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스크랩]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것들 (3)

김레지나 2011. 1. 12. 23:13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것들 (3)

 

쫓기듯이 살지 말 것

 

지금 우리는 어떤 것들을 물리쳐야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일을 염려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걱정에 사로잡힌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쫓기듯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걱정과 분주함은 우리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물리치고 거듭 훈련해야 할 것들이다.

 

우리 모두는 마리아처럼 살고 싶어한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사랑의 눈길로 쳐다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르타처럼 살아야 한다.

마르타처럼 먹고 살기 위해 분주하게 일해야 한다.

 

일거리는 도처에 널려 있다.

직장이나 집안에서 일하고, 가족을 돌보고,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고,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동창 모임에 나가고....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고요한 시간, 영적 시간을 가지려 하면 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면서

조금 전까지 있었던 영혼의 바람을 꿀꺽 삼켜버린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기도하다가도 초인종 소리에 달려나가야 하고,

찬미 시간을 가지려고 성가책을 펼치다가도 깜박 잊고 있었던 은행일 때문에 서둘러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덜 복잡해지고 덜 바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 일정이 덜 빡빡해지고 해야 할 일들이 줄어들 확률도 거의 없다.

특히 오늘 우리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에 쫓기며 살고 있다.

예전에는 업무상 편지를 받으면 며칠 후에 답을 보냈다.

쌍방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언제 어디서나 즉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휴대전화와 인터넷 덕분에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대부분 마르타처럼 일 중심의 사람이다.

현대사회가 성취와 성공을 중시하고, 어려서부터 경쟁하며 성장했기에 더욱 그렇다.

오죽하면 'human being' 대신에 'human doing'으로 부르자는 의견이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 바빠서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사람들이다.

성당에서 기도할 때조차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나는 바쁘다. 하지만 올바른 일로 바쁜가?'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자문해 보자.

오늘 우리에게 우선순위란 익숙한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일에 쫓기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후회스런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도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사는 것은 중요하다.

영혼은 육신의 우선순위와 다르다.

육신은 성취와 성공, 감각적인 쾌락과 재미 등에 우선순위를 두지만

영혼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 가족과 함께 시간 갖기, 동반자인 배우자와 함께 대화하기,

하느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경치 보기, 하느님이 허락하신 인생을 감사하며 살기 등에 우선순위를 둔다.

 

간단한 작업을 해보자.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 그리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 일의 목록을 작성해보자.

그 목록에 자동차나 집, 값비싼 가전제품이 있는가?

아마도 목록에 가족과 친구,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한 일, 인생의 기념비적인 사건 등

행복했던 순간이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할 때 고인이 남긴 재산이나 그의 잘생긴 외모에 대해 찬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인의 따스한 인품, 가족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관대함,

하느님에 대한 헌신을 기억하고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참 행복은 고려하지 않은 채 성공의 물질적인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끌어모으기에 여념이 없다.

 

아마 우리는 죽는 그날가지 바쁘게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더 여유로워질 때 영혼의 바람을 채워주겠다고 말하지 말자.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죽는 그날까지 우리는 항상 바쁘게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비행기 테러 사건이 일어난 세계무역센터,

일명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붕괴되는 건물 속에 갇혀 죽었다.

그 와중에도 휴대전화를 걸어 배우자. 부모. 친지들과 마지막 통화를 나누었는데 하나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죽어가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사랑한다'였다.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이 있은 며칠 뒤 ABC 뉴스는 마이클이란 사람을 인터뷰했다.

그는 9월 11일 아침, 세계무역센터에 출건했다가 돌아오지 않은 아내를 찾아

며칠을 파편더미가 쌓인 건물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시신 식벽 DNA 검사를 위해 아내의 칫솔을 소중하게 싸가지고 온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날 아침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침에 서로 직장 가느라 바빠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는데 그 사람의 눈을 한 번만 더 볼 수있다면, 그 사람을 한 번만 더 안을 수 있다면, 한 번만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토니 캄폴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지 않고,

사랑하며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

 

"죽음 앞에서 지난 날을 되돌아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았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처럼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코린 13,13)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 이것만이 중요하다. 나머지는 모두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면 쫓기듯이 살지 말아야 한다.

 

분석심리학자 융(G. Kal Jung)은 분주함은 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악 자체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바쁘게 쫓기며 살아가는 삶은 영원을 잊고 앞만 보고 달려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경고하신 말씀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마태 24,38-39)

 

노아 시대 사람들이 멸망한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탐욕스럽고 간음과 도둑질을 하고 살인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에 매여 하느님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들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 언저리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정신없이 일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바빠 시간과 운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망각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바쁨도 수고도 그 순간에 모두 끝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산다.

