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1)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얘기한 상처는 '진짜 상처'이다.
진짜 상처와 사소한 상처는 구분되어야 한다.
진짜 상처라면 우리는 미움의 악순환이라는 운동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사소한 상처라면
그러한 상처를 자초한 우리의 미성숙한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진짜 상처를 받았다면 용서해야 될 대상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상대방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소한 상처라면 용서해야 될 대상은 상대방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사소한 상처에서 해방되고 또 사소한 상처를 다시 자초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해결책들을 제시해 본다.
(1) 기대하지 말라
상대방이 어머니처럼 나를 돌보아 주고 헤아려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버려라.
기대한다는 것은 곧 실망하고 상처받겠다는 것이다.
기대는 안개와 같다.
안개는 있지만 만져지지는 않는다.
기대는 우리를 속이고 헤매게 만든다.
기대는 우리 마음을 멍들게 하고 관계를 파괴시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방문 앞에 이런 팻말을 붙였다고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는 관계를 멍들게 할 뿐 아니라 그 관계조차 즐기지 못하게 만든다.예를 들어 부모는 자녀가 아기일 때 하루빨리 똥오줌을 가리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끝나면 어서 커서 학교에 들어가기를 기대하고,
사춘기가 되면 어서 그 기간이 끝나기를 기대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면 좀 더 나은 대학에 가주기를,
그 다음에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기를,
그 다음에는 좋은 배우자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부모들은 그게 무슨 잘못인가 하면서 의아해할 수 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당연히 걸 수 있는 기대가 아닌가.
물론 잘못은 아니다. 다만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끝없는 기대 속에 자녀의 미래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자녀의 미래만 바라보는 부모는 이 순간 자녀와 함께하는 관계를 즐기지 못한다.
자녀가 거치는 모든 단계를 함께하면서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갓난아기 때는 갓난아기로서의 자녀를,
학창시절에는 성장해 가는 아이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다.
부부 사이에서조차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정다웠던 부부 사이가 소원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뿐이다.
자녀에게조차도 기대를 걸지 말자.
우리가 자녀에게 바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대가 아니라 희망이다.
내 자녀가 훗날 커서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기대를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부모가 펴보지 못한 바람이나 억눌린 욕구를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녀에게 희망을 갖는 부모는 자녀의 재능과 꿈을 먼저 헤아려 주며
자녀의 생이 완성되고 선이 자라기만을 바란다.
자식이든, 친지든, 친구이든,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상처받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얼마나 쉽게 배신감이나 섭섭함을 느끼는가.
며칠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한 통 없고, 편지 하나 없으면
우리는 우울해한다.
챙겨줄 만한 사람들이 명절이 가까이 오는데도 선물 하나 하지 않는다든가,
주말이 다가오는데도 아무도 함께 놀러 가자고 초대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은 우울하고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상대에게 베풀어 준 것들과
상대방이 나에게 한 태도들을 비교해 보게 된다.
'왜 내가 항상 먼저 전화를 해야 하는가? 먼저 좀 전화해 주면 안 되나?'
'지난 번 그 집 딸 생일날에 나는 얼마짜리 생일 선물을 했었는데 내 딸 생일날엔 겨우 이런 것을 주다니.' 등..
한국에서 오랫동안 산 한 외국인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보상심리가 무척 강하다고 한다.
작은 친절을 베풀면 꼭 무엇인가 보답이 오기를 기대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섭섭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베푼 친절을 헤아리며 그 친절에 대한 보답 행위를 바라는 사람은
많은 경우 자기 존경심이 낮으면서 동시에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다.
또 한 가지는, 한국인은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주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을 갚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어머니처럼 헤아려 주기를 바라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친구나 친지들을 자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리한다.
수많은 추측을 하면서 상대방을 이러저리 비판. 비난하지만
그러면서 그의 자존심은 더욱 상하게 되고 기분은 더욱 암울해진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지는 만큼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뜻없이 한
사소한 행위들에서도 상처를 받는다.
