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모두가 덜덜 떨어가며 월요일 1,2교시를 마쳤다. 휴식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내 곁으로 쥬세뻬 신부가 다가오더니 자기도 도저히 추워서 견딜 수가 없다며 지하 식당에 내려가서 코코아를 마시자고 제안을 했다.
“맞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뜨거운 코코아를 한 잔 얼른 마시고 올라오면 좀 따뜻해 지겠지? 자, 서두르자구.”
“어, 최신부 왜 그렇게 항상 힘들게 살지? 천천히 차 한 잔 하자는데 왜 꼭 뛰어가야 하냐구?”
나와 아주 가깝게 지내는 브라질 출신 쥬세뻬 신부는 아침 수업에는 거의 일교시가 끝나갈 무렵에 도착해서 여유 있게 강의실 문을 열고 교수에게 손 흔들며 인사할 것 다 하고, 학생들하고 눈 마주치면 또 눈 인사 다 나누고, 강단 앞을 지나면서 빈자리를 찾아가 앉는 성격이다. 물론 쥬세뻬 신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남미 출신 신부님들은 도대체 서두르는 일이 없다.
오늘 지하 식당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데도 빨리 서둘러서 마시고 3교시 시작하기 전에 강의실에 들어가자고 졸라대는 나를 향해 다시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한 마디를 빼놓지 않는다.
“그럼 먼저 가. 난 뜨거운 거 빨리 못마시니까. 그리고 좀 늦으면 늦는거지 최신부는 뭘 그리 항상 서두르냐구. 좀 늦게 가서 몇 분 강의 안 들어도 아무 일 없어. 그러니 이리 앉아. 빨리”
3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도대체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느긋한 쥬세뻬 신부에게 내가 생각하는 바에 의해 ‘우리가 당연히 서둘러야만 하는 이유’를 던져 봤다. 그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몹시 궁금해 하면서......
“강의 시간에 맞춰서 서둘러 가자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나 제 시간에 맞춰서 강의에 열중하고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함이야. 우리가 뒤늦게 문을 삐걱거리며 열고 들어가면 아무래도 관심과 시선을 빼앗지 않겠냐구. 사제는 나보다는 타인을 위해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나는 ‘천하의 쥬세뻬 신부도 자신이 신부라면 적어도 이 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겠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어서 올라갈 것을 눈짓으로 종용했다. 그러나 내 말에 대한 쥬세뻬 신부의 답변을 듣고 갑자기 ‘아, 이렇게 다르구나’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서 한참을 웃었다.
쥬세뻬 신부는 내 말이 끝나자 다시 한 번 전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그 귀여운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이, 최신부. 신부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저 강의실에서 강의하는 교수신부나 그 강의를 듣고 앉아있는 신부들이 우리를 좀 배려하고 이해해 주겠지. 추워서 코코아 한 잔 마시고 왔다는데 어쩌겠어. 그리고 우리가 늦게 들어가서 만약 정말로 방해가 된다면 시간되면 문을 잠그면 되잖아. 우리는 우리 잘못으로 늦었으니 안 들어가면 되는 거고...... 내 말이 틀렸어?”
이런 쥬세뻬 신부를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가끔 우리는 너무 흑백 논리에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충분히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내가 옳니, 혹은 네가 옳니 하면서 꼭 하나의 해답을 찾으려 논쟁을 벌이기 일쑤다.
하지만 생각이 다른 것은 그저 생각이 ‘다른 것’일 뿐, 이 서로 다른 생각이 꼭 일치되어 하나도 움직여야 된다는 삶의 법칙은 원래 없다. 다만 나머지 세 개는 오답이고 한 개의 정답만이 숨어 있는 사지선다형 객관식 시험문제와 그 시험문제를 잘 푸는 방법으로서 ‘무조건 암기’를 강조하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 가면서 우리는 삶에 있어서도 항상 한 개의 정답만을 찾으려 그토록 애를 쓰며 살아간다.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똑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창조주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지어진 우리들은 하느님의 창조적 에너지를 그대로 우리들 존재 깊은 곳에 담고 있기에 사람마다 각기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상대가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을 마주할 때 맘 속으로 ‘그럼 둘 중 누가 옳은가’를 따지며 스스로 조급해하지 말고 그저 ‘나와 다르구나’라고 생각하자. 이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얼마나 여유로워 지는지 그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엄청난 선물이다. 우리들의 생각들 대부분은 ‘너도 옳고 나도 옳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창세1,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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