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1년

♣♣ 수술 받은 날 - 고통을 '사랑의 기도'로 봉헌하다.

김레지나 2011. 9. 20. 19:42

 

고통을 '사랑의 기도'로 봉헌하다.

                                                                 (제목이 너무 거창허네염~~ ㅎㅎ^^)

 

 

수술 받은 날, 2011년 9월 6일

 

파란색 통원피스 모양의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동생 율리아와 휴대폰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걱정하고 있을 아들들에게 사진을 보냈다. "엄마, 수술 잘 받고 나올게.“

문자를 보내고 나서, ‘아차, 수업시간에 휴대폰이 울려서 선생님께 혼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들었다. 꺼놓았겠지. (5년 전에도 수술복 입고 사진을 찍었었다. 내가 좀 별나기는 하다.)

 

앞 차례 환자의 수술이 늦어진데다가 응급판독에 들어간 내 PET CT 결과가 일찍 나오지 않아서 예정보다 한 시간 반 늦은 12시에 수술에 들어갔다.

걱정을 했었는데, PET CT결과 이상이 없다고 했다. 정말 다행이다.

 

이송 담당 아저씨가 오셔서 이동식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수술장으로 갔다. 5년 전에는 예수님께 0.000001초도 떠나지 마시라고 기도했었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인지 그냥 ‘곁에 계시겠거니’하고 덤덤하게 생각할 뿐이다.

 

따라오는 엄마와 남편과 동생과 눈인사를 하고 나서 방을 여럿 지나 대기실로 들어간 것 같았다.

간호사가 와서 환자번호와 이름을 확인한 후에 간단히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잠시 후에 마취과 의사 선생님이 와서 또 이름을 확인하고 마취 부작용이나 알러지는 없는지 등을 물었다. 5년 전 마취과 선생님은 눈썹이 짙은 잘 생긴 남자였는데, 이번에는 아쉽게도(ㅎㅎ) 여자 선생님이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눈만 보였는데, ‘눈화장이 잘 되었네.’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5년 전에는 마취과 선생님이 간단한 질문 후에 흡입기를 씌워 재웠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수술장으로 들어갈 때까지 재우지 않았다.

양쪽으로 수술방 번호가 주욱 적힌 방을 여럿 지나서 한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이 넓은 공간이 왜 필요하나 싶게 넓고 깔끔한 방인데, 간호사님들이 여럿 있었다.

 

수술대로 옮겨졌는데, 동글동글한 커다란 등이 천정에 몇 개 있었고 여러 기구가 보였다. 수술대는 이동식 침대보다 훨씬 좁았다. 딱 내 몸통만 올라갈 크기라서 양팔을 둘 데가 없었다. 간호사가 몸 아래에 깔린 넓은 흰 천으로 양 팔을 감싸서 팔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었다. 머리는 아이들 짱구베게 같은 모양으로 실리콘으로 되어 있는 베개 위에 두었다. 간호사가 머리에 비닐 캡을 씌웠다.(수술장 안에서였는지, 대기실에서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간호사들이 또 환자번호를 확인하고 몇 가지 물었다. 내가 “어, 전에는 수술장에 안 들어왔었는데, 그 전에 마취했었는데..”라고 했더니, 간호사가 “왜요? 전에도 수술장에서 마취했을 걸요.”한다. 아마 예전 시스템을 모르는 분인 것 같다. 아님 내 기억이 잘못되었든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다가왔다. 주치의 선생님이다. 잠시 후에~또 한 분이 오셨다. '아이고 반가와라.' 수술 담당하실 이00 교수님이 웃으면서 나를 내려다 보셨다. “5년 만에 재발해서 놀라셨죠? 밖에서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시던데.”라고 하셨다. 나는 약간 웃으면서 “예.”하고 대답했다. 나는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웃는 얼굴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수술이 끝나면 또 비명도 못 지를 만큼 아플 텐데. 에고 지금은 아무 생각도 말자.‘ 

나는 이 교수님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외과 의사 선생님들이 없다면 어쩔 뻔했는가? 요즘 의대생들이 외과를 기피한다는데, 아직은 훌륭하고 사명감 있는 의사선생님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교수님이 정확하게 수술을 하실 수 있도록, 나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들 모두를 수술하실 때도 실수 없이 잘 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수술할 때마다 잘라내야 할 부분과 아닌 부분이 마술처럼 훤히 보일 수 있기를 기도했다. 환자를 따뜻하게 대하고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훌륭한 신앙을 가진 이 교수님을 만난 것에도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앞으로도 계속 이 세상 의사선생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호흡기를 씌우고 숨을 쉬라고 했다. 왼쪽 다리에 주기적으로 작동하는 혈압계가 감겨 있었는데 조일 때마다 너무 아팠다. 호흡기를 쓴 후에 한참 동안 숨을 들이 마시다가 '혈압계 혹시 잘못 감긴 게 아니에요?' 물어볼까 망설였는데, 호흡기 때문에 웅얼웅얼 하는 것으로 들릴까봐서 ‘에라 모르겠다.’하고 숨만 쉬었다. 곧 의식을 잃었다.

