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티나의 자연환경
시편 23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로 시작하여
"푸른 풀밭" 과 "물가"가 언급된다.
이 시편을 천천히 읊노라면
하얀 뭉개구름이 떠 있는 하늘 아래 푸르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고
양떼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는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이런 꿈 같은 모습은 현실 세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시편 23을 주로 장례식 때 부른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왜 이 시편을 장례미사 때 부르는 것일까?
우리의 삶은 늘 불안하고 위협받기에 이 세상에서 시편 23을 노래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지만 저 세상에서는 적당하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영혼은 더이상 눈물도 없고 한도 없고 고통도 없는 낙원으로 갔기에 실감나게 불러줄 수 있는 것이다.
돌아가신 영혼은 이제 하늘 나라에서 아빠 아버지 품에 안겨 편히 쉬고 있기에, "야훼는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쓴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래적 인생관이 아니라 현실적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더 이들이다.
그들의 꿈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가 많은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축복해 주고 편안히 죽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쓴 저자는 하늘 나라를 생각하면서 쓴 것도,
장례식에서 노래하라고 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이 시가 쓰여진 팔레스티나 지방의 환경을 생각한다면 시편 23은 장례식장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암송되고 불러져야 할 시이다.
왜냐하면 이 시는 생의 위험과 위협이라는 삶의 조건을 전제하고 쓰여진
어떤 것보다 현실적인 시이기 때문이다.
생의 위협은 그들이 살아가던 광야와 유목민이라는 삶의 조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대부분이 광야이다.
따라서 목동들이 양떼를 치는 곳도 푸른 풀밭이 아니라 광야이다.
모세가 양을 치다가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하느님을 만난 곳도 광야요(출애 3,1-2),
다윗이 양을 쳤던 곳도 광야이다(1사무 16,11참조).
성지를 순례하다보면 이러한 사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 지방까지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물도 없고 풀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양떼를 몰고 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목자들이 광야에서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야가 그들에게 삶의 기본요소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광야는 안정된 삶보다는 불안정과 변화가 계속되는 자리이다.
광야에서는 비가 쏟아지면 갑자기 길이 사라지고 급류가 쏟아지는 계곡으로 변해버린다. 또 사막에서는 바람이 불면 있던 구릉이 없어지고 없던 구릉이 생긴다.
팔레스티나의 지도를 보면 강을 표시하는 선이 점선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평지처럼 보이지만
비가 오면 물살이 센 계곡으로 변해버리는 와디(wadi)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을 순례할 때 광야에 가는 사람은 이 와디를 조심해야 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즉시 그곳을 떠나야 한다.
필자가 공부했던 로마 성서대학원 교수 한 분은 광야에서 고고학 탐사 도중 갑자기 내린 비로 인해서 지프와 함께 와디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이스라엘인들이 양을 치는 곳은 바로 이러한 광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곳에서 양떼를 칠 수 있을까?
양들은 날씨가 아주 덥지 않은 한 물을 마시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동물이다.
양들은 이슬만 먹어도 서너 달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광야에서 양을 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팔레스티나 광야는 바위가 많고 덤불이 많은 땅이다.
그런데 이 광야에 비가 내리면 순식간에 시냇물, 즉 와디가 흐르고 풀들이 자란다.
"소나기가 되어 풀밭을 적시고"(신명 32,2)란 표현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비가 내리는 겨울이면 푸른 풀들이 돋아나고,
또 비가 내리는 봄이면 풀 외에도 노란 들꽃들이 무수히 피어난다.
비오기 전 광야를 이글거리는 태양과 가시덤불로 표현할 수 있다면
비온 뒤의 광야는 푸른 풀과 노란 들꽃 그리고 흘러가는 시냇물로 표현할 수 있다.
정말이지 비온 뒤의 광야의 모습은 눈부실 정도로 찬란하다.
그렇기에 광야에서도 양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가 그치고 태양이 뜨면 와디는 즉시 마르고 풀과 꽃들은 시들어 버린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자주 "우리네 생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풀꽃 같은 인생"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시편 90,5-6; 102,4;103,15-16 참조)
이 풀꽃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 년생이나 한 계절 피는 그러한 풀꽃이 아니라 비가 그치고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하면 즉시 시들어 버리는 꽃들이다.
우리의 인생이 찰나적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또 성서에서 "주께서는 물이 마르다가도 흐르고, 흐르다가도 마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도랑같이 되셨습니다"(예례 15,18)라는 구저이나,
"주께서 강물들을 사막으로 바꾸시고, 샘구멍을 막아 마른 땅이 되게 하신다."
(시편 107,33)는 구절은 팔레스티나의 자연 환경을 그대로 반영시킨 표현이다.
비가 그치고 태양이 빛나면 다시금 생의 조건이 말살되어 버리는 자연환경 안에서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온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생의 조건이 적당히 결여되고 생의 위협도 적당히 느낀다면 인간은 알아서 그에 대한 강구책을 생각해 낼 것이다.
하지만 생의 조건이 철저히 결여되고 위협이 엄청나면, 그래서 인간적인 어떤 노력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절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얼마 전 물난리를 겪으면서 우리가 수도 없이 드렸던 기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뚫리기라도 한 양 엄청난 양의 폭우가 한순간에 쏟아져 내렸을 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을 들어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뿐이었다.
기우제를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지난 날 우리는, 도랑을 만들고 우물을 파는 등 물을 대기 위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다해도 가뭄이 깊어가고 논밭들이 쩍쩍 갈라지게 되면 우물을 파기 위해서 애쓰던 삽과 괭이를 버려두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생의 조건이 철저히 결여된 광야에서 양을 쳐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완전히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지가 이글이글 타고 샘이란 샘은 모두 말라버려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는 광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았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즉기 천지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이 볼 때 광야에 비가 내리고 풀꽃이 피이어나는 것은
순전히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 무조건적인 신뢰는
유한한 피조물이 깨쳐야 할 진리이다.
생의 위협 안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들만이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는 기도를 진심으로 바칠 수 있다.
빈손으로 살아가는 자들만이 하느님을 무조건 신뢰하며
이 시편으로 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인은 광야에서 자기들을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을 매일같이 체험하면서 살아가는데, 이러한 체험은 그들의 조상들이 시나이 광야에서 겪었던 역사적 체험과도 동일하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의 조상이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고 물이 없어 타던"
(신명 8,15) 시나이 광야를 40년간 헤매었을 때
누가 그들에게 마실 물을 주었고 먹을 음식을 주었던가?
마사다 광야에서 기갈을 견디지 못하여 울부짖었을 때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도록 하신 분이 누구인가? 또 그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신 분이 누구인가?
거기다 만나만 먹으면 영양실조에 걸릴까 봐 메추라기를 보내주신 분이 누구인가?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체험한 것은
매일같이 자기들을 돌보아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은 그들 안에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생겨나게 했고,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였다.
우리의 삶도 팔레스티나의 열악한 조건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가.
일상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어둠, 피곤함 그리고 불확실성이다.
우리도 이스라엘인들처럼 하느님에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 생의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느님임을 배워야 한다.
짤고 귀한 삶을 눈물과 한숨,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지내기보다는 우리 존재의 뿌리이며 생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매달려야 한다.
하느님께 절대적인 의존을 할 때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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