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바른 길이요
목자가 양떼를 인도하는 길은 언제나 바른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편안한 길, 안락한 길을 가리키지 않는다.
'바른 길'이 아니라 '곧은 길'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곧은 길이 바른 길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구부러진 길'의 반대 의미로서 사용된다.
곧 지름길로 해석되는 것이다.
곧은 길로 번역한 데는 주님이 착한 목자시라면
당신의 양떼를 이리저리 끌고 다녀 고생시키지 않고
지름길로 인도할 것이란 기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 양떼를 인도하실 때 지름길로 인도하시는가?
사랑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고생하지 않도록
편안한 길로 인도하시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무려 40년이란 긴 세월을 시나이 광야를 헤매야 했는가?
왜 주님께서는 3,4일이면 갈 수 있는 해안 길을 두고
돌아가야만 하는 광야 길로 이스라엘을 인도했는가?
그렇다면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헤매게 하신 주님은
착한 목자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주님은 착한 목자이시다.
이스라엘이 걸었던 광야 40년은 분명 바른 길이었다.
그 길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수백 년간 익숙했던 이집트의 삶을 벗어던지고
하느님 백성으로 정화, 단련될 수 있었다.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찍이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2-3)
하느님은 곡선으로 직선을 그리시는 분이다.
이스라엘이 빙빙 돌아갔다고 생각했던 광야의 길은 그들을 하느님 백성으로 양성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길이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덜 준비된 채 서둘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준비되어 들어가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이 세상의 편안한 삶 중에서
하느님이 어느 삶을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는가?
하느님이 어떤 삶에 신경을 써주시기 원하는가?
영원한 생명인가, 언젠가는 스러질 목숨인가?
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보다는 있지 말아야 할 자리,
위험한 자리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을 바른 자리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가?
하느님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계시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항상 바른 길이다.
때로 주님께서 우리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우리에게 선이 되는 '바른 길'이다.
때로앞이 보이지 않고 혼란스럽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우리에게 가장 맞는 길, '바른 길'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 10,10)
우리 생명을 풍성케 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잘 먹고 잘 살수 있는 길로
인도하기보다는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바를 청하기보다는
하느님이 올바르다고 보는 바를 하시도록 청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인간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표현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편안하고 평탄한 길을 걸어갈 때에만
하느님께 신뢰와 신앙을 둘 수 있다면 그것은 값싼 신앙이다.
참 신앙은 가파른 길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시고 돌보고 계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생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는 것이다.
흔히들 신앙의 삶이란 마치 10미터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는 것과 같다고 한다.
온전히 내어맡기는 의탁의 마음이 없이는 허공에서 손을 놓을 수 없다.
신앙의 신비는 바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의탁 안에 존재한다.
다음 글은 언젠가 감동으로읽었던 영성시이다.
처음 '생명으로 가는 길'은 밝아면 보였다.
눈앞에 펼쳐진 그 길은 훤히 뻗어 있었고, 주님께서는 나의 친구가 되어
나의 안내자가 되어서 내 옆에 서 계셨다.
그런데 '생명으로 가는 길'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날은 저물고,
길은 험해지고,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다리의 힘은 빠지고 아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앉아 앞서 걷고 있던 주님께 울부짖기 시작했다.
"주님! 왜 이렇게 힘든 길로 저를 이끄십니까?
왜 저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드십니까?
생명의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데 왜 이렇게 험한 길로 인도하십니까?
왜 제게 곧고 편안한 길을 걷게 하지 않으십니까?
도대체 어디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까?
이제 저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외치자 주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시고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아들아, 네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나에 대한 너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갔느냐?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이 길을 택한 것이다.
너를 위해서 택한 길, 바른 길이다.
그러니 믿고 따라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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