 

죽을 사 (死)를 풀어보면 한 일(一)자와 그 밑에 저녁 석(夕)자와 칼을 가리키는 비(匕)자가 있다. 이 세 가지를 조합한 것이 死이다.

죽음이란 한밤중에 느닷없이 날아오는 비수와 같은 것이다.

캄캄한 밤중 동서남북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모르게 비수가 날아 온다면

그 비수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쫓기는 삶의 반대는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삶이다.

그 여유란 휴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통합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정서적인 힘과 시간을 가리킨다.

 

일을 할 때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면 그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확률이 높다.

결정을 내릴 때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면 침착하게 전체적인 것을 보면서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여유가 없으면 실수하고 실패할 확률이 높다.

회의나 중요한 거래에서 초조하게 쫓기듯 하면 오판으로 인해 실패할 수 있다.

 

억지로라도 여유를 가져야 한다.

파스칼이 "누군가에게 '충분히 여유를 갖고 살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행복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여유없이 쫓기며 살아간다면 조만간 우리 몸과 마음은 고장난다.

마치 자동차를 정비도 하지 않고 계속 몰고 다닌다면 오래지 않아 고장나듯이,

마지막 한푼까지 남김없이 쓰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재정적 파탄을 맞듯이 말이다.

돌발 사태에 대비해 정서적, 시간적 여유를 갖지 않고 쫓기면서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불행한 사태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루의 여유는 아침에 시작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차분한 마음과 온전한 정신으로 시작한 하루와 허둥지둥 일어나 서두르는 마음과 몽롱한 정신으로 시작한 하루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하루 일과를 늦게 시작하면 그만큼 하루 삶의 속도는 급해진다.

늦게 일어났으니 모든 것을 서둘러야 한다.

아침도 서둘러 먹어야 하고, 일터에도 서둘러 가야 한다.

 

허겁지겁 바쁘게 살다 보면 내면이 피폐해진다.

인내, 사랑, 동정, 배려 등 온유한 마음은 사라지고 그 반대의 마음이 생긴다.

거칠고 날카롭고 공격적이고,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하게 된다.

 

나아가 서둘러 움직이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짓을 많이 하게 된다.

급히 가야 하니 남의 등을 떼밀면서도 '미안하다'는 말도 못한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여유가 없다.

서둘러 지하철을 타도 제 시간에 도착할지 알 수없기 때문이다.

빨리 가야하니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반갑게 인사할 시간이 없다.

 

이렇게 되면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바쁘게 살면서 어떻게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활동 중의 관상을 살려면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온유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거리를 걷다가도 급한 사람을 위해 길을 비켜주고,

오가는 사람들과 주변 환경을 따스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지하철을 타면 자리를 잡으려고 서두르지 않으며 비행기를 탈 때도 주위를 둘러보고 힘없는 노인이나 여성들이 짐 올리는 것을 도와준다.

이러한 자세는 하느님 안에서 만사를 대하는 여여(如如)한 태도다.

 

하루를 허둥지둥 살지 않으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찍 자야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밤늦게 잠자리에 들고 때로는 다음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도 한다.

술자리는 1차, 2차, 3차로 이어지며 결국 다음날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하는 것은 희망사항이 된다.

 

인터넷 문화도 우리를 밤늦게까지 깨어있게 만드는 요인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은 텔레비전의 심야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밤 12시를 넘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 지하철엔 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아침형 인간]의 저자 사이쇼 히로시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건강한 상태란 단지 병들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WHO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건강은 '조화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신체적, 정신적, 영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조화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야행성 생활을 하면서 만성 수면부족으로 다음날 아침 비몽사몽 헤매는 사람이

어찌 조화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보면 선녀가 나무꾼을 남편으로 맞이한다.

선녀라면 당연히 귀족이나 선비를 남편으로 맞았을 법한데 무식한 나무꾼을 남편으로 맞아들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한의사 김영길님은 이렇게 말한다.

"선녀는 학식이나 지위보다 산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나무꾼의 맑은 정신과 튼튼한 체력을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몸에다 옷을 걸치는 것마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혼과 정신도 옷을 입어야 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밀려들 삶의 폭풍우에 대응할 수 있도록 영혼과 정신도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느님 앞에 조용히 머물러 영적 방패로 무장해야 한다.

 

데오도르 에프(Theodore H. Epp)는 왜 기도로 아침을 시작해야 하는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긁어모았던 시간은 아침이다.

만나는 태양이 떠오르면 녹아버리기 때문이다.(탈출 16,21)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침에 영적 만나를 먹어야 한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많은 일들, 걱정거리나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생긴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인 아침 시간에 영적 만나를 먹어두어야 힘을 얻어 싸울 수 있다.

