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1년

♣♣ 수술 후 사흘째 오전 - 믿음과 사랑을 완성해내기 위한 '작은 일'

김레지나 2011. 10. 3. 12:38

 

믿음과 사랑을 완성해내기 위한 '작은 일'

수술 후 사흘째 되는 날 오전- 2011년 9월 8일 목요일

 

 

 새벽에 정맥 주사관을 뽑았다.

 진통제는 이제 먹는 약으로 바뀌었다.

 

 

  Y 님이 오랜만에 전화를 하셨다. 반가워서 명랑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아직은 힘이 없어서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Y 님의 어떤? 말씀에 한참동안 깔깔 웃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Y 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되짚어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친구들은 내가 다시 아프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기에 앞서 당황하는 눈치였다.“너 절대긍정으로 잘 살았잖아. 근데 왜 재발해?”,“하느님이 네 희생이 더 필요하셨을까? 네 자세가 좋다고 자꾸 주시나봐. 어딘가에 필요하셔서.”

  친구들의 추측처럼 하느님께서 내 고통을 좋은 곳에 쓰시려고 나를 아프게 하셨다고 믿어버리면 오히려 마음이 편할까? 나야 하느님을 사랑하니까,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해버리면 내가 건강관리를 잘 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나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덜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좋은 점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추측은 위험한 것이다. 아니 틀린 설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여태껏 누린 좋은 것들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불행 자체를 하느님의 섭리 탓이라고 믿는 것이 하느님을 떠날 구실이 되기 십상일 테니까.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시지는 않는다. 동화책에 나오는 마술사는 몸에 좋은 마법약을 만들기 위해 개구리 뒷다리, 거미줄..등등을 가마솥에 넣고 푹푹 끓여야하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굳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재료로 삼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고통이 존재할까? 우리의 고통 자체가 하느님께 필요해서가 아니다. 하느님이 잔인한 신이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잘은 몰라도 인간이 고통을 감수한 가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프게 된 것도 하느님께서 내 고통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암환자들의 평균체력보다 훨씬 약한 몸으로 힘든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0.00001 퍼센트라도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부분이 있었다면, 고통을 통해 내가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기를, 영적으로 더 성숙할 수 있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삶에서 어떤 것들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야할지 구별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들 문제될 것은 없다.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일이건 그렇지 않은 일이건 상관없이,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테니까.

 

  불행 중 다행히도, 나는 ‘일상의 일’들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는 일’을 하면서도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고 빨래하는 것처럼, ‘고통을 겪는 것’도 하느님을 위한 ‘일’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을 꾸준히 정성껏 하기가 쉽지 않듯이, 사랑을 위해‘고통을 겪는 일’도 잘해내기가 쉽지는 않다. 아마 다른 어떤 ‘일’보다도 노동 강도가 높은 ‘일’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앞으로의 내 고통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내 믿음과 사랑을 완성해내기 위한 ‘작은 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지향으로 그 ‘작은 일’들을 해나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과 같은 진짜배기 평화를 세상에 전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리피 4장 11-12절)

 

 

                                                                                           2011년  엉터리 레지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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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신부님의 책 <신앙의 인간 요셉 p.122~123>에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말씀이 있다.

<전략>

  도대체 무엇이 하느님의 섭리인가? 형들이 요셉을 질투하여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 하느님의 섭리인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증오심에 불타 무고한 요셉을 성폭행자로 고발해서 감옥에 보낸 것이 하느님의 섭리일까?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부족한 인간들이 미움과 질투, 분노와 증오 때문에 만들어 낸 비극적 상황일 뿐이다.

  이런 비극적 상황에서 하느님이 굳이 책임져야 할 몫이 있다면 인간들의 사악한 행위를 보고도 아무 간섭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요셉의 생애는 불행한 운명에 빠졌던 한 젊은이의 눈물겨운 성공담이 아니다. 그의 생애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대하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한 종 요셉을 통해서 대기근 중에도 온 세상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보살피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이집트로 이주시켜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이 형성되도록 발판을 마련하신다. 요셉의 재난 앞에서 하느님의 침묵은 구원사적 전환점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섭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느님의 섭리는 어떤 비극적 상황에서도 사람과 함께하시며 돌보아 주신다는 것이다. 요셉의 경우를 보자면 하느님의 섭리는 요셉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팔려간 요셉을 돌보는 것이요, 요셉을 무고하게 성폭행자로 몰아 감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간 요셉을 돌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