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우리는 심각한 상처와 사소한 상처가 어떤 것인가를 보면서
심각한 상처를 받았다면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사소한 상처라면 어떻게 해야 상처를 덜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상처는 인간에게서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도 받으며 산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라자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 11,1-44)
우리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우리 인간들에게 상처를 입히시는지를, 상처가 갖는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신다.
바로 이 점이 우리 인간에게 상처가 되는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오빠가 중병에 들었어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는지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오빠가 아프자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문제 없어. 우리는 예수님하고 친한 사이잖아.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빠가 병들었다는 소식만 알리면 돼. 그냥 <당신께서 사랑하는 이가 병들어 있습니다.>라고만 얘기하면 될 거야.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라자로의 병은 다 나았다!>라고 할 거고 그러면 오빠는 즉시 나을 거야.'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께서 오빠를 고쳐주실 것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점은 그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전하라고 한 말에서잘 나타난다.
"당신께서 사랑하는 이가 병들어 있습니다." (요한 11,3)
그들은 간청하는 말도, 고쳐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오빠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만을 전했다.
그들 사이에 굳이 고쳐 달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들은, 오빠가 아프다는 소식이 주님께 전해지는 순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라자로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었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라라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받으시고도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셨고
또 그들에게 오시지도 않았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병이 더 중해진 오빠를 보면서 이제나저제나
예수께서 오시기만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그리고 조금씩 원망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도대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께서 사랑하는 이가 병들어 있습니다." 라고만 해도
즉시 병을 낫게 해주시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뭔가.
결국 예수님은 오지 않았고, 그들의 오빠는 끝내 죽어버렸다.
오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마르타와 마리아의 실망, 절망,
그리고 배반감은 얼마나 컸을까?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여겼던 것은 착각이었던가?
요한복음 11장 5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라고 분명히 보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분명 그들을 사랑하셨다.
하지만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셨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라자로를 치유시키시지 않았으며, 끝내는 죽도록 내버려 두셨다.
예수께서는 왜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셨을까?
어떻게 마르타와 마리아가 받은 상처를 치유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이 이 책의 결론이 될 것이다.
누가 각 사람이 받고 있는 상처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아무리 심리학적. 인간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우리가 받은 상처를 설명한다 해도
결국 각자의 상처에 대한 답은 자신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주님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요한 11,3)
라고 하였을 때, '사랑한다'란 그리스어는 '필레오'이다.
한편 "예수는 마르타와 그녀 누이와 라자로를 사랑하였다." (요한 11,5)의
'사랑하다'의 그리스어는 '아가페'이다.
둘 다 우리말로는 '사랑하다'이지만 그 뜻은 다르다.
필레오가 형제적 사랑을 가리킨다면,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아가페이다.
아가페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서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예수께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에게 주신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는 다를 수 있다.
이 사랑은 우리 영혼을 돌보아 주는 사랑이다.
때로 아가페의 사랑이 필로스의 사랑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상처는 우리 심령을 더욱 정화시켜 주고 맑게 해주는 상처이다.
자문해 보자.
내 기억 가운데 가장 아픈 상처는 무엇인가?
내게 가장 많은 아픔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받은 상처에서 일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나에게 상처준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배운 내용들이 도움이 되었다면
이제는 실제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그 타는 요령을 설명하는 데는 일 분도 안 걸린다.
그러나 그 설명을 이해했다고 해서 즉시 능숙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넘어지면서 실수를 거듭한 뒤라야 자전거 타는 법을 체득하게 된다.
체득이란 몸으로 배운다는 의미다.
교육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새롭게 배운 지식들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 지식의 내용을 2백 번쯤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상처를 딛고 일어나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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