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오 16,24-28)
☆☆☆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자주 들어 왔던 말씀입니다. 너무 당연해서 건성으로 넘기던 말씀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는 것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목숨은 ‘목으로 쉬는 숨’입니다. 멈추면 죽습니다. 육체뿐 아니라 ‘영적 생명’도 끝납니다. 그러니 목숨에는 영적 생명도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는 것에 ‘쫓기어’ 영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적으로 성공을 거듭해도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영적 생명을 위해서도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는 억울함입니다. 억울함이 강할수록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려면, 먼저 자신을 치유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누구나 자신을 꾸짖고 자책합니다. 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른 이에게는 다정하고 그들의 잘못에는 너그러운 사람이 자신의 실수에는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남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본래 사형 도구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주동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고통은 길고 과정은 끔찍했기에 무척 위협적이었습니다. 반란자 대부분이 독립군이었기에 구경꾼도 많았습니다. 처형 장소도 따로 있었습니다. 사형이 확정되면 죄수들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말로 ‘골골타’입니다. 번역하면 ‘해골 터’이지요(마르 15,22 참조).
신약 성경이 그리스 말로 기록되면서 ‘골골타’는 ‘골고타’로 번역됩니다.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입니다. 라틴 말로는 ‘갈바리아’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곳에는 커다란 성당이 세워져 있는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작은 형제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는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한 십자가가 희생과 봉사의 상징으로 바뀐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오늘 복음 말씀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삶에 ‘아픔을 주는 고통’입니다. 자신의 성격일 수도 있고 직업일 수도 있습니다. 건강이나 가족 관계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없애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기도해야 합니다.
불가에서는 생로병사 모두가 ‘고’(苦)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고통이 많이 따릅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십자가보다 자신의 것이 더 크고 무겁게 여겨집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듯, 다른 사람의 십자가는 작고 가벼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각자가 질 수 있는 크기의 십자가를 주신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께서도 친히 십자가를 지셨듯이,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 고통의 십자가는 인간에게 주어질 영광을 위한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주님을 따릅시다.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반영억신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 맞추고 합리화 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행한 대로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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