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1년

♣♣☆ 하느님도 모르시는 것

김레지나 2011. 9. 24. 14:03

하느님도 모르시는 것

 

 

다음은 잡지 <참 소중한 당신> 2011년 10월호, ‘하느님, 함께 웃어요.’코너에 실린 우스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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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여자를 이해하기는 어려워’

 

안드레아가 부산 해운대를 걸으며 기도하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안드레아: 하느님, 제 소원 하나 들어 주세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셨다.

하느님: 너의 변함없는 믿음을 보고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주마. 말해보아라.

안드레아: 부산에서 제주도까지 다리를 하나 만들어서 제가 언제든지 차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자 곤란한 표정으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 네 기도는 들어가는 게 너무 많아. 그게 보통 일이 아니야.

            두 곳을 이으려면 콘크 리트와 철근이 얼마나 많이 들겠냐?

안드레아는 한참을 더 생각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안드레아: 하느님, 그럼 다른 소원을 말씀드릴게요. 전 여자를 잘 모르겠어요.

              제가 여자들 심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여자들이 토라져서 제게 “됐어. 신경 쓰지 마”라고 할 때 그 말의 참뜻이 뭔지 알고 싶어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숨도 안 쉬시고 곧바로 대답하셨다.

하느님: 부산에서 제주까지 연결하는 다리? 그래, 4차선으로 해 주랴, 8차선으로 해 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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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스개 이야기를 읽고 최근에 너무도 감명 깊게 읽은 송봉모 신부님의 책 <신앙의 인간 요셉>의 내용이 생각났다.

나는 그 책을 한 달여 전(2011년 여름)에 기차 안에서 읽었다. <신앙의 인간 요셉>의 ‘들어가는 글’ 부분에 있었던 내용인데, 이 부분을 읽다가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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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p.11 (전략)

  우리가 성인들에 대해 받는 인상은 종종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비실재적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때도 없고 흠도 없는 존재, 날개만 안 달렸지 천사처럼 순결하게 이 세상을 살다 간 존재라고 생각한다. 과연 성인들은 그렇게 살다 갔을까? 도화지 위에 아무 그림도 그리지 않았는데 어찌 작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요셉을 천사처럼 생각한다면 정말 잘못된 것이다.

  요셉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열일곱 살 때 하느님께 선택받아 찬란한 꿈을 꾼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배타적 사랑과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이 요셉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본인에게 달려 있었다. 아버지의 편애는 요셉을 오히려 망가뜨릴 수 있었다. 부모의 편애를 받은 많은 철부지들이 인생을 망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요셉이 약속된 자신의 미래만 믿고 허송세월을 보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이 이집트 재상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만일 그가 어렸을 때 꾼 꿈대로 총리가 될 것이라 믿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떠벌리고 다녔다면 그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거나 누군가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은 조각하기 전에 다듬어지지 않은 돌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돌에 하느님을 새겨 넣을 수도, 악마의 모습을 새겨 넣을 수도 있다. 결과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부름 받은 사람을 신의 모습으로 조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이 어떤 인간을 당신의 도구로 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지만 그가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할지는 하느님도 몰랐다. 그래서 37년이 지난 후에야 하느님은 비로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이제야 알았다.”(22,12)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확인하기까지는 무려 37년이 걸렸던 것이다.

  이러한 말에 어리둥절해할 수도 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동거지를 모른단 말인가? 또 어떻게 하느님이 37년이 지나서야 아브라함이 당신을 진심으로 공경하는지 알았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은 했지만(2,17) 사실은 하느님이 처음부터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가 당신의 명령에 어떻게 응답할지 전혀 몰랐다. 선악과를 따먹고 안 따먹고는 완전히 아담과 하와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해서는 상관하지 않으신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책임지는 행위를 하도록 내버려두신다. 하느님은 어느 정도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락하시는가? 당신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고, 사지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허락하신다.

 

  다시 요셉에게 돌아가자.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요셉을 당신의 도구로 택했지만 그가 어떻게 할 것인지는 완전히 요셉에게 달려 있었다. 하느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요셉이 그 사랑에 맞갖게 응답할지는 하느님도 모르신다. 하느님은 단지 요셉이 당신 사랑에 충실하게 응답하기만을 바라실 뿐이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하느님은 요셉이 극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당신 뜻에 따라 바른 선택을 할 때마다 기뻐하셨을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느님 뜻에 순종했을 때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이제야 알았다.”고 기뻐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 요셉의 삶을 짚어보면서 그의 삶을 본받도록 하자. 그가 위대한 사람이었다면 우리 역시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지혜롭고, 순결하고, 위기에 강하고, 올바른 정책을 펼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우리 역시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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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부분을 묵상하다 한참을 울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실 만큼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선택 하나하나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실 것을 생각하니, 그 사랑이 고마워서, 아니 하느님의 사랑이 가엾어서 눈물이 났다.

 

(내가 감수성이 풍부해서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다. 내 눈물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나는 그 기억으로 인한 감격을 ‘눈물’ 외의 다른 언어로 풀어낼 재주가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실 때,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아마도 우리의 돌로 된 마음을 치우시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시는 것이 아닐까?(에제 36:26 참조) 아마도 그때문인 것 같다.

  나는 <신앙의 인간 요셉>을 읽은 지 일주일쯤 지나서 암이 재발했다는 선고를 듣게 되었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가 휴직에 들어가기 전날, 마지막 인연이 될지도 모르는 직장동료들에게 조심스럽게 내 신앙 체험글들을 권했었다. 그 중 한 분이 내게 위로 문자를 보내셨는데, “감수성이 풍부한 샘, 회복실 있겠지요?~ ”이었다. 나는 ‘그분이 혹시 내 체험을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탓에 느끼는 감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분은 신앙인이시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으리라 기대하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분명 비현실적인 일이라며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어서 목숨을 바쳐 증거한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거짓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은 없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해도, 그분의 백만분의 일쯤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겠지만,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사실만큼은 잘 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어떤 고난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서투르게나마 계속 전하고 싶다.)

 

  나는 두 번째 암 수술을 앞두고 “하느님은 눈치가 없으시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하느님께서 제발 참기 힘들 만큼 아프게 하지 않으시면 좋겠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수술을 받고 보름이 지난 오늘은 '우리의 눈치를 보시는' 하느님의 외로운 마음을 묵상하면서 뉘우쳐야할 지난 일들을 떠올린다. 벌써 얼마나 자주 하느님께 투덜거렸던가? 얼마나 자주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에 빠져서 어두운 눈물을 흘렸던가?

  하느님께서 매 순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는 채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니, 하느님께서 내 눈치를 살피시다가 마음 아파하시지 않도록, 내게 주어진 이 힘든 역경을 신앙으로 훌륭히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는 그를 대단히 여기시고

   그에게 마음을 기울이십니까?

   아침마다 그를 살피시고

   순간마다 그를 시험하십니까? (욥 7,21)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들은 다시 우매함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시편 85:9)

 

                                                         2011년 9월 24일 엉터리 레지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