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가르멜의 산길> 중에서 + 레지나의 수다

김레지나 2011. 1. 14. 19:02

2006년 겨울에 옮겼던 글입니다.

컴이 자주 망가지는 바람에 잃어버린 줄 았았었는데,

2011년 1월에 자궁 조직검사를 세번째로 하면서

첫번째로 할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서

옛 메일을 뒤지다가  다시 찾은 글입니다. 

 

보라색으로 적힌 글은 

자궁내막암의 의심스럽다고 조직검사를 한 후에 검사 결과를 보러 가기 전에

아는 분께 재잘댄 수다입니다.

공개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이야기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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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님!

- 긴~앞부분 생략-

 

월요일에 서울 올라가면서 그런 기억들을 죄다 되새기면서 갔어요.

그 옛날 일들을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주관하셨으리라고 생각했지요.

잠시 책도 읽었어요.

사실은 제가 그런 책 읽는 것도 건방진 일인 것 같아서 말씀 안 드리려고 했었는데,,

<가르멜의 산길>을 갖고 갔었어요.

관상기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서요.

최민순 신부님 머리말 읽다가 가슴에 사무치는 말 때문에 울었어요.

 

(성 아우구스티노)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우심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함께 아니 있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고백록 제 10권 제 27장)

 

 

병원에 갔어요.

1월에 찍었던 PET 검사에서 유방 뿐만 아니라 자궁에도 이상이 있다고 나왔었는데,

자궁 사진은 부정확하다면서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해보자고 하더라구요.

저는 검사해서 이상이 있으면 동시에 수술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의사선생님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었어요.

 

 초음파를 했는데 자궁내막이 전보다 두꺼워졌다고,

타목시펜 부작용일수도 있고, 원래부터 암이 있어서 증식했을 수도 있다고 조직검사를 하자고 하더군요.

 지금 먹고 있는 항암제 부작용에 자궁내막암도 있거든요.

 그날 조직검사를 하고 가겠다고 하니 많이 기다려야한다고 하더군요.

 

예수님께서 “다시는 너를 아프게 하지 않으리라”라고 하셨던 기억이 났는데,,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니 예수님도 당신 말씀을 번복하실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지요.

 제가 요즘에는 고통을 피하려하지 않고 겁 없은 기도를 진심으로 하거든요.

“00 대신에 제가 더 아프겠습니다.” 는 식이지요.

그런데  00님이 지금 하느님 뜻에 맞지 않게 고집을 피우셔서

제가 더 희생해야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ㅋㅋㅋㅋㅋ (죄송!)

 

그리고 사람들이 제가 또 자궁내막암에 걸렸다고 하면 많이들 비웃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러겠지요

“네가 정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면 너나 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라구요.

그 생각을 하니까 끔찍하더군요..

 

 

 심난해져서 병원 지하 성당에 성체조배 하러 갔는데

 예수님 상을 보자마자,

“예수님도 게쎄마니에서 그러셨군요. 지금 제 심정이셨지요?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예수님,,, 저도 고통을 기쁘게 받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일찍, 그것도 다른 암을 선고 받아야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당신 뜻에 좋다면 그렇게 하지요.

제가 보속을 해야한다면 그렇게 하지요.

아니면 제 죄 때문에 당신께서 저를 벌주시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건방지거나 주제 넘게 굴어서 화가 나셨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하지만 수술보다는 또 항암치료하는 것은 무서워요.

그럴 바엔 그냥 빨리 저를 데려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들들은 하느님께서 저보다 더 잘 돌봐 주실 거지요? 걱정 안 돼요. 당신 뜻대로 하세요.”

하고 기도했어요.

 

4시 반쯤엔가,, 조직검사하자고 연락이 왔더군요..

간호사가 "조직검사하다 자궁천공이 생겨서 수술하게 될 수도 있다. 출혈이 계속되면 응급실로 와라, 항생제와 진통제 등등을 5일간 먹어라. 한달간 통목욕하지 마라. 등등, 설명 들었다고 사인해라."고 했어요.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수술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어요.

 반쯤 자는 것처럼 마취를 하고, 부분마취를 하는데,, 얼마나 무섭고 아팠는지 몰라요.

아픈 게 꽤 오래 되었는데 10분은 지났는데 아직 시작도 안했다고 하더군요.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서 운 건 아니었어요.

00님!

정말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00님을 고통 당하게 밀어 넣고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저 수술대에 누워있는데, 예수님이 딱 제 위에서 저를 보고 계신 거예요.

눈으로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의심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어요.

유방암 수술하기 전에도 예수님을 느낀 적이 있었지요.

그 때도 제가 물었었잖아요.

"예수님, 보시니까 좋으세요? 고통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하구요.

예수님께서 멀리 계시는 게 더 나은데 가까이 계시니까 더 서럽더라구요.

얼마나 야속한지, 몇 배나 더 서러웠어요.

그날도 수술대 위에서 끔찍한 고생을 하고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그런 고통 안 겪게 해주실 수도 있는 능력있는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닮았구나”하고 보고만 계신다는 게,,

그게 너무 서러운 거예요.

 

“예수님. 제가 당신 덕분에 충분히 강해지기는 했지만

참고 이겨내고 고통을 봉헌하겠지만

연인한테 받는 상처와 비슷한 상처를 받아요.

이제는 예수님한테 장난도 안 치고, 까불지도 않을 거예요.

이제 무서워졌어요.

제가 고통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자마자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주시고,

게다가, 저 힘들어하는 거 빤히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저는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충분히 힘들었어요.

