난한 사제들을 만났고 또 그들과의 깊은 형제애를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항상 우리들의 관계 안에서 내가 그들에게 나누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들, 진정으로 사제가 나누어야 할 것들을 그들은 나에게 나누어 준다. 특히 처해진 상황으로서의 가난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선택한 가난 안에 머물러 있는 몇몇 사제들을 대할 때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배부른 사제와 배고픈 사제, 풍요로운 소유를 택한 사제와 풍요로운 존재를 택한 사제, 같은 사제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는 모르나 어쩌면 돼지와 소크라테스가 나란히 철학을 한답시고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큰 존재의 차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돼지가 철학을 알까? 만약 안다 해도 그것은 돼지들의 철학일 뿐이다. 배부른 사제가 하느님을 알까? 만약 안다 해도 그것은 배부른 사제들의 하느님일 뿐이다.
그대 최강, 배부른 사제여! 배부른 이들의 사제여!
영혼의 깊은 곳까지 배어있는 탐욕의 기름기를 걷어내 버리라.
굶고 있을 임마누엘 신부를 놔두고 혼자서 꾸역꾸역 밥을 삼키는데 자꾸 시야가 흐릿해졌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살고 싶다. 이제는 정녕 그렇게 살고 싶다. 임마누엘 신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앉아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루가6,20-21)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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