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스크랩] 4. 용서하기 위하여 (1)

김레지나 2011. 1. 12. 23:21

4. 용서하기 위하여 (1)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심이 필요하고, 그 다음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지상명령인 용서를 진심으로 실천하고 싶지만 감정적 어려움 때문에 실행하기 어렵다면 먼저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하여야 한다.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내리는 그 순간부터 용서는 시작된다.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종교적 행위로서는 가능하다.

용서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의지이다.

주님의 지상명령이기에 용서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이다.

 

나는 대학시절 인종이란 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다.

인종이는 신앙심이 깊고 착실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고3 때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불량배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다.

인종이의 부모님 역시 열심한 신자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안 가해자 학생들의 부모들은 여러 차례 인종이 부모님을 찾아와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인종이 부모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학생들을 용서하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하였다.

그때 인종이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나는 절대로 당신들의 아이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인종이 부모님께서는 정말 하기 어려운 용서를 신앙행위로서 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용서를 하고 나서 서서히 아들을 잃은 상처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여야 한다.

인종이 어머님이 하신, "나는 절대로 당신들의 아이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은 참으로 솔직한 말이다.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니 용서를 결심한 뒤에는 하느님께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상처에 대한 아픔을 잊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여야 한다.

응어리진 마음이 하느님의 자비로 대치되고,

좁은 이해심이 하느님의 관대함으로 대치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여야 한다.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결심이 필요하고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용서해야할 사람의 명단을 작성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또 용서하기가 힘들다고 느낀다면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를 천천히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주님의 기도' 만큼 간결하면서도 의미 깊게 용서를 가르쳐 주는 기도문은 없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처가 치유되느냐 안 되느냐의 열쇠가 바로 나에게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를 치유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평생 상처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내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과 하느님뿐이다.

내가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서 일어서는 것이다.

상대가 변화되어야만, 현실이 바뀌어야만,

내 상처가 낫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우리에게 상처준 사람은 분명 있지만 근본적으로 치유되려면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내 상처, 내 아픔은 누구의 잘못도, 누구의 죄도 아니다.

그러니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일어설 필요도, 또 누가 나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1950년대, 2차세계대전의 여파로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유럽인들을

노래로써 위로한 유명한 샹송가수가 있었다.

뤼시앵 뒤발이라는 예수회 신부였다.

그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그가 한 해 받아오는 공연료와 그가 속한 프랑스 관구 전체 예수회원이 받아오는 총 사례금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가 받아오는 돈이 다른 신부들의 수입 전체의 몇 배나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가 속한 공동체 원장 신부님은 저녁마다 냉장고에 포도주와 맥주병이 몇 개 남아 있는지 확인하였다.

때로는 뒤발 신부가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냉장고를 자물쇠로 채워놓기도 하였다.

뒤발 신부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수없이 결심했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 냉장고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부끄러워 발걸음을 돌리지만 한편으로 밀려드는 느낌은 '나는 그렇고 그런 놈이 아닌가.' 라는 자괴감이었다.

'술을 먹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이미 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옛날인데, 이제 와서 방으로 간다고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 다시 냉장고 문을 열고 술병을 꺼내 술병 뚜껑을 땄다.

그리고 원장 신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만 마셨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닫고 가려고 하다가 다시 '이미 버린 몸, 이제 와서 아껴봤자 뭐 하랴.'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몰려와 냉장고 안에 있는 술이란 술은 밤새 다 마셔버렸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뒤발 신부는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다. 다행히 뒤발 신부와 친한 동창 신부가 그를 죽음에서 건져낸다.

 

뒤발 신부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 나이에 이르러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는 뤼시앵 뒤발이고 알코올 중독자란 사실입니다."

 

뒤발 신부는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왜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 어떤 상처들이 있어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맨 처음 머리에 떠오른 사람들은 수도회 장상들과 동료 신부들이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뒤발 신부의 공연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게시판에 초청장을 붙여놓아도 오는 사람이 있기는커녕,

공연이 끝나고 공동체에 돌아와도 누구하나 관심을 갖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장상이나 동료 신부들은 '수도자가 무슨 딴따라야?' 하는 비난의 눈초리로만 볼 뿐이었다.

 

이어서 밀려온 아픔은 '수도자는 청빈을 살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자동차를 사주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엠프니 기타니 하는 수많은 악기를 오토바이에 실어 날라야 했다.

그가 공연 수입으로 갖고 오는 돈은 엄청났지만 수도회는 수입금만 챙길 뿐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은 것이었다.

 

뒤발 신부는 이런 식으로 수도회 장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린 시절까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사건들을 돌아보았다.

어린 시절 그가 받았던 가장 큰 상처는, 오랫동안 모은 돈으로 아코디언을 사러 갔는데,

가게 주인이 그에게 고물 아코디언을 속여 판 것이었다.

 

이렇게 상처를 더듬는 가운데 뒤발 신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은 누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때문도,

그 누구의 잘못 때문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누구의 도움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홀로 일어서야 하며

자신만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데이비스 A. 시멘스는,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든 그 상처의 궁극적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은 마치 베틀로 짜여진 복잡한 무늬의 융단과 같다.

유전적인 요소, 환경적인 요소, 어렸을 때의 경험,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 친구로부터 받은 영향, 인생의 모든 장애물들,

이 모두가 베틀의 씨줄이 되고 그 위를 당신이 날줄이 되어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베틀이 왔다갔다하면서 당신의 반응에 따라서 인생이라는 융단이 짜여지게 된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그치고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기 전까지는

당신의 손상된 감정을 절대로 치료받지 못할 것이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나를 아프게 한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고통스런 기억이 사라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건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니만큼

내게 상처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용서에 큰 도움이 된다.

그 사람의 성장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가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서 이해하면 할수록 용서는 쉬워진다.

용서한다는 것은 관계를 깨뜨린 상대방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받아들인다는 것은 베푸는 행위이다.

관계의 틈이 벌어졌을 때 회복을 위해 베풂의 행위를 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용서의 시작일 뿐 아니라 용서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해하고 이해했음을 보여줄 때 우리는 상대를 용서할 수 있고,

벌어졌던 관계는 호전될 수 있다.

우리는 이해하며 깨닫는다.

우리가 이해할 때

자비심을 갖게 되며 자연히 고통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음악가 리스트가 어느 도시에 머물게 되었다.

호텔 로비에는 연주회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여주자의 약력을 보니 리스트의 문하생이라고 씌어 있었다.

리스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이름의 제자는 기억나지 않았다.

한편 그 무명의 연주자의 귀에 리스트가 그 도시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연주자는 창백한 얼굴로 리스트를 찾아와 떨리는 목소리로 용서를 청하였다.

"저는 생계 유지조차 어려울 만큼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연주 실력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라고 하면 레슨을 받으러 오는 학생들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음학회는 당장 취소하겠습니다."

이러한 사과의 말을 들은 리스트는 그 연주자에게 그 자리에서 한번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피아노를 치고 나자 리스트는 여기저기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말하였다. "당신은 이제 내 제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가서 스승도 찬조출연할 것이라고 말하시오. 하지만 당신이 내 제자라고 거짓 선전한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출처 : 퍼렁별나라공쥬님의 블로그
글쓴이 : 찬미예수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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