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가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시며 껄껄껄 웃곤 하셨다.
"얘야, 네가 제법 말을 하게 되었을 때 하루는 내가 너에게 '밥은 왜 먹지?'하고 물었더니 네가 뭐라고 했는지 알어? 눈을 깜박거리면서 '먹고 살려고' 하더라... 껄껄껄"
조금 커서 식욕이 왕성한 중학 시절때 끊임없이 먹어대면서도 깡마른 나를 보고 아버지가 내게 하신 질문과 내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와아... 가끔씩 너를 보면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먹는 건지 먹기 위해서 사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단 말이야. 넌 어떤 것 같애?"
"당연히 살기 위해 먹죠."
세상에 대한 반항심으로 꽉 차 있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드디어 아버지가 '너는 왜 사느냐?'라는 질문을 내게 하셨다.
"제가 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고 살고 싶어 사나요?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죠."
"그럼 네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네가 주체가 돼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네. 왜 사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자기 나름대로의 답이 없으면 꼭 살아야하는 이유도, 목적도 없는 셈이네. 여기 불쌍한 인생 하나 또 늘었구만...쯧쯧쯧."
그리고 성년이 된 나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아버지를 떠나 세상 곳곳을 떠돌아다녔고 아버지께서 먼 여행을 떠나실 때가 되어서야 다시 집에 돌아왔다. 아직 먼 여행을 떠나시기에는 너무나 이른 그때 이미 아버지는 오래 동안 서 계실 수도 없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버리고 미움도 버리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하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약 3개월간 암으로 투병하시면서 자리에 누워계시는 동안 내게 더 이상 질문을 하시는 대신 자주 옆에 있는 내게 낭송을 부탁하셨던 당 한산의 시다. 실제로 아버지는 마치 구름을 타고 청산에 소풍이라도 가시듯 아주 가볍고 밝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긴 여행과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내 머릿속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나 역시 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담담하게 맞이하고 싶었다.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우리들 인간의 거룩한 죽음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바로 저 깊은 ‘돈과 섹스’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육체적인 편안함과 쾌락을 가져다주는 ‘돈과 섹스’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 보다 더 폭넓은 전 인류적 가치, 즉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과감히 한 생을 투신하고 목숨을 바치는 많은 이들로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해방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점에 예수님이 있었다. 생물학적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우리들 인간들에게 부활이라는 새로운 삶의 영역을 열어준 예수님의 삶의 양식과 가르침에 빠져들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 해도 내 증언은 참됩니다. 그것은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요한8,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입니다.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요한11,25-26) 내 계명들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요한14,21)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13,34) 당신들이 내 말 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8,31-32)”
누구든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며 또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이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한다면 이 말씀에서 바로 삶과 죽음의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교의적인 주석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생생한 자기 체험. 나는 이 분의 살아있는 말씀을 믿는다. 믿을 뿐 아니라 생생하게 체험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내가 살아있다는 신비감, 사랑의 말씀 안에 머무르지 않을 때의 그 주검 같은 싸늘한 고통. 생물학적인 차원의 생과 사를 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생생하게 체험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열쇠는 바로 ‘사랑’이다.
우리들 인간들은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살고 죽어간다. 이제 나에게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라는 질문은 ‘살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가?’하는 질문과 그 의미가 같다. 나는 살기 위하여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산다. 언젠가 영원한 주님의 사랑과 하나되는 체험을 하는 순간 나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김상용 님의 시를 떠올리며 추운 바람 속에 서서 하늘 보고 미소 지어본다.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김 상용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요.
갱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강론 말씀 (가나다순) > 최 강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을 살리는 말, 죽이는 말 (0) | 2011.10.09 |
---|---|
너도 옳고 나도 옳다. (0) | 2011.10.08 |
☆★ 하느님께서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지 그것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0) | 2011.10.08 |
하나면 되는데 둘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0) | 2011.10.08 |
도둑놈들의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0) | 2011.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