별것 아닌 것 갖고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멀리한다고 간주한다.
그리하여 더 깊은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된다.
이른바 거부당함과 배신감이라는 악순환을 겪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모든 섭섭함들은
상대가 나를 어머니처럼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받은 상처들을 낫게 하려면 남이 아니라 나를 용서해야 한다.
사소한 상처는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우리 자신의 피붙이로부터 오는 경우가 흔하다.
왜 사랑과 격노는 서로 얽혀 있는가?
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분노하게 만들고 화나게 하는가?
"분노는 본시 친밀함을 먹고 자라고 번성한다."고 하듯
피붙이만큼 친밀한 사이가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친밀한 사이이기에 그만큼 기대하는 바가 크고,
기대가 크기에 상처도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머니처럼 헤아려 주기를 바라면서 받게 되는 사소한 상처들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많이 발견된다.
여성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기가 갖고 있는 사랑ㅇ르 퍼주고 싶어 애를 쓴다.
상대가 도움을 청하지 않았어도 섬세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호의를 상대에게 베푼다.
이러한 사람이 받게 되는 사소한 상처는 어떤 것일까?
'지금까지 나는 너를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는데 왜 너는 그렇게 베푸는 데 인색한가? 나는 지금 이러이러한 도움이 필요한데 그것을 꼭 내 입으로 말해야 된다는 말인가? 좀 알아서 해줄 수는 없단 말인가?'
존 그레이 박사에 따르면, 많은 여성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을 해서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그 행위는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엎드려 절받기라고 생각한다.
또는 잔소리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해준 것으로 간주한다.
상대방이 어머니처럼 알아서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은 경우 마음이 부글부글 끓을 때가 되어서야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한다.
상대방이 해주기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할 수 없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니
그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원망이 가득 쌓여서 도움을 청하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강요하는 식으로 변한다.
상대에 대한 비난과 판단을 담고 명령조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가 미리미리 헤아려서 나를 돌보아 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무리한 바람이다.
내가 바라는 것을 입으로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엎드려 절받기가 아니요,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다.
더이상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식의 행위를 하지 말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분명히 청할 필요가 있다.
많은 여성들은 결혼 기념일과 관계해서 상처를 입는다.
둘이 서로 죽네 사네 사랑하다 결혼을 했건만
그 신성한 기념일을 챙기는 사람은 대부분 아내 편이다.
결혼 기념일이 가가이 오면 아내는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줄 선물도 마련하고
애정이 가득 담긴 카드도 쓰지만, 남편은 꽃다발은커녕 기억조차 못 한다.
그리하여 그 좋은 날 아내는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다음해 결혼 기념일이 가까이 오면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어디, 올해도 결혼 기념일을 잊기만 해봐라.' 하며 벼른다.
결혼 기념일같이 중요한 날을 잊어버리는 남성도 문제지만,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기대만 하는 여성도 문제이다.
여성들만큼 섬세하지도 낭만적이지도 못한 남성들은 일 속에 빠져들면
결혼기념일이라 해도 기억을 못할 수가 있다.
그러니 다가오는 결혼 기념일을 헤아리면서 화를 쌓기보다는
미리 남편에게 알려주는 것이 좋다.
원한다면 결혼 기념일 한 주 전, 아니 한 달 전부터 남편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
말하는 것이 자존심이 덜 상한다.
그래도 말하는 것이 엎드려 절받기라 생각한다면
달력에다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 표를 해 놓아라.
그래도 안 될 것 같으면 동그라미 옆에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별표 표시도 해 놓아라.
그러면 남편이 물을 것이다.
이날이 무슨 날이기에 이렇게 강조해서 표시했냐고?
아니, 그때쯤 되면 아무리 무심한 남편이라 해도
그날이 무슨 날인지 즉시 기억할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상대에게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임을 믿기에
솔직하게 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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