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사랑이 움직인다고?

김레지나 2011. 10. 18. 22:34

아주 오랜만에 결혼을 몇 달 앞 둔 여자후배를 만났다. 때가 때인지라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경제적인 면에서 아직 그들이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앞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주로 물었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 맞아요. 어려운 상황이 다가올지도 몰라요. 아니, 올 거예요. 하지만 지금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가난도 그와 함께 하는 가난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가난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그를 피할 수는 없어요.”

맞는 말이다. 고통이 예견된다고 해서 사랑을 피해서는 안 될 것이고 또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힘은 결혼을 결심할 만큼 사람들을 용기 있게 만든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사랑은 단순한 연애감정과는 다르다.

내가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넌 네 사랑에 충실히 빠져들 수 권리도 있고 그에 대해 책임질 의무도 있어.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더라. 난 안 해봐서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현실 앞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너무 무기력하다고. 뭐, 심지어는 사랑은 움직인다고도 하니까......사랑에 대한 네 생각을 듣고 싶은데?”

한국말이 서툰 그녀의 대답으로 내가 마구 웃어대는 통에 결혼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그걸로 어설프게 끝이 났다. 그녀는 또 이렇게 답했다.
“심지연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건 심지연의 사랑일거예요. 제 사랑은 움직이지 않아요. 제 사랑은 그에게서 뗄 수 없도록 붙어버렸어요.”

사랑을 단순한 연애감정으로 보자면 사랑은 움직일 수도 있다. 나는 약혼녀에 대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진정성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녀의 사랑의 감정은 ‘움직일 수도’ 있다.

그녀의 표현대로 ‘뗄 수 없도록 붙어버린 사랑’은 삶 안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보다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보면 훨씬 더한 무게가 느껴진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사랑은 때로는 불타는 사랑의 감정과는 전혀 다르게 상대를 한 없이 놔 주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또 때로는 식어가는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게 상대를 한 없이 껴안고 있어야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사랑은 ‘나의 감정’에 충실하면 된다. 만약 감정이 식으면 사랑도 따라 식는 것이고 감정의 대상이 바뀌면 사랑도 따라 바뀌면 그 뿐이다. 하지만 삶의 방식으로서의 사랑은 ‘살아있는 이유’에 충실해야 한다. 내가 왜 살아있는지 그 존재의 이유에 대한 충실한 답을 표현하는 사랑이다. 결국 생명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을 상대와 나의 사랑 속에서 이루는 것이 삶의 방식으로서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결코 움직일 수 없다. 변할 수 없다. 끝도 없다. 인간의 사랑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고 싶거든 죽음으로서 그의 존재의 이유를 표현하는 예수의 사랑을 보라. 아니, 그게 너무 어려우면 눈을 감고 당신의 어머니를 그려 보라. 인간이 참으로 대단한 것은 이렇게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며 완성시켜 간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을 따라서 살라는 것입니다.”(2요한1,6)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