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2)
(2) 추측하지 마라
우리는 자주 상황을 내 마음대로 추측하여 상대방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추측하면서 상대방과 상황을 내 멋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예민한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아는 척하지 않거나
평소와 달리 서둘러 인사하면서 지나가 버리면 마음이 어두워진다.
상대방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자기에게 화가 난 것으로 판단해 버리고
상처를 입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그러한 상처를 준 상대방에 대해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아
마음속으로 비난한다.
이러한 우리 마음속 태도는 암암리에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심한 경우 반목까지 한다.
추측에서 나온 일방적인 판단이 치밀했던 관계를 얼마나 파괴시키며
또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다음의 상담 케이스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예수회 신부요, 심리학자인 존 포웰이
한번은 관계가 악화되어 찾아온 한 부인과 그의 딸을 상담하게 되었다.
상담을 하면서 보니 문제의 원인은 너무나도 한심한 것이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자녀들 앞에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본 사춘기의 딸은 혼자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다.'
고 단정했다. 그리고 엄마가 다른 애인을 사귀고 있다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오랫동안 엄마를 미워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을 잃어 고통스러운데 사사건건 대들고 반항하니
엄마 역시 딸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인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자기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남편이 죽기 전에 저는 남편 앞에서 약속했습니다. 남편 몫까지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고.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울지 않겠다고. 남편이 세상을 편히 떠나도록 이를 악물고 강한 모습을 보이겠다고. 그래서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아이들에게, 아빠는 천국에 갔으며 죽음은 슬픈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딸은 엄마가 울지 않았다는 사실을 엉뚱한 방향으로 추측하면서 엄마를 단죄했던 것이다.
만일 딸이 엄마에게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슬프지 않아? 왜 눈물을 흘리지 않아?" 하고 한 번만 물었더라면 그런 오해는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딸은 엄마의 고결한 뜻을 알고서 엄마를 더욱 사랑하고 신뢰했을 것이다.
왜 개와 고양이는 앙숙인가?
그것은 서로간에 감정 표시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치켜들고 살랑살랑 흔들어 대지만
기분이 언짢으면 꼬리를 늘어뜨린다.
그러나 고양이는 그 반대이다.
기분이 좋을 때는 꼬리를 내리고 성이 나면 꼬리를 세운다.
이렇게 감정 표현이 정반대이니 개와 고양이는 만나면 서로 싸울 수밖에 없다.
개가 고양이를 만나면 개는 반갑다고 꼬리를 쳐들고서 흔드는데,
고양이는 개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저 녀석이 나를 보고 기분이 나쁘구나.
꼬리를 저렇게 세우고 있으니.' 하고 생각한다.
한편 고양이가 개를 만났을 때 고양이는 반갑다는 뜻에서 꼬리를 늘어뜨리는데,
이 모양을 본 개는 '저 녀석이 나를 보더니 기분이 나쁘구나. 저렇게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으니.' 하며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서로가 자기 식으로 추측. 해석하면서 감정이 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이들을 오해하고 멋대로 판단하고 상처받고 있는가.
인류의 대표적 스승이라 불리는 공자님도 일순간 가질 수도 있었던,
그래서 남을 오해할 수도 있었던 추측 사건을 들어보자.
안회는 공자님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한번은 공자님이 안회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하룻길을 걸어 저녁 시간 숙소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무척이나 허기지고 피곤했다.
안회는 부엌에 들어가 서둘러 저녁을 준비했고,
공자님은 식가가 준비될 때까지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열린 부엌문 사이로 안회가 밥을 떠먹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공자님은 즉시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감히 제자가 스승보다 먼저 밥을 먹다니. 더구나 내가 가장 아끼는 안회가 저런 짓을 하다니. 이것은 진정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안회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니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사연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안회가 상을 차려오자 넌지시 말했다.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꾸나."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음식에 인간이 먼저 손을 대서는 안 되기에 이 점을 이용해
안회의 마음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스승의 제안에 안회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제가 이미 손을 대었기 때문에 이 음식으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밥이 다 되었나 보려고 뚜껑을 열었는데 바로 그 순간 하루살이 하나가 날아들어 밥 위에 앉았습니다. 제가 그것을 버리기 아까워 먹어버렸습니다."
만일 공자님이 사연도 알아보지 않고, 자신의 추측대로 안회를 판단하여
'이제부터 안회는 내 제자가 아니다.' 하며 차갑게 대했다면,
안회는 스승이 무슨 이유로 자기를 멀리하는지도 모른 채 억울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의도를 추측할 때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한 친구가 늦게 오면, '그 애가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겼나 보다'
라고 생각하기보다 '얘는 늘 이렇게 늦는다니까' 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이들을 멋대로 오해하고 추측하고 판단하는지 모른다.
'이 녀석은 멍청하고, 저 녀석은 바보고, 이 남자는 무례하고, 저 여자는 교만하기 이를데 없다.' 라면서 상대방을 쉽사리 판단하는 일이 많다.
이것이 우리와 상대방이 서로 다른유형의 사람임을 고려하지 않을 때 쉽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내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것은 많은 경우 나와 그 사람 사이의 행동양식이나
인지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이다.
예를 들면 방안이 어지럽혀져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먼지 한 점 없게 쓸고 닦는 사람이 있다.
