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이 구절에서 나오는 두 가지 혜택은
양떼들이 목자를 완전히 신뢰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당연한 결과이다.
어디에 풍요로운 목초지가 있고 어디에 시원한 물이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목자를 의지하고 따라다닌 덕분에 양들은 푸른 풀밭에 누워서 쉬기도 하고 시원한 물가에서 목을 축이기도 한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로운 삶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면서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다닌다면 안식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양들의 실제 상황과 관련해서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란
구절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자.
양들은 겁이 많고 까다로운 짐승이라서 쉽게 눕지 않는다.
아무리 파아란 풀밭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고 해도
다음 몇 가지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양들은 눕지 않는다.
첫째, 일체의 두려움이 제거되어야 한다.
둘째, 양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마찰과 갈등이 제거되어야 한다.
셋째, 배가 불러야 한다.
이상 세 가지 걱정거리에서 자유로워져야만 양들은 비로소 누워 쉴 수 있다.
그러니 이 모든 걱정거리를 없애주고
푸른 풀밭에 누워 쉴 수 있도록 해주는 목자는 정말로 좋은 목자이다.
그는 양들을 위해서 모든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는 목자이다.
우리는 조그마한 두려움이라도 밀려오면
얼마나 빨리 평화를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는가!
우리의 실존은 무척 불안하고 나약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오늘은 평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내일은 무참히 깨어져 버린다.
그래서 그런가, 성서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주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마라"이다.
하느님께서는 순례 여정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무서워하지 마라. 아브라함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주리라."
(창세 15,1)하시며 위로하신다.
같은 위로의 말씀이 광야에서 여러 차례 우물을 파야 했던
이사악에게 주어진다(창세 26,24)
또 같은 위로의 말씀이 이집트 땅을 향해 내려가던 야곱에게도 내린다(창세 46,3)
이렇게 "두려워하지 마라"는 위로의 말씀은 성서 여기저기에 나온다.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께서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기에
혼으로 들어야 한다.
힘겨운 인생살이 속에서도 두 다리를 펴고 편히 쉴 수 있다면 그것은 착한 목자께서 매일같이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할 때 아무것도 무서워할 것이 없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말라
그 무엇도
너 무서워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님만이 가시지 않나니
인내함으로 모두를 얻느니라.
님을 모시는 이
아쉬울 것 없느니
님 하나시면
흐뭇할 따름이니라.
양들이 푸른 풀밭에 누워 쉬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양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에서 갈등들이 해소되었을 때이다.
살찌고 힘이 센 양들은 힘없는 양들이 목초지 위에 누워 있으면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고 한다.
넓은 목초지에 누울 자리가 충분히 있어도 살찌고 힘센 양들은 약한 양들이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돌진해 가서 옆구리와 어깨로 받아 버린다.
힘없는 양을 받을 때에는 눈동자를 팽창시키고, 목을 활처럼 굽힌 뒤,
머리를 숙이고 돌진해 버린다.
일반적으로 양들 사이에서 두목이 되는 양은 살찌고, 힘세고, 지배적이며,
교활한 암양이다.
그리고 그 밑에는 중간 두목들이 있다.
그러니까 먼저 두목격인 암양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난 다음에 중간 두목이 되는 양들이, 그 다음에 그 외의 양들이 풀밭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우리 인간 사이에서 흔히 발견되는 모습니다.
양과 인간을 모두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양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란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까?
하느님께서는 그래서인지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주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
나는 이제 양과 양 사이.... 시비를 가려 주리라.
너희 가운데는 그 좋은 초원에서 풀을 뜯는 것만으로 부족한지
남은 초원들을 짓밟는 것들이 있다.
맑은 물을 마시고 나서는 첨벙첨벙 흐려놓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약한) 양떼는 짓밟힌 풀을 뜯어야 하고,
흐려놓은 물을 마시게 되었다.
그래서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몸소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리라.
너희들은 약한 양들을 모조리 옆구리와 어깨로 밀쳐내고,
뿔로 받아 우리 바깥으로 쫓아 흩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에제 34,17-21)
세 번째로 양들이 풀밭에 편히 누워 쉬려면 배가 불러야 한다.
풀이 넉넉한 목초지에서 배부르게 먹은 후에야 양들은 쉴 수 있다.
그런데 풀이 넉넉한 목초지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광야가 대부분인 팔레스티나 땅에서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것은
목자들이 땀 흘린 결과 때문이다.
목자들이 돌을 골라내고, 덤불과 나무 뿌리들을 제거하고, 땅을 갈아 양들이 먹을 식물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잡초들을 제거해 주어야 비로소 풀밭이 생기는 것이다.
목자의 땀과 수고가 있어야 양들이 배불리 먹고 풀밭에 누워 쉴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엄청난 수고를 하시면서 우리에게 넉넉한 삶의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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