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4일 목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오 16,13-23)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1786년 프랑스 리옹 근교 농가에서 태어났다. 1815년 사제품을 받고 작은 시골 마을 아르스의 본당 신부가 되었다. 그는 겸손하고 충실한 목자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줌으로써 그에 대한 소문은 프랑스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평생 동안 아르스에서 겸손하고 가난하게 사랑의 삶을 살다가 1859년 일흔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오 11세 교황은 1925년 그를 성인 반열에 올리고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베드로의 짧은 신앙 고백 하나로 그를 칭찬하시며,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베드로의 어깨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특별히 타인들과 맺는 관계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증언하기는 하고 있습니까? 혹 타인들 앞에서 신앙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십자 성호도 제대로 그을 줄 모르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 위에 당신의 나라를 일구어 가십니다. 주님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데에는 어떤 조건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향한 신앙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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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답변에 스승은 반응이 없습니다. 세상의 판단보다 제자들의 생각이 더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의 고백은 순간적인 재치가 아니라 평생을 섬기겠다는 맹세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행복하다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을 재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세주이십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세상이란 말에 있습니다. 어떤 세상이겠습니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 전체이겠습니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먼저 나와 연관된 세상을 기억합시다. 내가 살고 있고 책임질 사람이 있으며, 내 미래가 있는 세상입니다.
바로 그 세상을 예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세주라는 고백은 그 자체가 신앙 행위입니다. 이를 누구나 입술로는 고백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의 승복인데, 그분을 느끼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앞서, 그분께서 내 인생에 행하신 일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야 답변이 쉬워집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베드로의 이 고백을 믿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망설여질 때 이 고백을 먼저 떠올립시다. 그러면 주님의 이끄심을 느낄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나
-반영억라파엘신부-
비안네 신부님은 당시 프랑스 혁명으로 정상적인 초등교육을 받지 못했고 대신학교에서도 학과 성적이 모자라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지도교수 아베발레 신부님의 지속적인 도움으로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지도에 뛰어 났는데 특히 훌륭한 강론과 고해신부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연2만여 명이 그에게 고해성사를 받았고 하루18시간이나 고해성사를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공부도 못하고 그야말로 바보였는데 그 어떤 훌륭한 신부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존경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두려워해도 사람들은 신부님을 존경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오늘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였지만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생각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상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꾸지람을 듣는 것은 당연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원의를 내새우려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어 가려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 맞는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데 쓰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여 이러쿵 저러쿵 흉을 보거나 잘못을 들추어내어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삼아 하십니다. 부족함과 허물이 많은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내 원의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원의를 찾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잠깐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삶의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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