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스크랩]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것들 (1)

김레지나 2011. 1. 12. 23:12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것들 (1)

 

관상과 활동을 통합하기 위해 물리쳐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마르타한테서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마르타가 많은 일을 염려하면서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이요

(루카 10,41), 다른 하나는 마르타가 온갖 시중드는 일로 너무 분주했다는 점이다.

(루카 10,40)

마르타의 이와 같은 모습은 실상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묘비명으로 쓰면 딱 맞을 내용이다.

"늘상 걱정하면서 일에 쫓기면서 살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노라."

 

걱정에 사로잡힌 모습, 쫓기며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는 졸저 [일상도를 살아가는 인간]에서도 다루었던 내용으로 다시 한번 읽고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는 중복되지 않게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내용만 다루겠다.

 

진리의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참된 인간의 길과 참된 하느님 섬김의 길을 가르쳐 주신 이래 더 이상 새로운 가르침은 없다.

실제로 인류 정신사를 발전시킨 이들 대다수는 그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새롭게 발견한 자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시대에 맞게 말하고 필요한 것을 강조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다음 말은 맞는 말이다.

"교육이란 새로운 사실을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실천하도록 하는 데 있다."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 것

 

예수님은 몇 번에 걸쳐 걱정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권고가 아니라 명령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권고는 타이르며 권하는 말이어서 강제성이 없는 반면, 명령은 그렇지 않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루카 21,34)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루카 12,25)

 

예수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강하게 명령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번째는 걱정은 파괴적인 습관이기 때문이다.

손톱을 물어뜯거나 다리를 떠는 습관이 있다고 인생이 불행해지거나 황폐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인생에서 기쁨과 평화를 빼앗아 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걱정하는 습관을 단호히 끊어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명령이 아니라 권고에 그치게 되면 새겨듣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것은 몸에 해로우니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받으면

아무리 먹고 싶어도 꾹 참고 먹지 않는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들으면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린다. 바로 이런 태도 때문에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하루에 6만 가지의 생각을 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상당한 숫자다. 문제는 어제 했던 6만 가지의 생각을 오늘 다시 하고 내일 또 다시 하면서 우리의 정신세계가 끝없이 나뉜다는 것이다.

끝없이 나뉜 정신세계는 우리의 마음을 온통 걱정에 사로잡히게 한다.

 

성경에서 걱정이라는 말은 정신세계가 나누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걱정하다'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인데,

이 단어는 '나누다'라는 동사 메리조(μερίζω)와 '정신'이라는 뜻의 명사 누스(νούς)가 합쳐져 만드러진 것이다.

 

설령 '걱정하다'란 그리스어 메림나오의 의미를 모른다 해도

우리 머릿속에 하루종일 6만가지의 생각이 오간다면 정신 사나울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미망 (迷忘-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 또는 그런 상태)에 사로잡힌 마음'이라는 표현이 있을까?

 

머릿속을 맴도는 이러한 생각은 대부분 잡다한 것들이다.

처리해야 될 업무, 일정표, 돈 걱정, 성적 환상, 배우자나 아이들 생각, 친구들 생각,

청구서 등등..

 

이러한 대부분의 생각은 상상에 의한 걱정거리다.

상상에 의한 걱정거리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데도 일어난 것처럼 상상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기도 전에 앞당겨서 고통을 맛보는 것이다.

직장을 잃기도 전에 이미 직장 잃은 고통을 맛보는 것이요,

사업이 부도나기 전에 부도난 절망을 체험하는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며

내 삶을 주관하시고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가?

 

헨리 나웬은 걱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걱정한다는 것은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않은 시간과 장소를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는 행위다.

'혹시'라는 생각으로 오지도 않은 시간과 장소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혹시 집에 전기다리미를 꽂아놓고 나온 것은 아닐까?

 혹시 오븐을 켜놓은 채 나온 것은 아닐까?

 혹시 암에 걸리지는 않을까?

 혹시 직장에서 잘리는 것은 아닐까?

 혹시..."

 

'혹시' 하면서 근거도 없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정서적. 영적,

나아가 육체적으로 황폐하게 된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기어를 중립에 놓고 시동을 건 다음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엔진이 돌아가면서 소리를 내고 기름은 펑펑 들어간다.

하지만 차는 한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소음만 요란하고 에너지만 낭비되는 것이다.

걱정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다.

걱정은 정서적,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에너지만 낭비될 뿐이다.

 

근심 걱정이 우리를 어떻게 황폐하게 하는지 잘 보여주는 우화가 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가 있었다.

요괴는 노파로 변장하여 개울가에 앉아 있다가 건장한 남자가 오면 업어서 개울을 건네 달라고 부탁한다. 대부분의 착한 남자들은 노파의 부탁을 선뜻 응한다.

그런데 노파는 개울을 다 건너고 나서도 내려올 생각을 않고 마을까지 업어달라고 한다.

마음씨 착한 남자들은 할머니가 오죽 힘들면 부탁하랴 싶어 구슬땀을 흘리며 업고 간다.

하지만 노파는 마을에 당도해서는 다른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지친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으니 내려오라고 하자 노파는 엄청난 힘으로 남자의 목을 조르며 이렇게 협박한다. "나를 내려 놓으면 네 목을 졸라 죽여버리겠어."

남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쩔 수 없이 노파를 어깨에 짊어진 채 며칠이고 계속 걷는다.

너무 지쳐서 노파를 내려놓으려 하면 그때마다 노파는 남자의 목을 더욱 조를 뿐이다.

그러다가 남자가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지면 요괴는 비로소 내려와 그의 심장을 파먹는다.