 

 

회복실에서 의식이 돌아왔다.

(5년 전에는 너무나 아파서 눈을 뜰 수도 없었고, 회복실 나갈 때까지 “아파요.”소리만 반복했었다. 상담 간호사님의 말로는 그때의 수술은 림프절을 다 들어내고 근육층까지 건드리는 대수술이었다고 한다. 그땐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었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저번보다는 덜 아프다.’였다. 물론 전절제했기 때문에 부분절제한 것보다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프지만, 5년 전에 비하면 분명 덜 아팠다. ‘림프절 생검 결과 이상이 없었나 보다. 림프절을 들어내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회복실에 누워서 나는 연신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만 반복했다.

(흠~~이글에 덧붙일 말이 있네요.9월 21일일에 진료 다녀왔는데, 최종 조직검사 결과 림프절 7개 절제, 전이 있음.입니다.)

 

(수술에서 깨어나서 제일 아팠던 기억은 제왕절개 수술을 하고 나서였다. 팔에 꽂은 마취제가 전혀 듣지 않았다. 나는 아파서 이를 악물고 있었고, 이가 부서질 정도여서 손수건을 이빨 사이에 끼우고 있어야 했었다. 죽는 게 낫겠다 싶었었다. 둘째 때는 마취가 잘 되었는지, 혀가 입안 가득 차게 부었고 온 몸이 퉁퉁 부었을 뿐, 아프지 않아서 말똥말똥한 의식으로 나왔었다. 근데 놀랍게도 나는 제왕절개 후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아무리 통증을 느끼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편차가 너무 큰 것 같다.

5년 전의 수술은 끔찍하게 아팠지만 통증의 강도로 치자면 네 번째쯤 된다. 1위는 큰 아이 제왕절개 수술 후, 2위는 대학 졸업 후에 했던 다른 수술 후 며칠 내내, 3위는 고등학교 때 양 발에 끓는 물을 부어서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처치인데) 소주에 발을 담그고 한 숨도 못자고 끙끙 앓았을 때, 5위는 2년 넘게 허리가 아파서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었던 때 (숨쉬기 힘들만큼 아팠다.) 6위는 젖몸살했을 때(아이 낳는 것보다 아프다는 게 젖몸살이라고 한다.),,..... 어릴 적부터 병력이 화려해서 큰 건만 줄줄이 세도 10가지도 넘는다. 세고 있자면 억울해지니까 여기서 스톱~!!

이번 수술은 통증의 강도로 치자면 7위나 8위쯤 되는 것 같다. )

 

넓은 회복실에 몇 명의 환자들이 수술을 마치고 누워있었고, 수술을 막 마치고 나온 환자 곁에는 간호사들이 여럿 있었다. “일어나지 마세요. 그러다 침대에서 떨어져요.” 등등의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 한 명이 와서 “많이 아프세요?”하고 물었다. “예.”하고 대답했더니, “병실에 가서 진통제 더 맞으세요.”라고 했다

 

한참을 회복실에서 누워 있다가 이송 담당 아저씨가 왔다. 회복실 밖으로 나오자 엄마와 남편과 동생이 침대 곁으로 왔다. 동생은 나를 보고 운다. 나는 속으로 ‘덤덤하게 잘 버티고 있는데 울긴 왜 울어’하고 생각하면서 눈이 마주치면 나도 눈물이 날까봐 동생을 쳐다보지 않았다.

 

병실로 왔다. ‘이동식 침대에서 병실 침대로 어떻게 옮기지? 전에 어떻게 했더라?’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두 사람이 와서 이동식 침대와 병실 침대 높이를 맞추더니 이동식 침대에 깔려있던 시트를 그대로 옆으로 밀어서 간단히 옮겨주었다.

 

5년 전에는 소변줄을 아예 꽂고 나와서 그대로 이틀 넘게 누워만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꽂지 않았다고 한다. 수술시간은 1시간 50분, 마취 30분, 회복실에서 1시간 있었다고 하는데, 수술시간이 길지 않아서 소변줄 꽂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물론 오늘 하루는 꼼짝 않고 누워서 지내라고 했다. 물은 네 시간이 지나서 먹을 수 있다고 했다.

