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1년

♣♣ 수술 후 사흘째 오후 -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김레지나 2011. 10. 5. 20:25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이 잔을 들겠느냐?)

 

수술 후 사흘째 되는 날 오후

 

 

  이 교수님의 수술이 밤늦게까지 지연되는 바람에 수술 후에 회진을 오신 적이 없었다. 저녁쯤에는 만날 수 있겠다 싶어서 점심 무렵 머리를 감고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여서 힘들게 헤어롤을 말았다. 5년간 항암약을 먹어왔던지라 머리숱이 적어져서 부풀려 띄우기라도 해야 좀 봐줄만 하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로 대충 헤어롤을 말고 머리가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분만 더 있으면 봐줄만한 헤어스타일이 완성될 판이었는데.......아차차, 하필이면 고 순간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 교수님이랑 주치의 선생님이 병실로 들어오시는 것이었다으다으다으~~~.

  이 교수님이 내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파마하고 계시네요.”라고 하셨다.‘에고, 아깝당. 이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는데, 5분만 더 늦게 오시지.’나는 멋쩍어서 더욱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5년 전보다는 덜 아프네요.”라고 말했다. 이 교수님이 5년 동안 림프절 절제한 오른쪽 팔에 부종은 없었는지 물으셨다. (림프절 절제를 한 사람들 중 20%쯤은 림프부종을 겪는다고 한다. 팔뚝이 많이 굵어지기는 했지만 림프 부종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심하게 부은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평생 양쪽 팔에서 채혈 금지, 혈압 측정 금지, 뜸이나 찜질 부항은 물론 경락 맛사지도 받으면 안된다고 한다.)

  헤어롤 말고 있다가 기습 방문을 받은 데 놀라서,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볼 것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병실을 나가자, 엄마랑 나는 한참을 웃었다.

  “잘 보일라고 헤어롤 말고 있었는데, 하필 그때 들어오실 게 뭐야. 망했다. 으하하하.”

 

  문자로 힘내라 응원해준 분들에게 답문자를 보냈다.

  남동생은 열흘 전에 독일에 출장을 갔다. 오늘 오는 날인데,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가 연착을 하는 바람에 프랑크푸르트 발 비행기를 놓치고 내일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점심때쯤 환우카페의 전임 회장님이 병실로 오셨다. “오늘 선배 환우와의 만남이 있거든요.”하면서 초대쪽지를 건네주셨다. 모임에서 몇 번 뵈었던지라,“어머, 회장님”하고 반갑게 불렀더니,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셨다. 두 번째 수술이라고 대답했더니 안타까워하시면서,“왜 또 여길 왔어~”하셨다.

  앉아 있는 게 아직 힘들었지만 회장님 만나니 반가워서‘선배환우와의 만남’에 가보았다. 다들 편안한 얼굴이었다.

  5년 전에 하느님께 너무 힘들다고 위로해달라고 청했을 때,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의지를 주었다. 그것도 내가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동시에 입원 중에 만났던 환우들의 편안한 표정이 떠올랐었다.‘아, 하느님께서 사람들 각자 각자에게 의지를 부어 만드셨구나. 믿는 이건 안 믿는 이건 다 똑같이 사랑하시는구나. 나만 특별히 더 사랑하시는 게 아니구나.’하고 깨달았다. 내 의지로 혼자 서라는 하느님의 주문이 야속하게 생각되었고 남은 항암치료가 두려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선배와의 만남에서 다른 환우들의 편안한 표정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로웠다. 나는 하느님께 조용히 말씀드렸다.

  “맞아요. 하느님. 저 환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특별히 사랑하셔요. 저렇게 대견하게 잘 견디고 있잖아요. 하느님께서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에요.”

 

  전임 회장님은 연세가 꽤 많으신데도 나보다 열 배는 더 열정적이고 활기찬 모습이셨다.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회장님은 당신의 투병생활을 간단히 이야기해주시고, 신앙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잠깐 말씀하셨다. 같이 모인 환우들이 대체로 밝은 표정인데다 태평한 성격들인지 질문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회장님이 알아서 이것저것 도움 되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어떤 분이 재발하면 어쩌나 두렵다고 하셨다. 누군가 “요즘에는 의술이 발달해서 거의 재발 안 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해요.”라고 했다. 모두들 그 말에 안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행여 내가 재발해서 온 것이 가뜩이나 힘든 분들에게 두려움을 더해 줄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누가 가발에 대해 물어 보길래, 가발 싸게 살 수 있는 곳을 알려주다가, 어이쿠, 그만 내가 재발환자인 것이 들통나 버렸다. 여러 분들이 목소리를 모아“어휴~ 관리 좀 잘 하시지요.”라고 하셨다. 재발하고도 환한 표정으로 잘 받아들이는 내 모습이 그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웃기만 할 수밖에.

