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감정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1)
병명이 무엇인지 모르면 치료할 수 없듯이, 마음의 상처의 치유도
그 상처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부정적 감정부터 먼저 파악하여야 한다.
통상 상처 안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들은
분노. 노여움. 적개심 같은 강한 감정들이기에
쉽게 감지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실상 강한 감정일수록 보기가 더 어려운 것은,
강한 감정일수록 그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나를 통제하고 있기에
잘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우리는 주로 지성만을 발달시켜왔고 마음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에 우리 안에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들을 파악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하루를 살면서 언제부터 우울해졌는지, 왜 우울해하는지, 언제부터 무기력에 빠졌는지, 왜 무기력에 빠지게 됐는지 잘 모른다.
상담을 하면서 자주 목격하는 것은, 상담을 하러 온 사람이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다가 상담자가 "참 힘드시겠군요." 라고 하면 주르륵 눈물을 흘린다는 점이다.
드 멜로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해하면서도 자기가 우울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다가 뒤늦게 기쁨을 누릴 때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우리는 그 동안 감정을 함부로 표현하는 것은 경박하고,
점잖치 못하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 대다수는 가져야 할 감정과 갖지 말아야 할 감정 목표록을 갖고 다닌다.
그래서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 생기면 즉시 억눌러 버린다.
"화를 내지 말아라." "소리를 지르지 말아라." "크게 웃지 말아라." "울면 안 된다"
이러한 감정들은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될 목록이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우리의 감정은 자신도 모르게 무뎌간다.
오랫동안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듯이, 감정도 표현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예로서 화나는 감정을 늘 억제하다 보면
나중에는 화가 난다는 것을 느끼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감정이 퇴화한다는 점은 캄보디아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훈 할머니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훈 할머니는 이국땅에서 오직 살아 남기 위해서 자신의 온갖 감정들을 억누르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슬픔도 외로움도 다 잊어버렸다.
또 살아 남기 위해서 고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모국어도 잊어버리고, 부모 형제 이름도 잊어버리고,
고향마저도 잊어버렸다.
훈 할머니 같은 비정상적 환경이 아닌 한,
우리는 감정을 파묻어 버리고 살아갈 수는 없다.
인간은 머리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단순히 심리적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본질이며 삶을 이루는 근본이다.
인간은 누군든지 감정의 사슬에서 풀려나야한다.
분노. 두려움. 슬픔. 후회의 감정에 젖어 사는 것은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쾌한 감정에 젖어 있으면 젖어 있을수록 쌓여가는 것은 원망뿐이요,
망가지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불쾌한 감정을 누르거나 처리하는데 에너지가 배로 소모된다.
슬픈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슬픔의 농도는 더욱 커져
나중에는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된다.
감정의 사슬에서 풀려나기 위한 몇 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첫째,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소한 감정, 유치한 감정일수록 더 신경을 쓰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이 있으면 그것을 억누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감정이란 꿈틀거리는 사자와 같아서 억누르면 억누를 수록 더 포효하게 된다.
감정이란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격해지고 끝내 폭발하고 만다.
감정의 불꽃은 대단한 것이다.
작은 불빛이 방안 전체를 밝히듯이 작은 감정의 불꽃이 내 마음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면 영원히 그런 부정적 감정에 지배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감정에는 윤리성이 없다.
윤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감정적 행동이다.
아무리 부정적인 감정이라 해도 거부하거나 구박하거나 죄스러움으로 끌어가지 않고 인정해주고, 귀한 손님을 모시듯이 소중하게 다루면 긍정적 힘이 될 수 있다.
때로 감정을 보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
예를 들어 보자.
한번은 드 멜로 신부가 동료 예수회원을 상담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대학에서 일하는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하급 직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번은 직원에게 폭행까지 행사해서 형사문제로까지 번질 뻔하였다.
드 멜로 신부는 그에게 "당신은 무엇인가를 내게 감추고 있는 것 같군요." 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화를 버럭 내면서 방을 나갔다.
그리고 한참 후 돌아와서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맞아요. 신부님, 저는 숨긴 게 있었어요. 그것은 제 자신에게도 숨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숨기고 있었던 것은 그가 잊고 싶었던 사실이었다.
그것은 어머니과 파출부로 하루 16시간씩 일하면서 자기를 키웠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말하고 나자 더이상 상담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상처는 이미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드 멜로 신부에 따르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아하!" 하는 체험이다.
자기 안에 도사린 감정들을 바르게 파악하고 "아하!" 할 수 있을 때 변화가 시작되고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배와 찬양에 바쳐지는 그 많은 시간들이 자기 이해에 쓰여진다면
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우리가 시간을 내어 자기 감정에 귀를 기울인다면
자신을위한 성장의 발걸음을 이미 내딛은 것이다.
하루를 살면서 가신의 감정을 투명하게 의식하고,
귀를 기울여 줄 때 우리 안에 있는 상처들은 치유되기 시작한다.
둘째, 파악된 감정을 표현하라.
표현하지 않고 쌓아놓은 감정은 훗날 정신질환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사랑과 추억(Prince of Tides)' 이란 영화가 있었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이 영화만큼 잘 보여주는 영화는 없을 것이다.
주인공이 13살 때, 근처 교도소에서 탈옥한 죄수들이 집에 들어와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주인공을 성폭행하였다.