링겔과 림프액통만 달고 있다.

 

힘을 줄 수가 없으니 소변을 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소변줄을 꽂고 뽑아주었다. 자꾸 소변줄을 꽂아야 할까봐 물을 많이 마시면 안되겠다 싶었다.

 

다행히 어깨 근육이 심하게 꼬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깨를 못 움직이니, 근육들이 뭉쳐서인지 등이 아리고 아팠다. 동생이 마사지를 해주었다.

 

  간호사가 “많이 아프세요? 진통제 더 놓을까요?”하고 물었다. ‘5년 전 회복실에서는 “자꾸 아프다고 하니까 진통제 맞고 잠만 주무시잖아요?”하면서 진통제를 더 주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더 맞아도 되나?’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진통제를 더 맞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회복실에서 진통제 맞았다는데, 그 약기운이 떨어져서 참을 수 없으면 맞기로 하고 일단은 참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니요. 안 주셔도 돼요. 더 아프면 그때 말씀 드릴게요.“라고 대답했다.

  내 딴엔 영웅적인 선택이었다. 우하하하~~. 입원하기 전에 어떤 신부님께 “제가 00님과 00님을 위해서 수술 받는 고통을 봉헌하면서 기도할 테니까, 힘내시라고 전해주세요.”하고 큰소리쳤었다. 그분들을 위한 진심어린 각오였고, 오래 전에 하느님께 드렸던 약속이었다.

다행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프지는 않으니까, 그 정도의 아픔쯤은 그분들을 위한 기도로 봉헌해야 될 것 같았다.

  하느님만 아시는 기특한 봉헌을 하고 싶었는데, 그래야 내 공이 될 텐데, 그 바람을 포기하고 이렇게 공개하는 것도 내 딴엔 영웅적인 선택이다. (호호호.)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이 기록을 읽고, 이왕에 견뎌내야 할 고통이라면 ‘선한 의지’를 갖고 자신이 겪는 고통을 ‘사랑의 기도’로 바치는 것이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음을 다시금 생각해보기 바란다.

 

(엉터리 레지나가 조금 확대해서 설명해 보겠다. 엉터리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을 잊으려고 아무 목적도 없이 긴 시간 텔레비전을 본다든지, 술이나 담배에 빠진다든지, 오락을 과하게 한다든지 하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직면한 고통을 받아들이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언제든(임종 전에라도) 그 고통과 다시 마주하게 될 때, 더 큰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자라난 고통이 우리를 덮칠 지도 모른다.

 

  요란하게 고통을 잊으려 애쓰지 않고, 침묵 중에 그 고통을 그대로 느껴보고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고통이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도록 그 고통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긴 그 의미가 도저히 파악이 안 되니까 고통이기는 하겠다. 고통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배운 대로 그 고통의 의미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고통에 의미를 입힌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고통에 우리의 보잘 것 없는 고통을 합치시키기로 마음먹는 일이다. 예수님의 고통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이듯이, 우리도 이왕에 겪는 고통에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기로 마음먹는 일이다.

  우리 힘만으로 우리의 고통에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우린 그저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기로 결심만 하면 된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고통을 사랑으로, 기도로 바꾸어 줄 것이다.

 

  입원하기 전에 내가 아들들에게 부탁한 게 있다. “니들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는 셈치고 나쁜 습관 하나씩 고치면 좋겠다.”라고. 사실 내 맘속으로는 ‘저런 버릇은 고쳐야하는데.’하고 바랐던 게 있어서 한 말이었다. 무엇을 고치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판단해서 엄마를 위해서 작은 습관 하나라도 고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일석이조로 고마운 일일 것이다.

 

  돌아가신 마리아 선생님은 시한부 선고를 받으신 후에 남편과 아들이 담배를 끊어 준 것이 굉장한 에너지를 주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는 <TV동화 행복한 세상>에서 에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송되기도 했다. 큰 사랑이 있다면, 절제하는 것을 넘어서 무언들 못하겠는가.)

 

먹는 물의 양과 소변 양을 수시로 체크하고, 림프액 통에 찬 림프액 양을 날마다 잰다.

시간이 지나서 진통제 기운이 떨어질 때가 되었지 싶은데, 더 아프지는 않았다. 감사할 일이다. 아파서 잠이 쉽게 오지는 않았지만 참을 만했다.

 

“하늘나라의 평화를 얻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선한 의지’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질 수 없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무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 성 알퐁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