하지만 또 참을께요.

이번 고통도 00님을 위해서 봉헌할 거예요.

제가 버릇없이 조른다고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제가 귀찮게 한다고 노여워하지도 마세요.

제가 고통을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어요.

제가 가진 기특한 생각들은 모두 성령께서 불어넣어주신 것이라는 것을요.

제가 온전히 제 몫으로 가진 것이라고는 제 죄와 고통 밖에 없으니,,,

고통을 원하시면 가져가세요. 근데 자꾸 서러워요. 저 운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조직검사 받으면서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간호사들이 자꾸 묻더군요.

많이 아프냐고.. 원래 그렇게 힘든 검사라고,,,

저는 혀가 굳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하마터면 보고 계신 예수님 때문에 운다고 말할 뻔 했어요.

간호사들이 미쳤다고 할 게 분명해서 겨우 참았어요.

제가 아니라는 대답도 못하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니까

간호사님이 아파서 그러는 줄 알고

마취만 여러 번 더 했어요. 

 

지금까지 겪어 온 고통들을 생각하니 서러웠던 거예요.

그 고통들을 다 주신 분이 예수님이셨을 거 아니예요.

매 순간 허락하지 않으신 일이 저한테 일어났을 리가 없잖아요. 제 죄 빼고는....

 

 회복실에서 한 시간 누워서 자라고 하는데,,

정신이 몽롱한데도 어찌나 서럽던지 한 시간 내내 울었어요.

비틀 비틀 걸어서 회복실을 나와서 병원 복도에서 다시 한 시간 앉아 있었는데도 마취가 깨지를 않더군요.

수납하고, 약 받고, 택시 타고 동생 집에 갔어요.

아무도 없으니까 저 혼자 밖에서 밥을 사먹고 들어갔어요.

택시 안에서는 재수없다고 할까봐서 못 울고,

밥 사먹으면서 혼자 울고, 동생 집에 가서 한참을 더 울었어요.

저 혼자 병원에 간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몰라요.

 

10시쯤 되었는데도 혀가 굳어서 발음이 제대로 안 되었어요.

00씨가 전화했더군요.

겨우 힘을 내서 한참을 깔깔대고 이야기 했는데...

00씨 말로는 천사가 제일 부러워하는 것이 인간들이 성체 모시는 것하고, 고통을 당하는 거라네요..

처음 듣는 소리였어요.

자기는 애를 갖고 싶어서 시험관 시술을 두 번 했는데 실패했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속으로 그랬어요.

'00씨,, 애 없는 게 나아요. 맘대로 죽지도 못하잖아요. 애 없는 게 나아요. 그게 얼마나 괴로운 건데.'

제가 전화 끊고 제 수호천사한테 그랬어요.

“모르는 소리 하지도 마세요. 다른 천사들한테도 광고 좀 해주세요. 부러워할 걸 부러워하라고, 고통이 뭐가 부럽다고, 참,, 답답하네..”

 

화요일에는 병원 가서 다시 소독하고 내려왔어요.

 

수요일에는 미사 가고 레지오 갔어요.

너무 피곤해서 안 가려다가,, 그냥 참고 갔어요.

제가 팔이 당겨서 쭉 펴기가 힘든데,,

그런다고 했더니만 올 봄에 유방암으로 딸을 잃은 어머님이 딸 생각이 났는지

묵주기도하는 중에 내내 우셔서 저도 울컥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그 분은 저 보는 것이 고통일 거예요.

제가 늘 웃고 밝아서 예쁘다고 자꾸 이야기하셔요.

 

연총 친목회 할 때 수화 하자고 해서 연습하고, 왕 언니 자매님이 밥 사주신다고 해서 밥 먹고,,

딸 잃은 분이 저한테 음식 조심 안하고, 너무 건강에 신경 안 쓴다면서 <자만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다들 저한테 그렇게 놀리겠지요?

레지오에서는 웃고 농담하고

"또 수술해야될 것 같기도 해요. 하는 수 없지요.. 헤헤헤“했어요.

 

 

집에 돌아와서 다시 생각하니 웃을 일이 아닌 거예요.

수술하고 꾹 참고, 고통 봉헌하고 기쁘게 지내는 것으로 마무리될 일이 아니겠구나 싶었지요.

자궁내막암으로 수술을 또 해야하면 인생이 정말로 완전히 바뀌겠구나...

복직은 꿈도 못 꿀 것이고,

하느님 말씀도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 늘 의심해야 할 거고, 응석 부리지도 못하겠구나.

비웃음 사게 될 일을 겪게될까봐 하느님 전하는 기쁨도 못 가질지도 모르겠구나.

 

“예수님 저는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늘 제가 꿈꾸던 것은 애들 대학 갈 때까지 제가 건강한 것이었던 거 아시지요?

그 때까지만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과한 욕심도 아닌데,,

잠시라도 건강하게 남들처럼 살아보는 게 제 소원이었는데...

정말 저를 벌주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장난 안 칠 거예요.

많이 슬퍼요.

어제까지는 잘 버텼는데.. 고통 봉헌할 기회가 기쁘기까지 했는데...

금방 변했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이제는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도 못하겠어요.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위로해주셔도 정말로 기뻐해도 되는 건지 자신할 수도 없을 것 아닌가요?

지금 제가 우는 것도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고, 웃는대도 옳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다 자신 없어요.

제 생각이고, 감정이고, 뭐가 제대로 된 건지 모르겠어요.

