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반영억 신부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고통은 살아 있는 기도

김레지나 2011. 7. 29. 18:57

2011 7 25일 월요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20,20-28)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요한 사도의 형이다. 형제는 부친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주님의 제자로 선택되었다. 또한 두 사도는 기적의 자리에 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42년경 예루살렘에서 참수된 야고보 사도는 사도로서는 첫 번째 순교자이다(사도 12,1-2 참조).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구별하여 ‘대 야고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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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는 엄청난 힘을 지닌 보물이 있다. 그것은 우리 몸이 흙으로 된 나약한 육신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지님으로써 그분의 생명을 드러내기 때문이다(1독서). 모든 민족들의 통치자들과 고관들은 세도를 부리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세상의 통치는 힘과 권력이지만 하느님의 통치는 섬김과 사랑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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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스승님의 질문입니다. 스승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청원에 이렇게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 잔이 무엇인지요? 그 잔을 마시면 자연스레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되는 것인지요? ‘그 잔은 고통의 잔입니다. 아픔의 잔이요 절제의 잔입니다. 자신을 포기하게 하는 잔입니다.
두 제자의 청원을 알게 되자 다른 제자들은 언짢아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나누지 않고 독식하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두 사도가 일부러 그러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순수하게 스승님 곁에 있고 싶다는 발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섭섭하게 할 수 있는 처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타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통 없이는 섬길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 어떻게 다른 이를 받들 수 있을는지요?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모시기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이를 공경하고 섬기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보다 악한 사람인데도 낮추고 받들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 때문에섬기고 낮추고 받들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고통은 살아 있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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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는 도토리나무입니다. 야산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에게 이롭고도 흔한 것에는 ‘참’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참새는 흔하고 쉽게 잡을 수 있는 새입니다. 참꽃은 진달래로 약용입니다. 그러나 철쭉은 먹지 못했기에 개꽃이라 하였습니다.
참나무도 도토리 크기에 따라 구분됩니다.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입니다. 물론 하나같이 ‘도토리’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갈참나무는 그 나뭇잎을 짚신 위에 깔고 다녔기에 생긴 이름입니다. 떡갈나무는 잎으로 떡을 싸서 떡이 붙거나 쉬지 못하게 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가장 흔한 것은 상수리나무이지요. 임진왜란 때 도망가던 선조는 도토리묵을 먹습니다. 그는 난이 끝나고 궁중에 돌아와서도 자주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금의 수라상에 자주 올랐다고 하여 상수리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하면 고마운 줄 모릅니다. 늘 그렇게 있는 줄 착각합니다. 우리는 묵묵히 일하는 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줄어들면 조직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봉사자의 대열에 합류해야 합니다. 섬김의 생활을 실천해야 주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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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두 제자와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기적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새 세상이 오면 자신의 두 아들을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단순 소박한 시골 어머니의 청원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하시며 반문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 모습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세상 종말이 곧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새 세상의 주인이 되고 자기들은 그분 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줄로 믿었습니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런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 제자들은 이러한 환상을 접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부활과 성령 강림을 체험한 뒤 그는 온전히 바뀌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 임금에게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스승의 예언을 떠올리며 예루살렘에서 참수의 칼을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 와서 후회 합니다

  -반영억신부-

칠순이 되신 할머니께서 남편을 존경하지 못한 마음을 고백하셨습니다. 남편이 남편을 존경할 줄 알아라. 하면 존경 받을 행동을 하면 존경하지 말래도 존경한다.고 대꾸하였답니다. 나와 다른 남편을 존경은 못해도 존중은 해주어야 했는데 사사건건 말대꾸를 하며 남편을 이기려고 했던 마음이 지금은 제일 후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 진작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고 남편을 잃고서야 후회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할머니의 눈이 촉촉하였습니다.

 

존경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범을 통한 표양이 될 때 다른 사람이 높여주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충실하게 살면 존경과 사랑은 자연스럽게 따라 옵니다. 물론 세상의 존경은 권위에서 오기 보다는 권력에서 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 받는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시대에도 치맛바람이 있었나봅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을 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열 제자들도 화가 나있었던 것을 보면 시기질투의 마음과 더불어 그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의 잇속을 차지하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 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스승께서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간다고 서운해 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내려감으로써 주님을 본받게 되고 영혼들을 사랑하기 위해 주님께서 택한 방법을 우리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호도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합시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