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속성과 우리의 태도
지금까지 우리는 광야가 갖는 두 가지 적극적인 기능을 알아보았다.
광야는 우리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요, 생의 우선순위를 보게 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제부터는 광야에서 인간이 실존적으로 어떤 체험을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리는 광야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체험을 하게 된다.
즉 광야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기도 하고, 하느님께 반항하기도 한다.
또한 하느님의 시험을 받거나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유혹을 받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해방에 이르게 되는가?
광야는 두 얼굴의 장소
광야란 생의 조건이 결여되어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살아간다.
황량하고 고통스럽고 힘겨운 곳.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고 물이 없어 타는 곳"(신명 8,15)이 광야이다.
그러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살아간다.
도저히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곳에서 이스라엘이 살아간다.
그래서 광야는 신비의 장소이다.
우리 또한 삶의 무게와 고통에 짓눌려 살아간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
바로 이 점,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신비이다.
광야는 두 얼굴을 가진 장소이다.
한편에서는 힘겨움. 황량함. 외로움 등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고통의 얼굴을 보이는 장소요, 다른 한편에서는 놀라운 섭리와 보살핌이라는 얼굴을 보이는 장소이다.
야곱의 후손들은 광야에서 고통과 보살핌의 두 얼굴을 체험한다.
갈증과 배고픔 앞에서 그리고 다른 부족들의 침략 앞에서 멸망할 위기에 놓이지만 하느님 덕분에 생명을 부지한다.
하느님께서는 물이라고는 없는 광야에서 물이 샘솟게 하시고,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리를 주시고, 아말렉족의 침략에서 지켜주신다.
우리의 광야 역시 두 가지 얼굴을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고통의 얼굴을, 다른 한편에서는 보살핌의 얼굴을 보여준다.
두 얼굴을 보여주는 광야에서 어떤 얼굴을 쳐다보느냐에 따라 우리 생명의 존망이 달려있다.
고통의 얼굴을 쳐다본다면 절망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요,
보살핌의 얼굴을 쳐다본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위기라는 말은 '위험'과 '기회'라는 두 글자가 합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기의 때는 전환의 때이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갈림길에 서 있는 순간이 바로 위기의 순간이다.
광야에서 고통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위기의 순간에 위험을 택한다는 것이요,
보살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기회를 택한다는 것이다.
모든 위기는 파국으로 끝나지 않고 기회라는 씨앗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이 진리를 명심한다면 우리는 어떤 절망스런 처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를 힘겹게 만드는 삶일지라도 전환의 기회로 변용시킬 수 있다.
광야에서 고통의 얼굴을 바라보기보다 하느님의 돌보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하느님만이 강하다는 것, 하느님만이 나를 이 광야에서 해방의 땅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강하다는 것을 고백할 때 하느님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간의 끝은 하느님의 시작이다. 인간의 절망이 하느님의 기회다." 라고 말한다.
하느님만이 나를 이 시련의 시기에서 구원해 줄 유일한 분이라고 고백할 때, 그리고 내 안에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고 고백할 때,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은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신다.
하지만 우리가 이집트 방식, 곧 세속적 방식으로 광야를 대면하면서 해방되려고 애쓴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신다.
그 구체적 증거는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삶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의 미아가 되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을 방랑한 것은
그들이 고통의 얼굴만을 보면서 하느님을 원망했기 때문이다.
광야 40년은 결코 하느님 뜻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광야길은 단지 시나이산에 이르는 길이었다.
시나이산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부르심을 받은 장소이다.
하느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 맺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두 얼굴을 보이는 광야에서 고통의 얼굴만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서 어려움이 닥쳐올 때마다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기보다는 끊임없이 고통의 얼굴만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광야를 벗어나 약속의 땅에 들어갈 마지막 지점에 와서도 시련이 닥쳐오자 고통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시나이산까지 걸어간 기간은 약 한 달 반 정도였다.
성서학자들은 성령강림 오순절과 같은 날수 동안 이스라엘이 걸어갔다고 본다.
50일 만에 시나이산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서 여러 달 머물면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법을 받는다.
그러고 나서 다시 행군을 시작하여 바란 광야에 도착하게 된다.
바란 광야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이스라엘이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까지 온 것이다.
바란 광야만 넘어서면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게 된다.
탈출부터 바란 광야에 이르기까지 기간은 불과 반년 정도였다.
이제 바야흐로 광야의 모든 고생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열두 명의 정탐병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낸다.
이들 정탐병들은 각 부족의 우두머리로 구성된 최고의 정예그룹이었다.
정탐병들은 40일간 정탐을 끝내고 돌아와서 모세와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우리에게 가라고 한 그 땅에 갔었습니다. 그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것이 그 지방에서 나는 과일입니다."(민수 13,27)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병들의 보고를 듣고 또 그들이 보여준 잘 익은 과일을 보고 환호성을 올렸다.
"드디어 우리의 고생이 끝나는구나!"
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보고를 들으면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키가 자앧 같습니다. 거기다가 그들은 강한 성읍들과 견고한 요새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나킴의 후손들도 보았습니다."(민수 13,28)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이 동요하자 열두 정탐병 중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이렇게 말한다.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점령합시다. 우리는 점령할 수 있습니다." (민수 13,30)
하지만 다른 열 명의 정탐병들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더 나쁜 소식을 전한다.
"우리가 정탐하고 온 땅에 들어가 살려다가는 도리어 잡혀 먹힐 것이다. 거기에는 키가 장대같은 사람들이 있더라. 우리가 만난 거인들 가운데는 아나킴말고도 다른 거인족이 또 있더라.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 같았지만 그 사람들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다." (민수 13,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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