기도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 주시는대로 받을께요.

기도 안 할 거예요. 모르겠어요. 하나도 모르겠어요.”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자궁내막암과 유방암은 짝꿍이군요.

원래 건강검진에서 이상이 있었는데 종합병원이 분화되어 있어서.. 신경을 안 썼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 생각에는 자궁내막암일 확률이 90%예요. PET 촬영결과에서도 약간 의심스러웠다고 했던 것 같거든요.

수술하면 난소, 나팔관, 림프절까지 다 들어내기 쉬운 모양이던데....

뭐,, 또 하반신이 림프절이 없어서 잘 붓는대나 뭐래나..

자료 읽으니까 더 심난해지더군요.

 

 

저도 언젠가는 기어이 전이가 되어서

강마리아씨처럼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서 몇 달 있다가 피골이 상접해서 해골같은 모습으로 죽게 되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또 무섭고 서러웠어요.

 

 

 애들이 있는데 옆 소파에 누워서 몰래 몰래 울었어요.

“내가 아프고 나서 일년간 애들한테 너무 소홀했구나. 내 몸을 더 돌봤어야 하는 건데..

너무 무리했구나. 애들한테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하느님 일 한다고 미루었구나.

대학원 논문도 괜히 썼구나. 그 시간만 애들한테 썼어도 좋았는데.. 예수님은 그런 거나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시지,, 맨날 다 안다고만 하시고,,그래서 어쩐다고...”

 

 

그러고 나서 집 정리를 마저 했어요.

 오랫동안 못 할까 봐서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저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기쁘게 지내야지요..

가끔 서럽기는 한데,,,,전처럼 참을 수 없이 괴롭지 않아요.

이제는 예수님께서 저한테 가르쳐주실 것을 다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앞으로는 전처럼 친절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저 혼자 이겨내라고 하실 거예요.

이제 조르지도 않을 거예요. 저는 받을 것 다 받았기 때문에,, 갚을 일만 남았거든요.

 

수술을 또 받게 되면 누구를 위해서 봉헌할까 생각 중이예요.

00, 00, 00,,

하지만 이번에는 하느님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할 거예요.

제가 정하는 것도 자신 없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죄와 고통만 온전히 제 것이예요. 그러니까 제일 값진 거겠지요.

뜻대로 하라고 하세요. 원망 안해요.

지금까지 과분하게 저한테 너무 많은 것을 베풀어주셨거든요.

고통을 열망하는 마음도 확실히 있어요. 참 이상한 일이예요.

저는 영영 정상적인 사고를 못 하게 될 거예요. 확실히 비정상이예요.

아무한테도 말 못해요. 미쳤다고 할 테니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가르멜의 산길>을 중간부분부터 펼쳐서 한 오십 페이지 정도 읽었어요.

제가 하느님께 꼼짝을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늘 답을 주시거든요.

제가 어떤 과정을 겪고 나면 꼭 책에서 확인하도록 해 주세요.

지금까지는 다 정리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만사를 제치고 한 번 옮겨봤어요.

책 읽고 무지 기뻤어요..

그리고 전날 제가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부끄러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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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시현과 말씀이 참될지라도, 우리가 그릇 알 수 있음을 밝히고 증명함, 성서의 권위로 증명함

 

 

 

제 202장

하느님의 말씀과 말씀하시는 일들이 항상 진실 되면서도 그 원인에 있어서는 확실성이 항상 있지 않음을, 성서의 권위로 증명함

 

2. 니느웨에서 일어났던 일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으니 하느님께서 그 때 말씀하시기를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하셨다.

그러나 그 사실은 실현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뉘우쳐서 위협의 원인이던 죄악이 그친 까닭이다.

뉘우치지 않았던들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또 열황기 상권을 보면 아합왕이 큰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부 엘리야를 보내셔서 ....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저한테 "그동안 고생 많았다. 내가 너를 다시는 아프게하지 않으리라."라고 하셨어도,,

제가 고통을 견딜만큼 성숙했다 싶으면 그 말씀을 무효로 하고 고통을 더 주실 수도 있다는 거지요.

하느님의 약속도 바뀔 수 있다는 거지요. )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바람직한 결론을 얻을 수 있으니, 하느님께서 어느 누구에게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그 영혼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관한 무엇을 분명히 말씀하셨든지 아니면 보여주셨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그 ‘무엇’의 꼬투리가 달라짐에 따라서, 혹은 더 혹은 덜 변할 수가 있고 심하면 아주 싹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라던 대로 그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음은 물론, 대개는 그 까닭을 알 수조차 없고, 아시는 분은 다만 하느님이실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사정을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약속하시지만 그 때 당장에 사람들이 깨치거나 이를 얻으라 하심이 아니요, 뒤에 가서 빛을 가지게 되고 결과를 바랄 수 있을 무렵에 깨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에게도 이같이 하셨으니, 당신은 많은 비유과 교훈을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이 선교할 때가 이르기까지는 그 깊은 뜻을 깨치지 못하였다....

 

 

 

6.........

