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
나 비록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2)
우리의 인생길에는 반드시 어둔 밤이 있다.
질병, 경제적 어려움, 이별, 상실, 좌절의 아픔, 외로움, 배척당함 등등.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 어려운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더욱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런 시간을 뎐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기도 한다.
얼마 전 신문 보도에 의하면 하루 평균 40명의 사람들이 자살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
꽃은 아침에 피어나기 위해서 밤에 준비한다.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이슬을 머금고 활짝 피어나기 위해서는
어두운 밤 동안 준비해야 한다.
밤이 없다면 꽃은 피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의 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 어두운 IMF라는 밤을 인내하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의 꽃은 피어나지 못할 것이다.
특별히 신앙인들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움이 짙었던 날에 거룩할 성(聖)자를 붙인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였던 금요일을 성금요일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부활 때문이다.
부활이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생의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개인적인 성금요일의 어두움으로 여기며
희망의 부활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바꾹 예언자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 해도 하느님은 영원하기에 자신은 결코
절망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립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하바 3,17-18)
벤자민 바이르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회교도들에 의해 납치되어 16개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감옥은 그의 정서와 의지를 무력하게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바이르는 전깃불도 없고 창은 늘 가려져 있는 방에 홀로 갇혀 있었다.
그의 손에 늘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일상의 움직임은 일일이 통제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라면 웬만한 사람은 외로움과 영적 침체로 절망의 나날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르는 하느님 외에는 그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는 비참한 환경에서도
하느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낮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낮잠, 담요, 버티는 힘에 대해 감사드렸다.
그리고 그 외에도 감사드려야 할 하느님의 선물을 찾았다.
가려진 창의 가리개를 올려서 빛이 어두운 방안으로 스며들게 했다.
그리고 방안을 둘러보며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았다.
천장에 달린 전깃줄을 보았다. 전구와 소켓은 제거되어서 전깃줄 세 가닥이 나와있었다.
마치 세 개의 손가락 같았다. 아래를 향해 내려오는 손가락처럼.
나는 로마 시스틴 성당에 있는 미칼렌젤로의 그림 '천지창조'에서 아듬을 향해 손을 뻗으신 하느님의 손을 기억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이 나를 향해 손을 뻗으시면서 다음처럼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살아 있다. 너는 나의 것이다. 내가 너를 만들었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너를 불렀다."
자연에 순환주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에게도 순환주기가 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은총이 있으면 시련이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성스러움을 가르쳐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어둔 밤에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앙인들이 겪는 인간적 체험은 매닝 추기경이 말씀하신 대로 그 근본에 있어서
신학적 체험, 즉 신에 대한 체험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인의 모든 체험은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도 깊은 산골짜기에서 시작하여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지나면서
수많은 시련과 고비를 극복해야만 넓은 강에 이르듯이 신앙인의 체험도 수심 깊은 영적 바다에 이르기 위한 귀한 체험이다.
신앙인들은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이 가라앉고 심신이 회복되면 그 고통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보게 된다.
언젠가 용인 묘지에서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보았다.
"하느님께서 주신 석이를 하느님께서 데려가셨으니 하느님을 찬미할 뿐."
그리고 뒤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다섯 살에 죽은 석이를 그리면서. 석이 할머니. 아빠. 엄마. 그리고 여동생이"
석이를 잃은 가족들이 처음부터 이런 묘비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처음에는 통곡하고 슬퍼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인이기에 고통스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픔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른바 신학적 체험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석이를 하느님께서 데려가셨으니 하느님을 찬미할 뿐"이란 묘비명은 욥이 자녀와 재산을 잃어버린 후에 했던 표현이다.(욥 1,21 참조)
욥이 자녀와 재산을 잃게 된 것은 사탄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욥은 "하느님이 주신 것, 사탄이 가져갔으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주신 것, 하느님이 가져갔으니"라고 말한다.
욥의 이러한 고백은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의 궁극적 실재가
하느님이라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현대 신학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모든 현상 밑의 심연이요(폴 틸리히),
모든 체험의 지평이다(칼 라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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