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를 수용하라
일단 광야길에 들어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광야를 떠난다 해도 그곳에 또 다른 광야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내 앞에 다가온 광야에 등을 돌리는 그 순간, 또 다른 광야가 내 앞에 다가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자체가 광야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약속의 땅이 없다.
약속의 땅은 죽어서나 가게 될 천국 본향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순례자인 것이다.
이 세상은 천국 본향으로 나아가는 길, 과정으로서의 광야이다.
그러니 광야를 거부하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광야는 십자가이다.
십자가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매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히 살려면 매일같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매일이다.
매일같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천국 본향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 삶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우리 자신만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고, 다른 사람들이 지고 가는 십자가보다 더 큰 것 같아서 하느님께 투덜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어떻게 저에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까?" 그 말을 듣고 하느님께서 "그래? 그렇다면 네 십자가를 바꾸어 주마." 하셨다. 그러고는 그에게 맘에 드는 다른 십자가를 고르라고 했다. 그 사람은 크고 작은 십자가가 쌓여 있는 창고에서 가장 가볍고 편해 보이는 십자가를 찾기 시작했다. 좀 가벼워 보여 들어보면 그것도 무겁고, 작다 싶어 들어봐도 그것 역시 불편하고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들어보고 내려놓고, 들어보고 내려놓고 하며 하루종일 걸려 이거다 싶은 십자가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하느님께 들고 갔다. "하느님 드디어 골랐습니다. 가벼운 십자가로 바꿀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그에게 말하였다. "자세히 보아라. 그 십자가는 본시 네가 졌던 십자가 란다."
그렇다 내 십자가보다 남의 십자가가 편하고 가벼워 보인다 하더라도, 나에게 가장 알맞고 편안한 십자가는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피해 갈 수는 없지만 십자가를 선택할 수는 있다.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인내하면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인내하면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쉴 수 있게 된다.
고통스런 상황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쉴 수 있게 된다.
십자가는 곧 광야이다.
광야를 걷는 자세는 십자가를 나르는 자세와 똑같다.
우리말로는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번역했지만 십자가는 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안고 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매일같이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을 때 사용한 그리스어 바스타제인은 그 첫번째 의미가 '귀중한 것을 품에 안고 가다'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간다고 할 때 이 동사를 쓴다.
십자가를 지고 질질 끌고 가는 것과 십자가를 성큼 안고 가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안고 가는 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이다.
십자가를 안고 간다는 것은 다른 이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전가시키지 않고,
낙심하거나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구절 앞에서 잃어버린 순심을 되찾고 스러져 버린 구도혼을 일으키려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맑고 깨끗한 시를 쓴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십자가를 철저히 품에 안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조국의 운명을 자신의 십자가로 안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이다.
다음은 윤동주 시인이 돌아가시기 직전 쓴 시, '십자가'이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가 있었느냐?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나는 결심하였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어두워가는 조국의 하늘 아래
내 젊은 모가지를 길게 늘이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겠습니다고.
이 세상살이는 언제나 광야를 선사하지만 우리 앞에 놓여진 광야를 용기있게 직면하고 해방을 맛볼 수 있다면 또 다른 광야가 밀려왔을 때도 쉽게 해방될 수 있다.
한 광야에서 존재 자체가 거듭나는 과정을 충실히 걷고, 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깨깊이 깨달은 사람은 새로이 어떤 광야가 밀려온다 해도 반항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하느님 보살핌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저 세상에서는 충만함을 누리고 이 세상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이 광야 삶에서 희망을 갖고 저기 약속의 땅에서 충만함을 갖자.
이 광야 삶에서는 나그네 길을 걷고 저기 약속의 땅에서는 고향을 갖게 되리.
오늘 (이 광야에서) 노래를 부르자.
휴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곤란 중에 위로를 찾기 위해 방랑자달이 노래하듯 우리도 노래를 부르자.
노래하라. 그리고 굳건히 걸어가라.
어려울 때 노래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라.
짜증과 (반항과 원망을) 가까이 하지 말라.
노래하라. 그리고 씩씩하게 활보하라.
되돌아가지 말라.
뒤처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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