예레미야가 다음의 말을 하기에 이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습니다. 서로 때려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고 하여도...”(예레 20,7-9)

 저 거룩한 예언자는 하느님의 길과 속셈을 참지 못하는 나약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체념을 가지고 이같이 말했지만 어떻든 하느님 말씀의 성취와 그 말이 지닌 일반 의미가 서로 다름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거짓말쟁이로 몰리고 이 예언 때문에 그들은 갖은 고욕을 치러야 했으니, 예레미야는 다른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언과 통회가 우리에게는 무서움과 덫이 되었나이다.”(애가 3,47)

 

 

 

 7.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셨을 때 요나가 왜 도망을 쳤는가 하면, 하느님의 말씀도 사람들이 알아듣기 나름이라는 것과 그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가 변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비웃을까 두려워 예언을 하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이렇게 읍을 떠나 기다리기를 무릇 사십 일, 자기의 예언이 들어맞는가를 지켜보다가 드디어 성취되지 않음을 보자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하느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야훼님, 제가 집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르싯으로 도망치려 했던 것입니다.”(요나 4,2)

이리하여 성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목숨을 끊어주시기를 빌었던 것이다.

 

 

 

( 요나 이야기 너무 재미있지요?

저는 요나가 이해가 안 되었었거든요.. 이번에야 이해가 되었어요..

요나가 화낸 이유가 하느님의 예언이 빗나가서 사람들한테 비웃음을 살까봐서였군요.

저는 그 마음 이해가 가요.

사람들은 지금 제 꼴을 보면 또 비웃을 거예요. '어쩐지 까불더라니' 하구요.... ㅋㅋㅋㅋ..

저도 요나처럼 하느님께 화내볼까요?

그러다가 더 얻어 맞을까 봐서 안 할래요. 무조건 감사.. 진심임...)

 

 

 

8.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영혼들에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일들이 간혹 사람들 생각과 엉뚱하게 되어간다 한들 무엇이 이상할 게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어느 영혼에게 그 자신이나 남에 관한 좋은 일 궂은 일을 말씀하시고 보여주신다 하자, 그런 일들이 그 자신이나 남이 하느님께 가지는 어느 정감 봉사 아니면 무례에 바탕을 두었다 하자, 이 경우 사정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일은 실현되겠지만 사정이 늘 같으리라는 확증이 없는 만큼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확실성도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오직 믿음뿐인 것이다.

 

 

 

 

제 21장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청원하는 바를 더러 들어주시어도 그런 일을 즐기시지 않음을 밝힘, 당신이 비록 너그러이 응낙하시어도 분노하시는 때가 많음을 들어서 말함

 

 

 

1......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자연의 한계를 넘어섬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하느님께서는 합리적인 자연의 한계를 정해 놓으신 만큼 이를 벗어나려 함은 곧 옳지 못함이요 무엇을 초자연의 길로 살펴보고 얻으려 함은 자연의 한계를 벗어나려 함이다....

 

2. 정녕코 하느님께서 즐기시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이따금 응하시는가?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 법하다.

 우선 나는 때때로 악마가 응한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응하시는 경우라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니, 혹은 저 길로 가고 싶어 하는 영혼이 너무 약해서 행여 슬퍼한 나머지 뒷걸음질칠세라, 혹은 하느님의 노여움을 산 줄로 여겨 지나치게 괴로워할세라 가엾게 보시기 때문이건, 아니면 그 영혼의 나약함에 바탕을 둔, 하느님만이 아시는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 하느님께서는 응낙하시는 편이 나음을 엿보시고는 저 길을 통하여 들어주시는 것이다.

 약하고 여린 많은 영혼들이 하느님과 사귈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매우 흐뭇한 감각의 맛을 느끼게 해주시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 이런 길로 사귀심이 즐겁고 좋아서 하심이 아니니,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나름대로 베푸신다는 것을 벌써 말한 바 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샘과 같으셔서 사람은 저마다 제 그릇대로 그 물을 푸기 마련인데 때로는 이상한 대롱으로 물을 퍼내게도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 당신이 아닌 그런 것으로 물을 퍼냄은 옳지 못하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그리고 원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뜻에 구애됨이 없이 주실 수 있으시다.

거듭 말하거니와 어느 선량하고 단순한 영혼들이 행여 슬퍼할세라, 그들의 청원을 차마 버리지 못하시는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대서 그것이 좋아서 하시는 일은 아니다...

 

 

 

( 제가 오래 전에 정리한 글과 같은 내용이지요?

환시를 보고,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어쩌면 마음이 약하고 덜 훌륭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얼르느라고 그러신다고...

은사 자체는 절대로 상이 아니라고,, 공도 아니고,,)

 

 

 

3.............(1사무 8,7)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어느 영혼들에게 응낙하시는 수가 있으니 그들에게 베푸시는 것이 비록 최상의 것은 아닐망정 그 길밖에 모르고 그리로만 가겠다 하는 영혼들이라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어떤 영혼들은 영성과 감성의 부드러운 맛을 가지게 되는데 하느님께서 이를 주심은 그들이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같은 그 단단하고 딱딱한 음실을 먹을 만한 사람이 못되기 때문이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다른 무엇에 손을 내밀기보다 이 십자가에 맛을 들였으면 하고 원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말이예요.. ㅋㅋㅋ.. '십자가'.

예수님이 저한테 주신 답장에

“아가야 너는 앞으로 길이 훤하다. 많은 길이 있지만 내게로 오는 길은 정해져 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발자국들이 없고 가시덩굴로 거친 좁은 길이 바로 그 길이다. 넓고 편한 길은 가다가 끊어지지만 거칠고 힘든 그 길은 갈수록 편하다. 내가 너를 그 길로 인도하고 있다.”

 동생이 전에 그 답장 읽고 그러더군요.

“언니야,, 어쩔래.. 무섭다..”. 

