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딜레마

김레지나 2011. 10. 18. 22:39

동이 틀 무렵까지 책상에 앉아 있다가 몇 시간 눈을 붙인다고 침대에 누웠는데 5분도 채 안되어 알람이 울린다. 알람을 잘 못 맞추어 놓았나? 아니다. 벌써 그 사이 3시간이 흘렀다.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있을 부제 서품식에 가려면 지금 일어나야만 한다. 으...... 일어날까 말까. 그래, 일어나자.

조금 늦게 샤워를 하면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온 몸에 바디샴푸 거품이 칠해져 있는데 물이 안나온다. 아예 바닥에 주저 앉아 배에 거품을 하얗게 칠한 뒤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며 물이 다시 나와주기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침부터 누굴까? 으...... 받을까 말까. ‘울리다 말겠지’하고 계속 그림을 그리는데 벨도 계속 울린다. 비눗물을 바닥에 뚝뚝 흘리며 맨발로 뛰어나와 수화기를 들으려고 하는 순간 벨이 끊긴다. 어차피 바닥을 버릴 셈이었으면 조금만 빨리 나올걸......

한 시간에 두 번 오는 870번 버스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30분을 넘게 기다렸는데도 올 생각을 안 한다. 무심코 구두를 내려봤더니 양 쪽 구두끈이 매어진 모양이 다르다. 으...... 고쳐 맬까 말까. 뒤로 돌아서 담벼락 모퉁이에 발을 올려놓고 구두끈을 고쳐 매고 있는데 지금까지 기다렸던 870번이 정차도 안 하고 지나가 버린다. 오늘 도대체 왜 이래?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아니, 우리들 인생 자체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점점 짙은 윤곽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사안에 따라 한 달, 두 달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장고를 거듭해야만 하는 선택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고 오늘 나의 아침처럼 짧은 시간 안에 순발력있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 결정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일상의 가벼운 선택의 순간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 어떤 자기 기준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첫째, 내 안의 딜레마.
잠에서 깨어나 서품식에 가느냐 마느냐하는 경우와 같이 나 혼자만의 육체적 고달픔과 정신적 고달픔 사이의 선택이라면 서슴치 않고 육체적 고달픔이 따르는 결정을 내린다. 육체의 고달픔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피하려 했다가는 몇 년이 지난 뒤까지도 정신적 고달픔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경우가 살다보니 한 두 번이 아니다.

둘째, 관계 안의 딜레마.
살고 죽는 경우가 아니라면 - 우리들의 주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러하셨지만 - 가능한 한 상대방을 배려하는 결정을 내린다. 바닥에 떨어진 비누 거품 몇 분 닦는다고 해서 내가 죽을 일도 아니고 실례를 무릅쓰고 아침 일찍 전화를 건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지도 모를 상대방을 배려했어야 옳다.

셋째, 그 밖의 딜레마.
선택 후의 상황을 그저 즐긴다. “어? 구두끈을 고쳐 매고 있는 중에 오래 기다렸던 버스가 그냥 지나가네? 참 우연치고는 재밌는 우연이 나한테 벌어졌네. 하하하” 이렇게 말이다. 사람들이 특별히 이 세 번째 기준을 잘 따라산다면 훨씬 여유로운 세상이 될 텐데......

지금은 갈팡질팡 ‘나의 선택’인 것으로만 느껴지지만 한 생을 거의 마감하는 때가 되어 돌아보면 ‘소명’이라는 이름의 한 화살에 관통되어 있을 우리들의 삶을 좀 더 큰 기쁨으로 채워가도록 하자. 좋은 몫을 선택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자 우리들의 기쁨이다.

“하느님께서 한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로마11,29)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