이때 밖에서 돌아오던 형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고
엽총으로 죄수들을 쏴 죽인다.
그런 뒤 주인공의 가족들은 죄수들의 시체를 묻고, 벽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이런 일을 하는 도중 주인공의 어머니는 내내 자녀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나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세월이 흘러간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의 형은 자살을 했고
여동생도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하다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주인공은 착한 아내, 건강한 자녀들과 함께 살면서도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여
이혼 수속을 밟고 있었다.
13살 때 있었던 사건을 없었던 것으로 억누르면서,
부정적인 감정의 사슬에서 풀려나오지 못한 주인공과 그 가족들의 비극을
보여준 영화이다.
가끔 우리는 한없이 착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무척 착하고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갑작스레 화를 내는 것은
평소에 그들이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자기 안에 있는 불쾌한 감정들을 표현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놓다가 한꺼번에 터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소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만사가 순조롭다는 듯이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조심하여야 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가 두려워서,
마찰이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자기의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면 건강에 이롭다.
인간의 부정적 감정들은 하나하나 겉으로 표현하고 나면
그 고통이 한결 가벼워지게 되어 있다.
고통과 원한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누는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을 흘려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에는 솔직하여야 한다.
때로 우리는 자기 안의 부정적 감정을 정확히 보고 있으면서도 남에게 표현할 때에는
진짜 감정을 숨기고 다른 감정을 드러낸다.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자.
살아오면서 정말 화가 나는데도 웃은 적은 없었는지?
슬프고 마음이 아픈데도 실없는 농담을 한 적은 없는지?
마음으로는 깊이 후회하고 있으면서 남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 적은 없는지?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드러내는 감정표현을 보면 실제의 감정을 보여주기보다는
본심을 감추기 위해서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때가 많다.
예를 들면 툭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사람의 진짜 감정은 분노가 아닐 수 있다.
자신의 두려움이나 슬픔, 후회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화를 냄으로써 위장하는 것이다.
잘 우는 사람들도 진짜 감정은 슬픔이 아닐 수 있다.
가슴속은 분노로 끓고 있지만 화를 낼 용기가 없어 대신 눈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 표현이 파괴적이어서는 안 된다.
기분이 언짢거나 실망하고 있거나 화가 났을 때
그것을 품위있게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 표현이 파괴적이라는 것은 야비한 말만 골라서 한다든가,
상대를 비난한다든가 부정적인 감정을 아무데서나 충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는 것도 나쁘지만
감정을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터뜨리는 것도 나쁘다.
감정 표현이 파괴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나 - 전달법'을 쓰면 좋다.
이것은 현실 요법에서 주창한 이론인데,
감정을 표현할 때 '너- 때문에'란 측면에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그것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몰아붙이거나 환경 탓으로 돌리기 쉽다.
또 문제가 해결되려면 내가 아닌 상대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탁구공을 주고받는 것과 같은 대화가 되기 쉽다.
남편이 공을 치면 아내가 받아 치고, 아내가 공을 치면 남편이 받아 넘기는 식이다.
둘 사이 관계가 끊임없이 공격과 방어로 이어지면서 '심리적 게임'을 하는 것이다.
심리적 개임이란,
관계에서 묵시적 지불을 하게 되는 상황이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생기는 것을 말한다.
심리적 게임의 하나는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식이다.
심리적 게임은 순환적이고 반복적이다.
심리적 게임을 중단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게임을 그만두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나는 더 이상 이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아." 하면서 일어나면
그 게임은 중단된다.
'너 때문에'란 표현을 쓰지 않고 우리 안의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나 - 전달법'을 쓰면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친구가 지난 번에 약속에 늦더니 이번에도 늦었다고 가정하자.
그때 "야, 너 지난번에도 늦더니 오늘도 늦게 오면 어떡하냐?" 라고 했다면
이것은 적절한 감정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벌써 두 번째나 기다리게 되니까, 시간도 아깝고, 얼마나 화나는지 몰라." 라고 표현한다면 이것은 적절한 감정 표현이다.
효과적인 '나 - 전달법'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① 나를 괴롭히는 상대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② 상대의 행동이 나에게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을 설명한다.
③ 그 영향으로 인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다.
앞서 언급한 예문을 갖고 분석하면
"벌써 두 번째나 기다리게 되니까" (상대방의 행동),
"시간도 아깝고" (나에게 미치는 영향)
"얼마나 화가 나는지 몰라" (느끼는 감정) 가 된다.
부정적 감정의 표현과 관련해서 특별히 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많은 사람이 생각 외로 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먼저 친밀한 관계 안에서 화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만약 내가 화를 내면,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우정이나 친밀한 관계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관계라면 그것을 과연 참 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친구나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 화가 났을 때 그 화를 솔직히 표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뒤에서 그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거나
엉뚱하게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이다.
오늘날 많은 가정과 결혼생활이 폭력보다는 대화 단절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문제가정 중 태반은 폭력이 아닌 침묵에서 관계가 죽어가고 있다.
화를 표현하는 가정에서는 최소한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는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화가 끊어진 부부관계에서는 상대의 내면세계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관계를 개선할 수도 없다.
입을 닫아버리고 대화를 하지 않는 행위는 화를 억누를 때 보여지는 전형적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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