 00님도 지금 고집하는 길을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겠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

 

 

 

4. 영스러운 맛을 감각으로 누리려 하기 보다 초자연스런 길로 무엇을 알고 싶어하기가 훨씬 더 나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치도 않은 이런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지고 아무리 완덕의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는 적어도 소죄를 면할 수 없으리니, 그 사람뿐 아니라 이를 시키는 사람이나 찬성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다스리기에 충분한 자연 이성과 복음의 법칙 및 진리가 있으므로 그런 따위가 필요치 않고, 한편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영혼을 이롭게 하는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고 구제하지 못할 만큼 그러한 아쉬움과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성과 복음의 진리를 잘 이용해야 되니 우리가 바라든 안 바라든 어떤 일이 초자연스럽게 알려질 때 그것이 자연 이성과 복음의 진리에 들어맞는지를 보아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고 받아들일 때에도 그것이 계시인 까닭이 아니라 이치에 맞는 까닭에 받아들일 것이요, 계시로서의 의의는 완전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도 마치 계시가 없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저 이성을 깊이 살피고 알아 보아야 하니, 악마는 흔히 미래의 일, 이치에 맞는 일들을 그럴싸하게 지껄여서 사람을 속이려 들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말씀이지요?

악마가 하느님처럼 속삭일 수 있다니까... 늘 말씀 듣고 예언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무섭겠어요.

겸손하지 않으면 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겠지요. 너무 어려워요. 정말 어려워요.

저도 앞으로는 저를 위로해 주세요. 하고 성경 펼치는 일도 안해야겠어요.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묻지 말라는....주는 것만 받고, 주시더라도 의미를 갖지 말라니...)

 

 

 

11. 악마는 또 베드로라는 사람이 제대로 산다면 아무 해까지 밖에 못 가리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미리 말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일들을 가지고 거짓을 꾸며내기 때문에 일체 초자연스런 계시와 시현과 언어 등을 피하지 않으면 그런 속임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런 따위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분노로 대하심이 정말 옳으니 위험과 자부심과 호기심, 그리고 교만의 가지와 허영심의 뿌리 및 바탕이며 하느님 일을 가벼이 봄, 많은 사람이 빠져든 숱한 악의 요인에 함부로 뛰어드는 것을 환히 보시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분통터지게 하던지 당신은 그들이 속아 그릇되어가고 그 영이 어두워져 생명의 옳은 길 대신 허영과 꼭두를 따라도 그냥 버려두신다.

 이사야가 “야훼께서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셨다”(이사 19,14)함은 이를 가리킴인데 쉬운 말로 하자면 반대로 알아듣는 정신이다. 이것은 이사야가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평이하게 대변하는 말이니, 그는 미래의 일을 초자연의 길로 알고 싶어 하던 자들을 두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 한복판에다 반대로 알아듣는 정신을 뒤섞으셨다 하였으니, 이는 하느님께서 실지로 오류의 영을 원하시거나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그것에 사람들의 참견을 꺼려하시는 그것에 빛을 아니 주심으로써 그들이 바보가 되거나 말거나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니, 하느님께서 오류의 영을 뒤섞으셨다 함은 이런 빛을 아니 주셨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저 손해의 원인이 하느님이시라 함은, 당신이 빛과 도우심을 아니 주심에 있다는 소극적인 원인이니, 하느님께서 이 빛을 철저하게 없애심으로써 사람들은 반드시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2.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이 악마가 많은 사람을 속여 장님이 되게 함을 묵인하시나, 이는 실상 그 사람들의 죄의 값이요 당돌함의 갚음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악마를 믿고 좋은 신으로 알기 때문에 악마는 제 짓거리를 하게 된다.

 

 

 

 

제 22장

 

 

9. 그 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사제와 예언자들의 입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아무 권위가 없었고, 사람들이 온전히 믿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다스리시고 다루심에 있어 인간을 통하여 하시고, 따라서 인간이 지닌 그 자연 이성에 부려지고 거느려지기를 즐기시는 분이라, 당신이 초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일러 주시는 그것마저 사람의 입이라는 대롱줄을 거치지 않는 한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믿는다든지 우리가 안심해도 좋을 만큼 그 자체가 움직일 수 없는 힘이 있기를 미타히 여기시는 까닭이다.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거나 열어 보이실 때면 이와 함께 누구에게 물어볼까 하는 하나의 마음 기울음을 항상 주시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기까지는 그 마음이 흡족하지 못하게 하신다.

 이러한 예를 판관기의 대장 기드온에게서 볼 수 있으니 하느님께서 그에게 미디안을 쳐 이기라는 말씀을 거듭하셨어도 그는 의심스러워 겁만 내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그에게 말씀하신 바를 그가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기까지는 그러한 무기력을 허용하신 것이다.......

 

 

 

(00님! 정말로 맞는 말이예요.

저도 제가 겪은 일들은 남김 없이 00나 00한테 보고하는데.. 늘 조마조마 하고 불안해해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미쳤다고 하면 어쩌나, 그게 아니라고 하면 어쩌나,,,

묵인이나 동조를 해 주셔야 제 생각이나 체험들에 확신을 갖게 되지요.

한 동안은 00님도 거부하셨지만...답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저는 늘 이상했지요. 제가 무슨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괴로운가,,,

00님도 하느님과의 체험이 많아지면서 00언니가 없었으면 살 수 없었을 거라고 해요.

혼자서 어쩔 줄을 몰랐을 거라구요.