 

  모임을 끝내고 병실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환우 한 분과 그 환우의 친구로 보이는 분이 같이 타셨다. 인상 좋은 친구 분이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표정이 참 편안하시네요. 얘는 아프게 되었다고 아무한테도 말을 안했어요. 내가 친구들한테 다 연락했다니가요.”라고 말했다. 이어서 환우를 보고 “거 봐.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하잖아. 많이 웃고.“라고 했다. 착해 보이는 그 환우가 ”나 잘 웃는데. 맨날 웃는데..“하면서 빙긋 웃었다.

  그분들을 보고 5년 반 전에 수술을 앞두고 한참 힘들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주위 사람들로부터“긍정적으로 살아. 걱정도 하지 말고.”라는 말을 들으면 좀 억울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잘 웃고 명랑하게 지내고 순간순간 만족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무슨 스트레스 받았니?”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너는 스트레스 관리를 할 능력이 없었니?”라는 핀잔을 듣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 환우의 친구는 정말 친구를 위해주는 진심어린 표정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설령 받아들이기 싫은 말이라도 위로가 되게 마련이다.

  나도 다시 친구들에게 잔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잔소리 중 하나가“제발 글 좀 쓰지 마라. 컴퓨터 전자파 해롭다.”이다.ㅎㅎ 나는 친구들의 잔소리에서 사랑을 느낀다. 나는 고마워서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알았어. 그만 할게.”라고 대답하곤 했다. 지키지 않을 약속이지만, 걱정해주는 친구에게 달리 감사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병실로 돌아와서 재발을 걱정하는 환우들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분들이 재발이나 고통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했다. 어떤 말이 그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힘든 항암치료를 앞두고 있는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평화를 얻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했다.

  환우들에게나 나 자신에게 해 줄 말로 떠오르는 것은 고작 “다 받아들이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요.”밖에 없었다. 그 말을 어떻게 더 풀어서 설명할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천주교 원목실에서 나온 봉사자분이 주고 가셨던 9월 4일자 평화신문을 읽었다. 어떤 신부님의 묵상글에 우리가 강건한 성모님처럼 되려면 생길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중국 철학자 임어당의 말씀도 인용되어 있었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최악의 경우를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다.” 어떤 결과이든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을 때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지며 세 번째 단계인 ‘문제 해결의 단계’로 올라설 수 있다.“

  뜻밖에 답을 찾게 되어 반가웠다.

 

   신문을 군데군데 읽고 나서는 병원에서 틈나면 읽으려고 챙겨 왔던, 헨리 J.M 뉴엔 신부님의 책을 처음으로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제목은 <이 잔을 들겠느냐>이다. (엄마는 책 제목을 보고 “아이그, 무서워라”라고 하셨다.^^) 놀랍게도 그 책에서도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내 머릿속에 모호하게 한두 문장으로만 있는 생각들이 근사한 말로 잘 설명되어 있었다.

 

  <이 잔을 들겠느냐> p.81~82 - 헨리 J.M 뉴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때 우리는 흔히 “그런 일이 있었다니 참 안됐군. 하지만 받아들이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게 좋지 않겠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삶의 잔을 마시는 것은 ‘받아들이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삶의 잔을 마신다는 것을 좋지 않은 상황에 적응하고 그 상황을 최대한 이용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삶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알고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서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위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잔을 이해하고 용기 있게 그 잔을 받아 마셨다. 유명한 사람들이었건 평범한 사람들이었건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자녀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그래서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할 만큼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도 고통의 쓴 잔을 끝까지 다 마셨다. 방법은 달랐지만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잔을 다 마시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감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번민과 고통 속에서 일생을 살았던 빈센트 반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고 지극히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면서도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뉴욕의 도로시 테이, 산 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도 그랬다. 이들은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잔을 용기 있게 비워낸 위대한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일생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슬픔과 기쁨의 잔을 마실 수 있을까?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졌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잔을 마시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그 삶은 진실하고 못한 피상적이고 지루한 삶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꼭두각시 인생밖에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도구에 불과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잔을 마심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앞에 놓인 잔을 마시겠다고 결심하면 우리가 마시는 슬픔과 기쁨의 잔이 구원의 잔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은 암센터 지하 종교실에서 저녁미사가 있는 날이다. 오래 앉아 있기가 아직은 힘들었지만 미사참례를 하고 싶었다. 사무장님이 나를 보더니, 독서를 해달라 하셨다. ‘환자 아닌 분들도 많은데 하필 아직 큰 숨 쉬는 것도 힘든 나한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게 맡겨질 독서내용이 내게 주는 말씀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서 하겠다고 했다.

