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스크랩] 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야훼는 나의 목자

김레지나 2011. 1. 12. 23:26

시편 23의 주석학적. 인간학적 이해

 

야훼는 나의 목자 (1)

 

시편 23은 야훼 하느님을 목자(牧者)로, 인간을 그분의 양떼로 묘사한다.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가 목자와 양이다.

족장 야곱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나의 목자"(창세 48,15)로 부른 이래 여러 예언자들과 시편 저자들은 하느님을 목자로, 인간을 양으로 불러왔다.

 

<예>

- "우리는 당신의 백성, 당신 목장의 양떼, 세세대대 영원토록 찬양 노래

   부르오리다" (시편 79,13)

- "이스라엘의 목자여, 요셉 가문을 양떼처럼 인도하시는 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80,1)

- "그가 우리를 내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 그의 백성, 그가 기르시는 양떼들이다."

   (시편 100,3)

- 이밖에 창세 49,24; 호세 4,16; 예레 31,10; 이사 40,11; 에제 34,11-16;

   시편 28,9; 77,20; 78,52

 

하느님을 목자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위와 자비로운 통치를 나타낸다.

이점을 에제키엘 예언자가 잘 보여준다.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

    양떼가 마구 흩어지는 날 목자가 제 양떼를 돌보듯이,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

    먹구름이 덮여 어두울지라도 사방 흩어진 곳에서 찾아오리라.

    ....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 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에제 34,11-16)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목자로 불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양떼로 불린다.

나아가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착한 목자라 칭하신다.

 

<예>

-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마태 9,36-37);

- "내 어린 양떼들아, 조금도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루가 12,32)

-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마태 26,31)

   "영원한 계약의 피를 흘려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은 평화의 하느님이십니다." (히브 13,20)

- "여러분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1베드 2,25)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목자라고, 그것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요한 10,11-15)

 

때로 학자들은 '착한'이란 말 대신에 '아름다운'이란 말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리스어로는 '착한' '아름다운'이란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다. 여기서는 전통적인 해석을 따라서 '착한 목자'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이 윤리적 도덕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도덕적으로 흠없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착한 목자인 것은 도덕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희생적 사랑 때문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라는 말씀은 양들의 구원에 목자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양들의 구원이 착한 목자의 죽음을 통해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서 수고는 하지만 양들을 위해 죽기까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양들에게 먹이를 주고, 들짐승에게서 양들을 보호해 주지만 이러한 그들의 소임이 주님께서 당신 양들을 위해 주근 것과 비교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유일한 착한 목자이지 여러 명의 착한 목자 중의 하나가 아닌 것이다.

 

목자와 양떼의 관계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은 백성과 그 백성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관계가 목자와 양으로 제시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목자와 양, 목자의 임무와 양의 속성을 알 필요가 있다.

시편 23을 쓴 이는 다윗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목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젊은 시절 양을 키우며 살았던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도 목자와 양의 사이를 잘 알고 있던 다윗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라고 노래하면서 자신이 목자로서 양들을 돌보았을 때의 체험을 상기했을 것이다.

 

다윗이 하느님을 목자로, 인간을 양으로 표현한 것은 목자와 양은 깊은 인식과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목자와 양의 관계는 상호간의 깊은 인식에서 이루어진다.

목자는 양들 하나하나를 알고 있고 그 각각의 특성까지도 알고 있다.

우리같이 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의 보기에는 다 그놈이 그놈처럼 보이지만

목자의 눈에는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구별되어 보인다.

목자는 어느 양이 아파서 비실대는지, 어느 양이 거센지, 어느 양이 항시 딴 길로 빠져 나가 애를 먹이는지 그 습성을 다 파악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점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요한 10,14)

여기서 '안다'란 히브리어 동사 야다(yada)는 우리가 통상 이해하고 있는 '안다'와 다르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더불어 정을 통해 안다'라는 뜻이다.

정신적인 일치와 더불어 성적인 일치를 의미할 때 야다라는 말을 쓴다.

이 단어는 다음 말의 '안다'의 뜻과 흡사하다고 보면 된다.

"어려서부터 이성을 너무 빨리 알면 안 되지." 또는

"어려서부터 너무 빨리 세상을 알면 안 되지"의 '안다'이다.

그러니 예수께서 "나는 내 양들을 안다는 것은 당신이 우리를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특성들, 긍정적. 부정적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정적인 모습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로아 주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께서 헤매고 길 잃은 양을 찾아오고, 상처입은 양을 싸매주고, 아픈 양은 잘 보살펴 준다고 했듯이 (에제 34,11-16)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보아 주시며 선을 이루신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있다" (요한 10,14)고 확언하신 예수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알고 계시다.

 

미국 성령기도회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계시의 은사를 받은 한 연사가 주님께 메시지를 받고 참석자들을 향해 말하였다.

"로리, 주님은 그대의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한 젊은 여인은 그 순간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루만져 주시는 것을 느꼈다. 로리는 그녀의 어릴 적 이름이었다.

아주 옛날 그녀가 어린아이였을 때 들어보고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로리와 그녀의 남편은 얼마 전부터 아기를 입양하고 싶어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날 성령기도회에서 주님의 어루만지심을 체험한 로리가 집으로 돌아오니 전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입양기관에서 남긴 것으로서 아기를 위한 수속이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의 이름, 어린 시절의 이름까지도 알고 계시다.

 

 

 

 

출처 : 퍼렁별나라공쥬님의 블로그
글쓴이 : 찬미예수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