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고통의 얼굴만을 보는 데 익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보다는 다른 열 명의 보고를 더 믿는다.
그러고는 절망감에 빠져서 아우성치고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소리소리 질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도 더 좋았을 것을. 야훼 하느님은 어찌하여 우리를 이리로 데려다가 칼에 맞아 죽게 하는가? 아내와 어린 것들이 적에게 붙잡혀 가게 하는가?" (민수 14,1-3)
백성들은 "이집트로 돌아가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다."고 고함치면서 모세 대신 다른 지도자를 뽑아 이집트로 돌아가려는 논의를 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 앞에서 여호수아와 갈립은 옷을 찢으며 만류한다.
"우리가 하느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역하는 짓은 하지 맙시다. 그 땅의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민수 14,8-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을 만류하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쳐죽이려 한다.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 크게 진노하시며 나타나 다음같이 선언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안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이 백성은 나의 영광을 보고도, 내가 이집트와 광야에서 나타낸 힘을 보고도 이렇게 거듭거듭 나를 시험하고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니 그 누구도 내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수 14,21-2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한 말 그대로, 그들이 원하는 그대로 해준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얘기했지.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도 더 좋았을 것을.' 오냐! 너희는 이 광야에서 죽어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광야에서 하느님 돌보심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고통의 얼굴만을 바라본다고 해도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다시말하지만 이스라엘의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은 하느님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의 작품이다.
고통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던 이스라엘의 자업자득이다.
그들은 돌보심보다는 고통의 얼굴만을 보았기에 하느님께서 그 동안 자기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강한 팔을 뻗으시어 이집트의 파라오와 그 백성을 놀라게 하고 자기들을 탈출시킨 사실과 홍해 바다를 갈라서 안전히 건너도록 한 사실, 광야에서 물과 음식을 먹이시면서 바란 광야까지 이끌어주신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고통의 얼굴만 바라보았기에 이성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하느님을 향해 부르짖었던 원망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미아가 되어 40년을 헤맨 것은 순전히 그들의 탓이었다.
우리 삶이 힘겨운 광야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그 광야의 두 얼굴, 즉 보살핌과 고통의 얼굴을 보여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갈림길의 순간에서 두 가지의 선택, 즉 위험과 기회라는 선택이 다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련이 혹독하고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다음과 같은 말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들려주면서 보살핌의 얼굴을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기쁨과 즐거움, 의미와 보람, 자윤인의 삶을 얻기 위해서 지금 이 광야에서 하느님 보살핌의 얼굴을 택할 것이다. 지금 이 위기의 자리에서 기회를 택할 것이다."
광야에서 보살핌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고통스런 여건을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 가득한 '아빠, 아버지'임을 믿어야 한다.
인간 성향 자체가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에 치우치기 쉽기에 광야에서 보살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사랑이고, 사랑뿐이신 아빠, 아버지를 기억해야 한다.
'아빠, 아버지' 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인 우리를 고통 속에서 보호해 주시고 견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서에 자주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 중의 하나는
"두려워 말라. 힘을 내고 용기를 내어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여호 1,9; 이사 8,12; 43,1; 예레 46,27-28; 하께 2,5 참조)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힘을 내고 용기를 내어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짧은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놓인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더 자주 들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로마 10,14).
자주 들려줌으로써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보살핌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돌보아 주심을 믿어야 한다.
광야에서 보살핌의 얼굴을 보기보다는 고통의 얼굴만을 볼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불안 뿐이다. 안식을 얻지 못하는 삶뿐이다.
히브리서는 이 점에 대해 분명히 선언한다.
"너희가 오늘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거든 광야에서 유혹을 받고 반역하던 때처럼 완악한 마음을 품지 말라. 너희 조상들은 사십년 동안이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서도 하느님을 시험 삼아 떠보았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은 언제나 빗나가서 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대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히브 3,7-11)
광야에서 우리가 어떤 얼굴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길이 달라진다.
광야는 해방을 가져다 줄 수도 잇고 죽음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아빠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보살핌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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