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7일 연중 제19주일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하고 비명을 질렀다..
(마태오 14,22-33)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난다. 그분께서는 강한 바람 가운데에도 지진 가운데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현존하셨다. 주님께서는 바알과 같은 우상처럼 파괴적인 모습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럽게 현존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선택과 함께 약속까지 받은 백성이지만, 그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제2독서).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 속에서 시달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주님이심을 보여 주신다(복음).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건설된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도 장엄하고 견고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교량이 건설될 때부터 숱한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
교량의 높이가 워낙 높고 그 밑으로 지나가는 검푸른 바다 물결이 험난하여 공사 중에 인부가 실족하여 추락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리고 그 높은 공사현장에서 떨어져서 생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시공자 측에서 내놓은 궁여지책이 건설 중인 다리의 난간 아래로 그물을 쳐 놓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물을 쳐 놓자 실족하거나 추락하는 일이 대폭으로 감소하고 더 이상 같은 재해가 재발되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엉성한 그물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실제로 인부들의 생명을 구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믿어야 하고 반드시 믿는 데가 있어야 한다. 사람은 그렇게 믿고 살아가도록 설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믿을 데가 없거나 믿는 것이 없는 사람은 매사가 불안하고 두렵다. 지속되는 불안과 두려움은 끝내 인간을 절망과 좌절의 나락으로 밀어낸다. 계속되는 경제 불황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지거나 말없이 집을 나가 목을 매는 일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철석같이 믿던 것을 하루 아침에 잃었거나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때문이다. 믿되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도 중차대한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대상과 그 번지수를 잘못 찾아가고 있다. 실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한 때 잘 나가던 베드로 사도가 물속 깊은 심연으로 빠져 들어간 것은 거센 바람과 물결에 그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고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기의 힘이나 재물을 믿는 사람 또한 자신이 믿던 밧줄이 썩어 끊어지는 날, 검고 푸른 죽음의 심연으로 추락할 것이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반영억 신부-
우리는 누구나 본능적인 종교심을 가지고 있고, 성장하면서 이성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는 의지적으로 믿게 됩니다. 이 시간 믿음에 관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영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
한 스님께서 돌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하자 ‘아이구, 하느님!’하셨답니다. 누구든지 급할 때에는 ‘하느님 맙소사!,‘아이구 하느님’을 찾게 되고 봉변을 당 할 때에는 ‘하늘이 노할 일이다’, 하늘 무서운 줄 알아라, ‘하늘만은 아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큰 힘을 가진 어떤 것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종교심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에 이르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종교심을 승화시켜 신앙심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그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정하권).
신앙심은 인간을 찾으시며 은총과 계시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부르시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자세를 일컫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부르셨기에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신앙’(믿음)입니다(차동엽).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2디모1,9).
그러나 믿음은 아무래도 ‘머리’로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수긍하고 받아들여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6).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 사랑, 예수께서 주시는 용서와 평화 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의 모범으로 아브라함을 보면 되겠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히브11,17).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도록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고 이 땅에 살며 신의를 지켜라.”(시편37,3).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14,1).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야고1,6).
그리고 마침내 의지로 믿어야 합니다. 세상의 셈법을 따르지 않고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철석같이 믿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 신앙 안에 키워온 어떠한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11,23-24).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야고2,22).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마태17,20). 결국 하느님의 약속을 확고히 믿고, 이미 받은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께서는 맞바람을 만나 파도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가셔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오너라.’ 하십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예수께로 걸어갔습니다.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고 청한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이었습니다.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마태14,30).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결국은 주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의지가 약했습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 해도 그 속에 주님이 계시거늘 그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생기면 믿음이 흔들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항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 하였습니다.(로마4,20-21).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내 사업이 잘 된다면, 내가 행복해 진다면, 건강이 좋아진다면, 성공한다면’, 그 때 하느님을 믿고 감사드리고 헌금도 많이 하겠다고 합니다. 소위 ‘……한다면’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악한 사람이 선한 이들보다 잘 사는 듯이 보여도, 착하게 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랑하는 이가 고통 안에 있어도 나는 그 순간에도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신뢰할 것입니다.’하면서‘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한마디로 전천후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했듯이 어떤 처지에서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변화무쌍하고 덧없는 세월에도 상관없이 소신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필리4,11-12)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믿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적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26절에 보면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7장 21절에서도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며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위기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급히 달려오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굳건해 지시길 바랍니다. 어떤 불이익이나 비난이 거센 바람과 성난 물결로 밀려오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으시길 빕니다.
마음의 시험과 환경의 풍파가 다가와도 끄떡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만큼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깊지 못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면 그가 은총을 간수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은 생각 않고 은총의 결과물에만 매달리게 되고 결국 타락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은총을 주실 때 시련을 통해서 주십니다. 시련의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3-4). 그러므로 더 많은 시련과 단련을 통해서 그만한 은총을 준비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도 실패를 통해서 더 큰 제자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25년동안 수많은 시련과 환난 속에 단련을 받았고, 야곱도 20여년간 머슴살이를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요셉도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충실한 사람었으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13년 동안 종으로 팔려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하느님을 거역하지 않고 인내를 통하여 그의 영적 믿음을 성장시켰고 마침내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는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은총은 시련을 통해서 다가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닥친 세찬 바람이 은총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볼 때 어떻게 되는지를 그는 확실히 체험했습니다. 믿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인생항로에서도 역풍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을 통해서, 아내를 통해서 오기도 하고, 자식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공동체를 통해서도 이웃을 통해서도 옵니다. 물론 직장을 통해서도 오고, 주변 환경과 생활을 통해서도 견딜 수 없는 큰 아픔이 옵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요, 더 큰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순간 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시니 말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에는 의심이 암이래요, 항암제는 오직 믿음뿐이고요. 그러니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로지 주님 뿐,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
그러므로 사람을 믿어서 발등 찍히지 말고 오로지 주님을 믿으십시오.
사랑합니다.
할수있다하신주
'강론 말씀 (가나다순) > 반영억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0) | 2011.08.14 |
---|---|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0) | 2011.08.12 |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 (0) | 2011.08.0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0) | 2011.08.05 |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비안네 사제 기념일 (0) | 2011.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