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사람을 살리는 말, 죽이는 말

김레지나 2011. 10. 9. 17:02

오늘은 교회법을 함께 공부하는 콩고 출신의 이화 신부가 그의 수도 공동체에 나를 초대한 날이었다. 이름도 한국 이름 비슷하고 정이 많은 심성도 한국 사람과 비슷하고 또 게다가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나서 지난 번 동료들과 함께 생일 파티도 공동으로 가졌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와 나는 아주 각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가 버스에 올랐을 때 이미 버스는 초만원 상태였었고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사람들의 호흡으로 인해 쾌쾌한 냄새와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때 어느 이탈리아 할아버지가 남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버스가 완전히 유색인종들로 가득 찼구만. 도대체 내가 아프리카 어디쯤에라도 살고 있는 거야? 쯧쯧쯧 불쌍한 이탈리아 사람들이라니......”

그 말을 들은 이화 신부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는 몇 번이나 그 이탈리아 노인을 향해서 화를 토해낼 듯하다가 몇 식 호흡으로 스스로의 화를 달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이화 신부의 수도 공동체를 향해 걸어가면서도 그는 별 말이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내가 먼저 말을 건냈다.

“이화, 아까 그 정신 나간 노인이 한 말을 지금까지 마음에 담고 있는 거야? 나처럼 그냥 버스에 두고 내리지 그랬어. 하하하... 그냥 잊어버려.”

“그래,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 여기서 못 살아. 최 신부 넌 잘 모를 거야. 이 곳에서는 피부색이 검은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한 죄가 얼마나 큰지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오후 내내 점심을 먹을 때도, 수업 시간에도 이화 신부의 얼굴은 좀처럼 환하게 펴지지가 않았다. 내 뱉어진 말은 들리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까지도 남는 것이 그가 사는 동안 내 뱉은 ‘말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부주의하게 내 뱉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지, 또 상대방을 얼마나 심각하게 괴롭히는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 가끔씩 심하게 꼬인 혀를 가진 어떤 이들로부터는 일부러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해 세치 혀를 놀리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한다.

자기 안의 생각과 감정을 잘 다스린 뒤 꼭 필요한 말을 필요한 때에 건네는 사람들의 말은 무게가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고 아무 말이나 세치 혀가 놀리는 데로 막 내뱉는 사람들의 말은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더 나가서는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예술적 기능보다는 단순히 세치 혀를 놀리는 유희에 가깝다.

말은 천 냥 빚을 갚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도 또는 살리기도 할 정도로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나쁜 생각은 내 안에 머물러 나를 죄로 빠뜨리지만 나쁜 말은 나는 물론이거니와 상대까지 죄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혹 누군가 말로 인해 상대에게 자주 상처를 입힌 적이 있거나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유혹에 자주 빠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최대한 말하는 시간을 줄일 것이다. 그에게는 말 대신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치유 방법이 없다. 기도하면서도 하느님께 험담만 늘어놓는 수준이라면 영 가망이 없을 것 같고......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표적은 네 갈래로 나타나는데 선과 악과 삶과 죽음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을 좌우하는 것은 언제나 혓바닥이다.”(집회37,17-18)

“당신은 나의 보호자시고 기둥이셨으며 내 몸을 멸망으로부터 구해 주셨고 나쁜 말을 하는 혀의 함정으로부터 거짓을 만드는 입술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집회52,2)

 

 한국외방선교회 최강스테파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