 내가 봉독한 독서말씀은 미카 예언서 5,1-4 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중략)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라는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주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마시신 고통의 쓴 잔은 구원의 잔이 되었고, 쓴 잔을 다 마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평화가 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어찌 평화가 될 수 있을까 이해하기 힘들어할 테지만, 예수님 닮은 마음으로 쓴 잔을 조금이라도 맛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말씀(마태오 1,1-16.18-23) 중에서는 이런 말씀이 있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나는 독서말씀과 복음말씀을 연관지어 묵상해 보았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고통의 쓴 잔을 다 마심으로써 얻어진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성체를 모시는 시간이 되었다. 병원 성당에서는 늘 양형성체를 모신다. 대개는 분심에 가득차서 건성으로 성체를 모셨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내게로 가까워지는 성합과 성작을 보고 있으려니 눈물이 와락 났다.

  나는 사랑어린 연민에 가득차서 마음속으로 외쳤다.

  “예수님, 예수님은 어떻게 그 쓴 잔을 마시셨어요?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아프셨어요?”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받아 모시고 묵상을 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마다 당신의 사랑을 느끼기를 바라시겠지.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에 공감하는 것이 내 마음에 위로가 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님의 사랑에 공감할 때, 예수님께서도 내 공감에 공감을 하시고 위로를 받으실 것이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시듯, 예수님의 고통도 사랑도 구원도 내게는 늘 현재형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니까 좋으시지요? 그렇게 사랑을 주고받고 싶으셔서 저희를 지으셨지요? 예수님께서 늘 저와 함께 계시고 저 때문에 울고 웃고 하시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고마워요.”

 

  공감은‘사랑하는 사람’과‘함께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고통이 이천년 전에 끝났다고 해서, 이제는 부활의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고 해서, 우리를 위해 고통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고통을 잘 견뎌낼 거라고 믿는다고 해서, 내 고통을 마음 아파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저녁 늦게 시댁 사촌형제들이 병문안을 왔다.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는 병문안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그분들께는 그런 부탁을 드리지 못했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피곤해서 잠을 청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사촌들과의 대화 중 어떤 말로 인해서,‘도대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최근까지의 상처들로 인한 아픔이 해일처럼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 상처들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용서하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용서는 했지만 그것들과 잘 지낼 수 있을 만큼 화해하지는 못했었던가 보다. 5년 전에는 하느님의 위로가 고통도 두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었는데, 지금은 하느님 현존의 느낌이 없다. 그래서 나 혼자서 내 의지로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하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사소한 일들까지 떠올랐다. 나는 어릴 적부터 병약했다..... 한참 씩씩할 나이에도 나는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힘들만큼 질병에 시달렸다...... 나는 늘 내 노력이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가장 고생스러운 길로 던져지곤 했다. 예를 들어, 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받을 때, 지역 교육청에 전달된 새 교사들의 석차가 거꾸로 전달되는 바람에 나는 가장 열악한 환경의 학교에서 몸고생, 마음고생을 하며 지내야 했다..... 그 후로도 어디에 말할 수도 없는 일들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모른다.... 나는 늘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몫을 차지한 적이 없었다.....

  한꺼번에 열려버린 깊은 상처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몹시 고통스러웠다.

  나는 억울하고 서러워서 애먼 하느님께 자꾸 자꾸 물었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예?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하느님께 하소연하고 있는 내 모습에 더 슬퍼졌다.

  문득 ‘임종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이렇게 평생의 상처들을 들여다보게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나하나의 상처들과 화해하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할 숙제일까? 아니다. 나는 충분히 그 상처들과 잘 지내왔다. 이 이상은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나처럼 아실 이가 있다면...기대 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위로가 될 텐데...상처들과의 화해고 뭐고 필요도 없을 만큼..큰 위로가 될 텐데...그러나 나는 혼자였다.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주무시는 엄마에게 들킬까봐 소리 죽여 울었다.

  외로웠다.

 

                          2011년 9월 8일의 기록 -  엉터리 레지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