다른 성인전에도 나와요. 고해신부나 영적지도자가 없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

 

 

 

11......무릇 겸손한 영혼은 이런 법이라 하느님과 단독으로 교섭하는 모험을 아니하고, 인간의 지도와 의견이 없이는 마음이 흡족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 사람들이 진리를 알려고 모이는 그 자리에 몸소 당신이 계셔 주시어서 자연 이성에 바탕을 주고 이를 밝혀 다져주시는 것이니, 모세와 아론의 입으로 말씀하시면서 두 사람과 함께 당신이 하실 일을 약속하신 경우가 그러하였다.

 그러기에 복음에서도 말씀하셨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 (마태 18,20)

 즉 이를 풀어서 말하면, 내 이름의 보다 큰 존영과 영광을 보려고 두세 사람이 모임 자리이면 내가 그들 가운데 곧 그들 마음 속에 하느님의 진리를 밝혀주고 다져주면서 있노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의할 말을 혼자 있는 거기에 내가 있노라 하시지 않음이다. 말하자면 적어도 둘이라야 한다는 뜻인데 아무도 교회나 그 사제들을 제쳐놓고 저 혼자서 무엇을 하느님 일이라 믿거나 따르거나 다짐함은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니, 그런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께서 진리를 밝혀주시거나 다져주시지 않는 법이므로 그는 진리에 약하고 냉량한 채로 있을 것이다.

 

 

 

 

 

13.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말한 절차를 밟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일에 확증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바오로가 복음에 대한 확증을 가지듯 어느 누가 확신을 가졌더라도 또 계시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손 치더라도 인간은 계시 그 자체와 그에 관한 일에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일, 하느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셨대서 반드시 다른 것을 말씀하셔야 된다는 법이 없고, 무엇을 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도 어떻게 하라고는 아니 말씀하시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답게 그리고 오랫동안 사귀어온 사람일지라도 사람의 재간이나 의견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하느님께서 이를 일러 주시거나 당신이 하시는 법이 없으시니, 성바오로는 이런 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받은 복음이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되었음을 알면서도 다른 사도들과 의논하러 갔던 것이다.

 출애굽기 에도 이런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모세와 매우 가까이 지내셨음에도 그에게 좋은 의견을 준 것은 그의 장인 이드로였지 당신 자신이 아니었으니, 즉 아침부터 밤까지 백성을 기다리게 하지 말고 다른 판관들을 뽑아 모세를 돕게 하라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의견을 인정은 하셨어도 당신이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인간의 이성과 판단으로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시현이나 계시나 말씀을 직접 하시지 않음은 가능한 한 이 모두가 이성으로 이용되고 규정되기를 항상 원하시는 까닭이다.

 다만 신앙에 관한 일은 그렇지 않으니, 이는 비록 이성에 어긋나기 않을망정 인간의 판단과 이성을 온전히 초원하기 때문이다.

 

14. 이러므로 하느님과 성인들이 누구와 여러 가지 문제를 정답게 다루실 경우, 어느 문제에 있어 그 사람이 빠져들 수 있는 결함을-그 자신이 다른 길로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정답다는 이유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밝혀주시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안심하다가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베드로의 꼴이 될 것 이다./////.....하느님께서는 성 베드로의 이 결함을 당신이 직접 깨우쳐주지 않으셨으니 꾸미는 짓은 이성 안에 들고 이성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5.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심판날 이승에서 당신과 친근했고 빛과 덕을 많이 받았을 숱한 사람들의 가지가지 결점과 죄를 벌주시리니, 하느님과 친하고 덕이 있음만을 믿은 나머지 제 할 일을 알고도 소홀히 한 까닭이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에 말씀하셨듯이 놀라며 말할 것이다. “주님, 주님, 우리가 당신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당신 이름으로 귀신들은 쫓아내고, 당신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범법을 일삼은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axo 7,23)

예언자 발람과 그와 비슷한 자들도 이런 따위였으니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은혜를 주시었어도 그들은 죄인이었다. 주께서는 이승에서 가까이 해주시던 그만치 당신의 벗들로 뽑힌 이들을 그들의 결점과 소홀함에 따라 책벌하실 것이다. 그러한 결점 같은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깨우쳐주실 필요는 없었으니, 자연법과 이성을 이미 주시어서 스스로 깨닫도록 마련하신 까닭이다.

 

16.영성지도자에게 지체없이 알려라...(중략)

 

18.셋째, 영혼이 제아무리 초자연 현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더라도 겸손과 복종과 극기를 위해서는 그 전부를 보고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까짓 일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싶고 서로 의논을 하려야 상대방이 어떻게 여길는지 모른다 해서 그런 일 말하기를 몹시 꺼리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겸손이 모자라는 탓이니 역시 자기를 굽혀 일러바쳐야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성인들에게나 있는 일들이 자기네에게 있다고 사람들이 알까 싶어 말하기를 너무 부끄러워하고 그 밖에 다른 사연도 실토하기를 어려워한다. 대수롭지 아니한 일들을 가지고 보고할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경우에 있어서도 자기를 끊고 말을 해야 한다. 그러는 중에 겸손 솔직하고 유순하고 잘 털어놓는 사람이 되어서 드디어는 언제나 보고하기기 쉬워질 것이다.

 

 

 

(00님! 제 이야기예요.

저는 초자연 현상에 별로 가치를 두지 않아요.

그야말로 거저 주시는 것이고 공이 아니라고 늘 말해왔지요.

하느님 말씀 듣는 사람들의 기도보다는 무지랭이 무식쟁이의 고생이 더 가치있을 수 있다고,

또 은사 자체는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근데 그렇게 알고 있으니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요.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걱정, 대단하게 생각해도 걱정이라는 거지요..

