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
야훼는 나의 목자 (3)
지금까지는 목자와 양의 친밀한 관계는 상호간의 깊은 인식에 기초한다고 하였다.
이제부터는 양의 목숨이 목자에게 철저히 의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친밀성을 설명하겠다.
양의 목숨은 온전히 목자에게 의존되어 있기에
양은 목자에게 신뢰를 두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양만큼 목자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동물은 없다.
그 이유는 양들이 너무나 약하고, 겁이 많고, 까다롭기 때문이다.
양들은 계속되는 관심과 세심한 돌봄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다.
양은 뒤로 벌렁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날 수가 없다고 한다.
뒤로 넘어진 양이 일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힘이 빠져서 일어날 수 없게 된다.
만약 태양이 뜨거울 때 양이 뒤로 넘어졌는데 목자가 알고 얼른 일으켜 주지 않는다면 그 양은 죽게 된다.
특히 새끼를 밴 양은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주 뒤로 넘어지는데 이때 양을 일으켜 주지 않으면 어미양은 물론 뱃속에 있는 양까지도 죽게 된다.
(켈러에 체험에 따르면 새낄르 밴 양은 거의 2, 3일 마다 뒤로 넘어져서 일으켜 줄 필요가 있다고 한다)
초목지가 아닌 광야에서 살아가는 양은 목자에게 더 철저히 의존되어 있다.
물과 풀이 귀한 광야에서 양들은 어디에 물이 있고 어디에 풀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디 그뿐인가? 들짐승이 언제 어디서 달려들어 잡아 먹을지 모른다.
그런데 뒤로 넘어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양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 양은 십중팔구 들짐승의 먹이감이 된다.
팔레스티나 광야의 자연은 양의 목숨을 더 철저히 목자에게 의존토록 만든다.
팔레스티나 광야에는 여기저기 절벽으로 떨어지는 동굴들이 많은데, 만일 그러한 곳에 양이든 사람이든 빠지면 남의 도움이 없이는 빠져 나올 수 없다.
룹닉이란 유고슬라비아 신부는 로마에서 필자와 함께 신학을 공부했고, 외국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필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랑 깊은 예수회원이다.
그는 서품받고 얼마 안 되어 팔레스티나에서 젊은이들과 광야체험을 하러 갔다가 실종되었다.
한 달 넘게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다.
아마도 어느 절벽에서 실족되어 죽었을 것이다.
사해 근처 쿰란에서 많은 성서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목자가 양을 잃어버려 혹시 양들이 동굴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싶어 동굴마다 돌멩이를 던져보았다.
행여 동굴 안에 있던 양이 돌멩이에 맞게 되면 울음소리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돌을 던지는데 한 동굴에서 '쨍그렁'하며 항아리에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서 들어가 보니 거기에 엄청난 고사본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광야에서 양들의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오로지 목자에게 달려 있다.
만일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는데 찾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 양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 양떼를 들판에 놓아두고서라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양은 죽기 때문이다.
잉글리시는 그의 저서 [영적 자유]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 예수님과, 관대하지 못한 우리 인간을 대비시키면서 주님의 자애로운 마음을 표현한다.
만약 우리가 백 마리의 양을 치는 양치기로서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공교롭게도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할 수 없이 양을 찾아 나서고 우여곡적 끝에 그 양이 가시덤불에 걸려서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것을 찾았다고 하자.
그래서 그 양을 빼내 돌아온다면 아마도 우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화풀이로 그놈을 발길로 걷어차며 올 것이다.
하지만 착한 목자는 양을 어깨에 메고 온다.
우리는 시편 23을 공부하면서 유비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유비 밖으로 나와서 이 시편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양이 목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의 험한 인생길에서도 양인 우리는 목자이신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이렇게 양의 목숨이 철저히 목자에게 의존되어 있기에 목자는 양을 자기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며 돌보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목자와 양으로 표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양들을 위한 목자의 헌신 때문이다.
목자가 양을 얼마나 성심껏 돌보는지는 양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날 알 수 있다.
