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최 강 신부님

교황님이 매일 돌아가실 수도 없고

김레지나 2011. 10. 30. 10:50

2005년 4월 8일,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로마 시내 곳곳에서는 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지나가는 사제들에게 고백성사를 청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평상시에는 무슨 이런 날라리 신자들이 다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유럽의 젊은이들이 교황님의 서거 이후 오늘 장례식이 치러지기까지 보여 준 태도는 그야말로 2천년의 그리스도교 역사가 몸에 밴 기본기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톨릭교회의 사제이면서도 유전으로 물려받은 내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불교적 또는 유교적 심성을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심성 또한 우리 몸의 피처럼 그것을 빼고는 그들의 삶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붉고 진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비단 2천년이라는 시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제공해 주고 있는 근본적인 종교적 상황의 차이로서 바꾸어 말하면 교황님이 돌아가셨을 때와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 유럽 신앙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심성을 자연스럽게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역사와 종교 문화적인 상황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길과 우리가 우리의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은 다르다.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가 담고 있는 외적인 그리스도교 문화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속해 있는 사회는 그리스도교 문화를 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인 각자가 열정을 기울여 스스로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아야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치솟아있는 빨간색 십자가의 숫자가, 대형성당을 가득 매운 신자들의 숫자가 우리들의 하느님에 대한 내적 열정의 척도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런 것들은 외적인 교세의 팽창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에 불과할 뿐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는 일은 지극히 은밀한 하느님과의 친교의 시간을 먼저 요구한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는 시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온 감각을 집중해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어루만지는 시간을 적어도 하루에 한 차례 할애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하다. 깜깜한 속에서 빛을 보고 우주가 내는 소리를 듣고 저 손가락 끝 미세한 신경 하나하나까지 하느님을 만져보는 시간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평화와 행복, 이런 환희를 맛보는 것보다 더 기본적인 종교 활동이 또 어디 있겠는가?

처음에는 다소 힘들게 느껴질지 모르나 눈을 감고 앉으면 앉을수록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또 당신을 어루만질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절대자의 사랑 안에서 이토록 부족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부둥켜안고 함께 길을 걸어주는 이웃들에게 감사드리기도 하고 또한 용서를 청하기도 하며 그들과 하나가 되는 체험보다 더 중요한 종교 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마음 안에 하느님을 담는 일,
그럼으로 인해 하느님 안에 온전히 잠기는 일,
이러한 내적인 하느님 체험을 통해 외적인 삶의 모습을 바꾸는 일,
우리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좀 더 내적인 차원으로 깊어질 필요가 있다.

자신과 하느님께 깊게 빠져드는 신앙의 재미를 못 느끼는 이들의 종교적 성숙을 위해 매일 교황님이 돌아가실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은 눈을 감고 성체 앞에 앉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우리들의 신앙은 너무 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친목계 모임하듯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눈가림으로만 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에페6,6)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