건방지다고 생각해도 걱정,, 시기해도 걱정, 미쳤다고 할까봐 걱정.. ㅋㅋㅋ

그래서 제 생각들을 누군가 지도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아직은 많은 부분 저 혼자 감당해야 해요.

그래도 00님이 제일 답장을 잘 해주시니까. 답장으로 성의없이 몇 줄 날려도, 제 멜을 다 읽어보시는 유일한 분이시니까..그거라도 감사..)

 

 

 

19,.....

필요하면 명령을 내려야 한다. 어떤 이들은 실토하기를 매우 꺼리는 수가 더러 있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하는 것이다. (초자연스런) 그런 일들일랑 거들떠보지 말도록 순순히 타이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것에서 욕과 마음을 비워야 함을 가르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한 가지 일, 하나의 행위가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시현이나 통교의 일체보다 하느님 앞에서는 더욱 가치로움깨우쳐 주어서 믿음으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시현 같은 것은 공도 죄도 아닌 것, 이를 전혀 얻지 못한 많은 영혼들이 이의 숱한 경험이 있는 이들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크게 진보하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후아.. 진짜 저한테 깨우쳐주신 것과 똑같은 내용.... 000 언니한테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은사 자체는 별 가치가 없다는 것. 고통을 감수한 사랑만이 가치가 있어요.

믿음의 최대값을 채워야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최대값을 채워야한다는 것... 하느님 화이팅이다.....)

 

 

 

이 지견(깨달음)은 두 가지 형으로 나누이는데, 이미 말한 대로 그 하나는 창조주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조물에 관한 것이다. 두 가지 지견이 영혼 안에 자아내는 그 맛이 대단하지만, 그 중에도 하느님께 대한 지견이 일으키는 그 즐거움은 어디다 비기려야 비길 수 없고 어떻다고 말하고 시늉할 표현이 없다. 하느님 당신께 대한 지견이요 바로 당신께 대한 즐거움이기에 다윗이 말한 대로 아무 것도 당신께 견줄 것이 없는 것이다. 이 지견은 직접 하느님을 두고 일어나기 때문에 당신의 어느 속성이 더할 나위 없이 깊이 느껴진다. 언제는 그 전능하심 또 언제는 그 강의하심 그리고 또 언제는 그 지선하심과 감미로우심 등등이 사무치게 느껴져서, 느껴지는 때마다 느껴지는 그것이 영혼 안에 사뭇 붙어버린다.

이것이 곧 순수 관상이므로 영혼은 이에 대해서 말할 재간이 조금도 없음을 분명히 안다. 다만 무엇을 말할 수 있다면 거기에서 느낀 벅찬 즐거움과 행복감을 일반적인 표현으로 약간 시늉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거기서 맛보고 느낀 바를 그런 표현으로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는 없다.

.....

이 차원 높은 지견을 영혼이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해야만 가지는 것이니 지견 그 자체가 바로 합일이기 때문, 지견이란 곧 영혼과 하느님과의 어떤 맞댐이므로 여기에 하느님께서는 느껴지고 맛보아진 하느님 당신이신 것이다. 지견과 맛이 이 맞댐이 영광(천국)에서처럼 드러나고 똑똑한 것은 아니지만 영혼의 실체를 사뭇 꿰뚫는 숭고하기 짝없는 것이다.

악마가 여기에 손을 쓰거나 이와 비슷한 짓거리를 할 수 없으니, 이에 비길 만한 것이 전혀 없고 놈의 재주로는 이와 같은 맛이나 즐거움을 줄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지견은 하느님의 본질과 영원한 생명을 깨치는 것, 악마는 이렇듯 숭고한 것을 시늉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놈은 잔나비 시늉을 해서 무엇을 우람스럽게 펼쳐 보인다든지 어떤 만족감을 영혼에게 준다든지 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인 양 꾸밀 수는 있어도 하느님의 시현처럼 영혼의 실체 속에 깊이 들어가거나 영혼을 새로 바꾸어 놓거나 그 즉시로 사랑에 불타게 하지는 못한다. 사실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서 이루시는 지견과 접촉은 어찌나 영혼을 가멸지게 하던지, 그 하나만으로도 영혼이 평생 고치지 못하던 모든 결점을 단 한 번에 없애버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복으로 채워주는 것이다.

게다가 이 맞댐이 자아내는 그 맛과 즐거움이 어찌나 깊던지 영혼은 평생을 두고 겪어야 했던 무수한 고생이 단 한 번의 맞댐으로 넉넉히 갚아졌다고 여길 정도다. 따라서 영혼은 용기가 샘솟고 활기가 넘쳐 하느님을 위한 고생을 많이 하려 들고, 고생이 적은 것을 보면 남달리 괴로워지기 마련이다.

 영혼이 이같이 지견에 도달함에는 어느 비교나 상상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지견이 모두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재간과는 관계 없이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이루어주시는 것이 이런 지견이다. 그런 까닭으로 영혼이 미처 생각지도 바라지도 않는 때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런 하늘스런 맞댐을 주시기 일쑤인데 그럴 때면 하느님께서 당신께 대한 어떤 생각을 일으켜주신다. 때로는 어떤 일, 심지어는 아주 작은 일을 회상함만으로도 갑자기 이런 맞댐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영혼 뿐 아니라 육체마저 소스라칠 정도로 몹시 날카롭다. 그런가 하면 또 어는 때는 아무 소스라침도 없이 다만 조용히, 그러나 갑자기 마음이 즐겁고 시원해지는 느낌과 함께 영혼 안에 일어나는 수도 있다.

