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현행법 체계’라는 제목의 책과 일주일정도 씨름한 끝에 겨우 읽고나서 다시 이틀에 걸쳐 낑낑댄 끝에 그에 관련한 국제법 담당교수의 9개 질문에 답하는 과제를 가까스로 마쳤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른데서 비롯됐다. 법을 전공한 분답게 워낙 명확하고 간결한 답을 요구하는 담당교수는 9개의 질문에 대한 답이 A4 용지로 위, 아래, 좌우 여백 각 2cm, 글자크기 12, 줄 간격 1.5포인트 기준을 지키지 않거나 또 만약 4장을 넘어가면 아예 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몇 번을 강조했었다.
나는 일단 첫 번째 작업은 분량에 구애받지 않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써나가기로 했다. 이것 저것 쓰고 싶은 것을 다 쓰고 나서 교수가 원하는 규격에 맞추고 보니 내용이 자그마치 2장 분량 정도나 초과돼 있었다. 쓰는 것이 문제지 지우는 것은 쉬울 것이라는 애초 생각과는 달리 6장을 쓰는 것보다 거기서 2장을 덜어내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말도 아닌 이탈리아말로 어렵게 써내려간 과제라서 한 문장을 지우는데도 너무나 아깝고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고, 읽고 또 읽어도 모든 문장이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꼭 필요한 것만 같았다.
다음 날이 되어 새벽 미사를 마치고 책상에 앉았는데 점심을 먹기 전까지 겨우 한 장 분량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오후 내내 책상에 앉아서 신음소리를 내가며 애를 쓰는데도 더 이상 줄여지지가 않았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애써서 써 놓은 것들을 지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모른다. 처음 쓸 때 절제하면서 꼭 필요한 내용만 진술했더라면 그런 고생은 안 해도 되었을 것을 말 그대로 사서 한 고생이었다.
사람들 사는 모습도 마치 이와 같다. 내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은데도 이것, 저것 불필요한 것들까지 끌어 모으느라 지금 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살아간다.
한참이 지나고 나면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난 살림들을 한번쯤 정리해 보지만 이미 너무 익숙해진 것들이어서 선뜻 밖에 내어놓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뿐더러 앞으로 언젠가 한번은 꼭 쓰일 것만 같은 생각에 슬그머니 한 쪽 구석에 다시 쑤셔 놓는다. 그것을 정말 쓸 수 있을까?
무겁고 복잡하다. 하나면 되는데 둘을 가지고 살아가자니 무겁다. 없어도 될 것들까지 다 이고 지고 살아가자니 복잡하다. 가볍고 단순한 삶을 원한다면 일단 가진 것을 줄여야 한다. 하나면 되는 것을 둘 가지려 하지 말고 이미 둘을 가졌거든 얼른 하나를 놓아야 한다. 사는데 꼭 필요한 것, 그것을 하나 가지고 살아가면 된다.
진땀을 흘려가며 겨우 분량을 맞췄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꼭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네? 없어요. 없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땅에 쌓지 마시오. 거기서는 좀과 벌레가 갉아먹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으시오. 거기서는 좀도 벌레도 갉아먹지 않고 또 거기서는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않고 훔쳐 가지도 않습니다. 사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 거기에 당신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마태6,19-21)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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