 

물론 우리 모두가 꼭 아침에 기도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내가 테오도르 에프의 견해에 동감하는 첫째 이유는

하느님께 수확물의 맏배를 봉헌하듯이 시간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그날의 첫 시간을 봉헌해야 한다.

일어나자마자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어야 한다.

 

둘째, 첫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하루를 여유로롭게 사는가 아닌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어제 삶을 반성하고, 오늘의 삶을 준비하는 사람은 하루종일 여유롭게 살 수 있다.

오늘 해야 할 일거리를 주님 앞에서 헤아려 보고 일의 우선순위를 식별하고 오늘 하루 정말 중요하고 바쁜 일들을 위해서 에너지를 사용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누구나 한번쯤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계획 없이 시장이나 백화점에 갔다가 장사꾼의 호객행위, 휘황찬란한 조명,

화려하게 진열해 놓은 것들에 현혹되어 물건을 덜컥 사가지고 온 경험을.

이렇게 충동 구매를 하듯이 계획 없이 하루를 맞이하는 사람은 바쁘다는 핑계로

밀려드는 일거리에 쉽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

하지만 하루의 첫 시간을 하느님과 함께한 사람은 하루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운 사람과 같아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다.

 

아침 시간을 확보해서 하루의 삶을 여유있게 출발하는 것이 활동의 관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하듯이, 낮 시간에 활동하면서 미리미리 움직여 서두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약속이 있으면 15분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약속시간에 임박해서 출발한다면 자연 서둘러 운전하거나 헐떡거리며 뛰어가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례를 범할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교통체증이 심한 곳에는 약속시간에 임박해서 출발했다가는 늦기 십상이다. 그런데 약속시간에 늦는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 결여이고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상대방을 멸시하는 태도이다.

나아가 상대방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내 시간이 귀하면 다른 사람의 시간도 귀하다.

그러니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좀더 일찍 출발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덜 복잡해지고 덜 바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한순간이라도 낭비할 틈이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헛되게 보내는 시간이 많다.

한편으로는 한정된 시간을 쪼개 쓰느라 엄청나게 애쓰면서도 텔레비전과 컴퓨터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가.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은 하루 평균 4시간 25분이라고 한다. 상당한 시간이다.

하루 중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외에 가장 많이 차지하는 시간이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간에다 신문과 잡지 보는 시간, 인터넷을 사용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하루 여섯 시간은 될 것이다.

인생의 10년 정도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과 인터넷만 보면서 사는 셈이다.

10년이라면 박사 학위 하나는 충분히 딸 수 있는 기간이다.

 

물론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고 여가를 보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다.

이 말뜻은 그것들이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제공하는 정보는 놓쳐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세 끼 밥을 먹어야 하듯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시간별로 챙겨야 한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할 시간은 없어도, 주님께 기도할 시간은 없어도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보는 시간은 꼭 할애한다.

이런 상태라면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노예가 되었다 해도 진배없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더 우선 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해도

우리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인격적.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경험은 어느 정도 수고를 들여야 하는데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주는 정보는 우리의 수고 없이 밖에서 주어지는 정보일 뿐이다.

참 기쁨은 땀을 흘린 후 열매를 거둘 때 갖게 되는 것인데,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어떤 인내의 땀 흘림도 없이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의 내면을 성장시키는 것과 관계가 없다.

 

바오로 사도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의미있게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에페 5,15-16)

 

여기서 '시간'이란 그리스어로 카이로스(καιρσς)이다.

 

성경은 두 가지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

카이로스(καιρσς)와 크로노스(χρονσς)다.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양적인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주님과 일치하여 의미있게 살아가는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주님과 관계없이 세속에 휩쓸려 허망하게 살아가는 시간이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시간을 헛되게 허망하게 보내는 것이다.

 

다음은 시편 23편을 기초해서 쓴 글로 일에 쫓겨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에게 일의 속도를 주시니

나는 서두를 필요가 없네.

주님은 항상 내가 깊은 숨을 쉬고

나를 되찾을 수 있도록

여유로운 시간을 마련해 주시네.

내 영혼 앞에 깊은 안식을 주는

삶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여주시어

내가 경이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네.

일상의 수많은 책임이 나를 엄습해 와도

나는 긴장할 필요가 없다네.

주님의 고요한 존재가 나를 모든

불안에서 자유롭게 한다네.

주님은 모든 시간과 모든 사물에

존재하시는 분.

기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평화가 나를 둘러싼다네.

나는 깨닫는다네.

나의 하루를 되돌아보면,

통합 속에서 많은 것이 이루어졌음을.

또한 주님을 따르고

항상 주님의 집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한없이 기뻐하며 감사한다네.

 

 

 

 

 

출처 : 퍼렁별나라공쥬님의 블로그
글쓴이 : 찬미예수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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