밥을 먹고 나서 즉시 설거지를 하지 않고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밥 먹자마자 즉시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다음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서로가 다른 행동양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편이 다른 편을 비난하거나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상황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행동할 뿐,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니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치 않고,
내 입장에서만 추측하고 판단하고 상처받는다면 그 상처는 내가 자초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용서는 나와 타인의 서로 다른 행동양식과 인지구조를
인정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인디언 속담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의 행동양식과 인지구조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아야 한다."
남의 신을 신고 1마일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1마일을 갈 수 있다면 우리는
내 자신의 가치기준과 행동양식과 전혀 다르게 행동했던 상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3) 인정과 애정을 구하지 마라
우리에게는 한 가지 환상이 따라다닌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이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존경받고, 인정받고, 귀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적 경향이라고 간주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남의 인정을 받는 것을 본성적으로 원하는 걸까?
아니다.
자기 마음에다 대고 가만히 물어보라.
그리고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인가? 남들의 존경인가?'
그리고 어떠한 느낌이 오는가 점검해 보라.
만약 가슴을 따스하게 해주는 느낌이 온다면 그것은 영혼의 느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의 느낌이다.
곧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이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이다.
언제 주님께서 우리가 남들로부터 인정 받아야만 살 수 있다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고 싶어하신 것은 자유이다.
죄에서 자유롭고, 죽음에서 자유롭고,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신 것은, 불교 언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무애진인(無碍眞人)이 되어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진실된 인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마음, 자유로운 삶이지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정과 애정이 없이는 결코 살 수 없다는 환상을 지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사랑과 인정을 필사적으로 추구한다.
상처를 받아도 좋고 병에 걸려도 좋으니
남의 인정과 사랑, 관심만 받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어려서 가족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상기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느 이비인후과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꼬마가 중이염을 치료받기 위해 엄마와 함께 병원에 왔다.
그 아이 엄마는 의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의사 선생님, 얘가 겨울방학 끝내면서 방학숙제로 쓴 일기를 제출했는데
거기에다 겨울방학 동안 가장 즐거웠던 일은 중이염에 걸린 것이라고 썼다지 뭐예요."
이 말은 들은 의사가 아이에게 "왜 아픈 것이 가장 즐거웠지?" 하고 묻자
아이는 "제가 아프니까 온 가족이, 특히 엄마가 저를 위해주고 또 의사 선생님도 저에게 친절하게 해주었으니까요."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 생각에는, 겨울방학 동안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스케읻트도 타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 꼬마는 중이염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이 더 행복했던 것이다.
위의 사례는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다른이들의 인정과 관심 그리고 애정을 갈구하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받고 싶을 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우리는 마음의 병을 앓는다.
많은 사람들이 홀로 서 있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 애를 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린다고 해서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로움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 갈 뿐이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피곤하고, 그렇다고 혼자 있으면 외롭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성이다가 상처만 받는 것이다.
생에 대해서 염세주의적 시각을 가졌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관계를 고슴도치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한 쌍이 어찌나 추운지
서로의 몸을 붙여서라도 몸을 따스하게 하려 하였다.
그런데 서로 몸을 붙이려 할 때마다 가시에 찔려 몹시 아팠다.
그렇다고 서로 떨어져 있으려니 매서운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서로 몸을 붙이려 했지만 또다시 가시에 찔려 피가 났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서로 떨여져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만 했다.
우리의 인간관계도 그와 비슷하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쓸쓸하고, 가까이 가면 상처를 받는 관계.
친하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가 아는 사람을 타인에게 소개할 때
그 사람이 자기와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를 강조한다.
이렇게 친한 것을 강조하는 이들치고 상처를 입지 않은 이가 없다.
앞서 얘기했지만 친밀함은 곧 상처가 자라나는 상처의 텃밭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가까움과 친밀함을 바라지 않는다.'
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별해야 한다.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아쉬워한다는 것이요,
고독하다는 것은 사람을 아쉬워하기보다는 홀로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고독이란 자신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공간이다.
왜 주님은 자주 외딴 곳으로 물러나 기도하셨는가?
왜 많은 교부가 사막에서 구도의 삶을 살았는가?
왜 많은 성직자, 수도자가 일 년에 한 번은 대침묵 속에서 피정하는가?
이들이 일부러 고독을 택하는 것은
고독이 자기 반성과 성장의 시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은 사람들과 격리되어 홀로 있는 만큼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애정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환상을 깨자고 말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정과 애정 자체를 아예 요구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짝사랑을 하는 것은 내 자유지만 상대방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인정과 사랑은 상대방이 주면 받을 뿐이지 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 남이 주었다 말았다 하는 것에 목을 매는가?
남들의 변덕스런 판단에 왜 자기 가치를 내맡기는가?
왜 남들이 멸시하면 스스로 못났나도 여기고, 남들이 비난하면 스스로를 무용지물로 간주하면서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판단하는 이웃에게 맡기는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며 사는 것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살아가는 자유인한테는 맞지 않다.
나는 고독한 날을 좋아하네.
그날은 나에게 진정으로
하느님만을 바라볼 기회를 주네.
- 에이미 그란트
'강론 말씀 (가나다순) > 송봉모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5.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4) (0) | 2011.01.12 |
---|---|
[스크랩] 5.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3) (0) | 2011.01.12 |
[스크랩] 5.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1) (0) | 2011.01.12 |
[스크랩] 4. 용서하기 위하여 (1) (0) | 2011.01.12 |
[스크랩] 3.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 (0) | 2011.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