이 밖에 성서나 다른 무엇에 대해여 어떤 말을 하거나 듣거나 할 때에도 신묘한 맞댐이 이루어지는 수가 있으나 그 효과와 감동이 매양 같지는 아니하다, 대개는 미약하기에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약하다손 치더라도 그 순간 영혼이 가지는 하느님의 생각 하나, 하느님과의 맞댐 하나는, 다른 피조물 및 하느님의 일들에 대한 숱한 생각이나 지식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그리고 이 지견은 갑자기 또 인간의 자유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영혼은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하고 싶으신 때에 하고 싶으신 대로 내맡겨 오직 겸손되이 있을 뿐, 싫다 좋다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렇다 해서 다른 지각의 경우와 같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지견은 하느님과의 합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합일로 영혼을 이끌어나가려 하고, 그러기에 일체를 벗고 떨어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은혜를 하느님께 받도록 하는 겸손. 그리고 일체 갚음을 바람이 없이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참는 그것이다. 이런 은혜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영혼에게 내리시는 만큼 집착이 있는 영혼은 받지 못하고 오직 자기를 완전히 떠난 영혼이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 성요한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이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게 될 것이고 나도 그를 사랑할 것이며 내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 보이겠습니다.”(요한 14,21) 하셨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깨침(지견)과 맞댐(접촉)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으니,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는 영혼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제가 이 부분 읽고 엄청 행복해졌어요. 헤헤헤헤..

 제 추측이 맞았어요. 제가 관상기도를 하고 있다는 거요..

제가 하고 싶다고 하게 되는 게 아니예요.

어떤 날에는 몇 번씩 하느님께 푹 빠져드는데...

평생의 고생이 단 한 번의 어루만지심으로 다 보상되었다고 느낄만 하구요...

어떻게든 그 느낌을 표현할 길이 없지요.

대부분 엉뚱한 때에 그런 느낌을 자주 주셔요.

화장실에 있을 때라든가, 전혀 기대치 않은 짜투리 시간이라든가,

성경이나 책을 읽다가도 주시지요.

하느님의 한 속성이 사무치게 느껴지는 거요. 그래서 맨날 울게 돼요.

어느 때는 하느님의 아름다움, 약하심, 선하심, 정의로우심, 자비,, 등등,,,

그리고 온 몸으로 말씀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미약한 느낌도 다 하느님과의 합일이라는군요..

피조물에 대한 지견도 마찬가지예요..

어쩔 때는 제 주위의 사람들 안에 작용하시는 그분의 섭리와 사랑을 느끼고도 울어요.

기쁘고 고마워서 울어요.

 

00님!

제가 이 부분을 읽고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상상하실 수 있으세요?

관상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예요.

제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 없어요. 꿈꾸지도 못할 일이니까요.

제가 그런 엄청난 선물을 왜 받는지 저도 잘 몰라요.

겸손한 척 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몰라요.

너무 부당한 것 같아서 기뻐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돼요.

이제는 정말로 모르겠어요.

제가 기뻐하는 게 옳은지, 슬퍼하는 게 옳은지,,, ㅋㅋㅋㅋ

아무튼 단 한 번의 맞댐으로도 고생을 많이 하려든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아요.

십자가를 찾아다니는 성인들의 심정을 이해할만 하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저한테 깨우쳐주신 대로 갚으라고 하실 거예요.

제가 탁솔 맞고 진통제 안 먹었던 것도 그런 심정에서였어요.

근데 그게 그런대로 기뻤어요. 제가 '달콤한 고통이'라는 시 적었었는데 싣지 마라고 말리셨지요?.. ㅎㅎㅎㅎ

기차에서 여기까지 읽었어요..

 

제가 생각했지요.

'에이고, 하느님,, 저한테 고통을 새로 주시고 싶으셔서,, 미리 사전작업하시는 거지요?

너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으니, 기뻐하고, 고통을 더 받아라. 옛다. 영원에서부터 마련된 네 몫의 시련이다.'

순서가 그렇잖아요?

제가 가르멜의 산길 조금이나마 읽게 된 시점이 절묘하잖아요?

은총을 주어서 단련시켰으니 고통을 더 주시려는 거 아니겠어요?

그게 영원 속에서 보면 저한테 훨씬 좋은 거니까요.

하느님의 속셈이 다 보이지요? 또 이렇게 까불다가 혼날라...

 

아무튼 오늘 아침에도 잠깨서 가슴이 설레이는데...

저는 속으로 “하느님께서 또 무슨 꿍꿍이 속셈으로 나한테 이러시나?”

 

아무튼 사람들이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받고 싶어 한다는 관상의 은총을 저는 듬뿍 받았으니까.

배운 대로 실천해야지요.

자궁내막암이든 뭐든,,,두려움이든,,, 다 봉헌하는 거지요..

뭐..죽으라면 죽지요. 예수님 닮은 삶이 그런 거라면 ....

제가 슬퍼하면서 울면 옳지 않아요.

오히려 고통을 기뻐할 일이지요.. 그지요?

비오성인 말씀에,, 고통은 나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

 

실컷 떠들고 났더니만 힘이 훨씬 나네요..

제가 월요일부터 아무도 몰래 많이 울었다는 것은 하느님하고 천사들하고 00님만 알아요.

이제  기분이 좋아졌어요.

검사결과가 좋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한테 화이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