어둡고 추운 밤, 황량한 광야에서 들짐승들이 울부짖으면 겁 많은 양들은 무서워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면 목자는 자지 않고 한 마리 한 마리 양들을 점검하고 살핀다.
나아가 일기 변화가 심한 광야에서는 태풍과 회오리바람이 불어오기 일쑤인데 그럼녀 양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면 목자는 양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안아 동굴 속에 안전하게 피신시킨다.
번개가 치고 태풍이 몰아쳐도 자기 생각은 하지 않고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모습은 가히 살신성인의 모습이다.
태풍이 휘몰아치는데 이리저리 흩어진 양들을 한 마리 한 마리 데려오려면 희생과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떼를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시는 주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 준다.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착한 목자의 모습 앞에서 잠시 목자, 또는 사목자라 불리는 사제들의 복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로만 칼라(Roman collar)를 착용한다.
로만 칼라를 한 신부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펭귄이 연상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에서는 사제 영명축일 때 심심치 않게 로만 칼라를 한 큰 펭귄 인형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럼 왜 신부들은 로만 칼라를 하는가?
그것은 펭귄의 삶이 희생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펭귄은 암놈이 알을 낳으면 (보통 두 알) 그 알을 품고 부화시키는 책임은 수놈에게 있다고 한다.
수놈 펭귄이 알을 품고 있는 동안 암놈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먼 바다로 사냥을 떠난다.
그 동안 수놈 펭귄은 알을 품고 40일 남짓 혹한과 눈보라에도 꼼짝 않고 서 있는다.
멋쟁이 신사처럼 보이던 검은 깃털이 다 빠지고 먹지 못해서 아사할 지경이 될 때야 새끼들이 태어난다.
그리고 사냥 나간 어미 펭귄이 뱃속에 먹이를 가득 채우고 돌아온다.
돌아온 어미 펭귄은 뱃속에 저장해 온 먹이들을 반추해서먹이는데 막 태어난 새끼들만 먹이고, 40일을 알을 품어준 아비 펭귄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어찌 암놈이 그렇게 무심할 수 있으랴 싶지만
동물의 세계는 일단 새끼가 태어나면 암놈은 수놈보다 새끼를 더 생각한다.
개도 새끼가 태어나면 암놈은 한동안 새끼를 돌보느라고 수놈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무튼 수놈은 새끼들이 어미 펭귄에게서 음식을 받아먹는 것을 바라만 보다가 기력이 다하여 나뒹굴다 때로는 죽는 놈도 있다고 한다.
펭귄 아비와 같은 존재가 바로 신부이다.
신부란 한자어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영적 아버지'란 뜻이다.
신부는 신자들의 아버지이다.
신자들을 섬기면서 매일같이 죽도록 불린 영적 아버지이다.
'어느 사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당 신부들의 주보 성인인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는 자신이 200명이나 되는 신자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늘 두려워 떨며 그들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했다.
신부들이 로만칼라를 하게 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펭귄의 모습을 닯은 것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신부가 착용하는 로만 칼라는 목자의 옷이다.
양들을 위해서 죽는 목자들이 입는 옷이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법복이다. 불교에서 법복은 깨달음과 자비의 옷이다.
곧 깨달음을 얻어 자비로운 삶을 실천하는 이들이 입는 옷이다.
교회는 신부들에게 깨달음과 자비의 사제가 되어
양들을 위해서 죽는 목자가 되도록 법복을 입힌 것이다.
에밀 브리에르는 양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하게 사는 사제, 환경이 요구하는 대로 기꺼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사제.
성령께 마음을 여는 사제. 주님 앞에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나서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묻는 사제. 이기적이지 않는 사제. 비평과 오해를 인내로써 마음에 새기는 사제 그리고 자기 연민 없이 서서히 그리스도께 백성을 데려가는 사제.
목양(牧羊)의 책임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베드로 사도는 다음처럼 사제의 깨달음과 자비의 모습을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잘 돌보되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진해서 하며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떼를 지배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목자의 으뜸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월계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1베드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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