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스크랩] 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 -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김레지나 2011. 1. 12. 23:30

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지팡이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이다.

목자에게 지팡이는 팔의 연장으로,

위기상황에서 목자의 힘을 보강시켜 주는 무기가 된다.

목자는 들짐승이나 독사가 가까이 오면 막대기로 자신은 몰론 양도 위험에서 건져주는 것이다.

또한 지팡이는 양을 길들이고 교육시키는 훈련도구이다.

어느 양이 제대로 따라오지 않으면 막대기로 양의 허리를 가볍게 두들겨 주면서 따라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처럼 목자와 양이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면 지팡이는 앞의 일반적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도 발휘한다.

어두운 밤, 더구나 달도 뜨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목자가 양들을 몰고 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목자는 양들을 앞장서 가면서 탁탁 지팡이 소리를 내면 양들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안심하고 어두운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지팡이는 목자의 현존을 가리킨다.

우리 삶에 짙은 어두움이 몰려오고 목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을 때,

즉 하느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라도 지팡이 소리로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절망 가운데서도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알려주기 위하여, 또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기 위하여 지팡이 소리를 내신다.

 

어둠이 짙으면 우리는 잘 볼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느낌이나, 보이는 것에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하여야 한다.

비록 주님을 볼 수 없어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만 굳게 믿으면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인생의 어두운 밤에서 우리가 의존해야 할 유일한 지팡이는

하느님의 손에 있는 지팡이 이다.

그러나 사람이 고통의 순간에 하느님의 지팡이가 아닌 다른 지팡이에 의존해서 일어서려 애쓰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지팡이가 아니라 자신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가려고 한다.

어떤 이는 학위나 지위가 지팡이일 것이요,

어떤 이는 제물이 지팡이일 것이다.

그러나 어둔 밤을 지나려면 하느님의 지팡이 이외에는

어떤 지팡이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다른 지팡이를 쥐고 있게 되면 하느님의 지팡이에 의지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일어서는 시간도 더디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이 아닌 다른 지팡이에 의지하려 하는가.

사실 우리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는 이들이 우리 옆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인지상정이다.

아프거나 고독하거나 절망스러울 때 우리를 깊이 이해해 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적인 위로와 힘에 지나치게 매달린다는 것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주님의 지팡이 소리를 들으려 해도 들릴까말까인데 다른 지팡이 소리에 정신을 팔다 보면 더 깊은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나는 정말 괴로운 일이 있으면 성체 앞에 나아가서 여러시간 머물러 있는다.

성체 앞에 나아갈 때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 아무리 마음이 괴로워도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즉 나의 두 무릎이 가죽끈으로 묶여 있어서 정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풀리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결심하여도 처음 얼마간은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아 성당 밖으로 나가려 하거나, 반짝이는 기발한 방법이 떠올라서 빨리 그것을 실행하러 나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결심에 충실하면서 몇 시간 요지부동하다보면 감실 안에 계신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안정을 되찾고 나아갈 길을 찾게 된다.

 

우리가 정말로 필료로 하는 그 자리, 그 누군가가 위로해 주기를 바라는 그 자리에 주님이 항시 와 계신다.

주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아파하는 자리자리에 와 계신다.

구세주께서 언제나 우리를 돌보신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이 점을 굳게 믿어야 한다.

시편 저자는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날개로 덮어주시고 그 깃 아래 숨겨주시리라."

(시편 91,4)고 말한다.

어미 닭은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어 가려고 선회하는 것을 보면 얼른 병아리들을 불러모아 날개로 덮어 숨겨준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위기에 놓인 우리를 당신 날개로 덮어 숨겨주신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우리가 평안을 되찾을 때까지 위로하며 당신 품에서 보호해 주신다.

특히 두려움에 떠는 이들, 지친 이들, 상심한 이들, 외로운 이들, 실망하는 이들, 고통받는 이들, 실직한 이들을.

 

어둔 밤에 주님께서 지팡이 소리로 당신 현존을 알려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포콜라레 회원인 안나 마리아 잔주끼의 생활나눔을 들어보자.

어느날 그녀의 남편이 종합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병일지도 모르니 다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안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은 하느님 사랑으로 귀결되고

하느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아갈 때 가장 좋은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느님의 지팡이 소리를 들으려 애쓴 것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불안과 공포와 절망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고통스럽고 어두운 느낌들이 극치에 달한 순간,

잔주끼는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기도를 하였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평화가 마음 가득히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하느님 사랑은 모든 절망과 고통을 능가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은 아빠, 아버지시기에 필요하다면 남편을 다시 살려줄 것이요,

만약 하느님 뜻이 다른 데 있어서 이별의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그녀와 남편 사이에 변함없는 일치를 허락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지팡이가 아닌 하느님의 지팡이에만 의지하면서 어두운 골짜기를 거친 사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주님과의 합일을 맛볼 것이요,

고통을 통해서 내적인 인간, 성숙한 인간, 자비로운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그 사람은) 비온 뒤에 숲속에 들어선 것처럼

생의 모든 것이 신선하게 다가서 옴을 느끼게 될 것이요,

어두운 골짜기를 거쳐온 덕분에

자신이 땅의 인간임을 잊지 않고 타인을 자비롭게 대할 것이다.

.... 신앙이란 철저히 수동적인 것임을 깨달을 것이요,

인간의 의지가 영점(zero point)가 되는 시점에서야 비로소

주님의 생명력이 피어 오르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임을 깨달을 것이다.

이웃에 대한 바람도 또 그동안 자기가 드려온 인간적 기도도 다 놓아버리면서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만 희망을 두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의 의지가 사라져 버리는 바로 그때에

주님의 은혜로써

눈부신 비상을 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출처 : 퍼렁별나라공쥬님의 블로그
글쓴이 : 찬미예수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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