 

근심 걱정은 이 우화에 나오는 요괴와 같다.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활력을 빼앗아 먹다가 결국은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지게 한다.

 

우리가 근심 걱정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혹시'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수록 미래에 대한 덧없는 근심 걱정은 줄어들게 된다.

 

우리는 대부분 1년 전 무슨 걱정을 하며 살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1년 전은 고사하고 한 달 전 무슨 일로 마음고생을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걱정이나, 취업 일선에서 밀려나 방황하는 배우자에 대한 걱정이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매일같이 우리 머릿속을 오가는 6만 가지 생각 중에서 94 퍼센트에 해당되는 5만 6천 가지 생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걱정거리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를 힘들게 했던 걱정거리가 며칠 도 안 되어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참으로 무익하고 쓸모없는 걱정을 사서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온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세상사가 사소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말대로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졸이고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주님만이 영원하신 분인데.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면서 근심 걱정할 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악마다. 근심 걱정은 악마의 운동장이라는 말이 있다. 악마는 가상의 비극을 우리 상상 안에 설정해 우리의 평안을 갉아먹는 치사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컴퓨터 성능이 좋아도 바이러스가 들어와 시스템을 감염시키면 그 성능이 뚝 떨어지듯이, 아무리 우리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라 해도 원수 악마가 근심 걱정으로 우리 내면을 감염시키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피폐한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미리 걱정을 했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 미리 걱정하고, 걱정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을 자신의 행동양식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걱정이 사라지면 무엇을 대신 붙들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고

그래서 새로운 걱정을 만들어 낸다.

한 가지 걱정에 다른 걱정을 보태면서 온갖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들 역시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이러한 태도는 걱정이 정말 고치기 힘든 일상의 굳어진 습관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120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해도 근심 걱정을 하느라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의학계에서는 과로로 죽는 사람들보다 근심 걱정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근심 걱정은 순환계와 분비기관, 신경체계에 영향을 미치고 근본적으로 심장에 타격을 준다. 굳이 심장까지 영향을 입히지 않는다 해도 걱정에 사로잡혀 있으면 불안하고, 조급하고, 두렵고, 의심이 많아지고, 잠이 오지 않고 나중에는 신경쇠약에 걸린다.)

 

그리스도인들의 근심 걱정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부각시킨다.

아무리 작은 100원짜리 동전이라도 눈앞에 갖다 대면 태양을 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작은 근심이라 해도 거기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태양이신 하느님을 볼 수 없다.

다시 말해 근심 걱정하는 마음에는 믿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영성신학자들은 근심 걱정을 불신앙과 동일시하고, 

무의식적 신성모독 행위라고 한 것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의식적으로는 신성모독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법>

 

(1) 근심 걱정이 생길라치면 즉시 기도한다.

 

성경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기도할 것을 강조한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필리4,6)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1베드 5,7)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야고 5,13)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 우리의 근심 걱정을 온전히 내맡기지 않고는 평화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께 우리의 문제를 맡기지 않으면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있는 대로 염려하고 초조해하면서 진을 빼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주님을 찾는다는 점이다.

 

걱정단지와 기도단지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나쁜 소식이나 불행한 사건 앞에서 걱정이 될 때 어떤 단지를 선택할지는 철저히 우리 몫이다.

먼저 걱정단지를 택하는 경우를 보자.

나쁜 소식이나 불행한 사건을 걱정단지에 넣고, 그 단지를 불 위에 올려놓은 다음

천천히 젓는다. 오래지 않아 걱정단지에서 비관과 절망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그것을 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 한 숟가락씩 떠먹으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을 움켜쥔다.

 

이번에는 기도단지를 택하는 경우를 보자.

나쁜 소식이나 불행한 사건을 기도단지에 넣어 아버지 하느님께 내맡긴다.

곡선을 가지고도 직선을 그리실 수 있는 하느님, 어긋난 인생의 자리에서도 선한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돌보아 주시기를 청한다.

또 구체적으로 지난날 아버지 하느님이 돌보아 주셨던 체험을 떠올리면서 이번에도 돌보아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당연히 두번째 태도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의 문제를 내맡기는 것이다.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닌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기도단지를 택하는 경우 기도만 하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먼저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근심의 주요 원인은 혼란'이라는 말이 있다.

나쁜 소식을 듣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혼란스러운 채 내버려둘수록

근심은 계속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빠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서 하나씩 정리해 보는 것이다.

 

첫째는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의 근본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둘째는 내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인지

          구분 한다.

셋째는 할 수 있는 것들은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최선을 다해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할 수 없는 것들은 하느님의 선하심에 의지해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고집이 살아 있는 한 그리 쉽지는 않다.

잘 나가는 사람들과 비교해 억울하고 분하게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수록 그 괴로움이 없어지기는커녕 어려움에 어려움을 보태게 되고, 끝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최악의 상태로 나가게 된다.

내가 최선을 다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애지중지하던 자식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고 하자.

부모는 아이의 죽음이 확실해지자 하느님께 기도했다.

"아이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 아이를 당신께 보내는 것을 슬퍼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 아이와 함께했던 시간을 감사하게 하소서."

 

만일 이 부모가 운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아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순간까지 "하느님,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아이를 살려주소서. 절대로 우리 아이를 데려가지 마소서." 하며 잡고 있었다면 아이가 떠나고 나서 그들은 이러저런 원망으로 한동안 힘들게 살아갈 것이다.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회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 그리고 먼저 간 아이에 대한 원망.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내적 평화로 지낼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 속에서 지낼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최선을 다해 해결할 것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에 의지하면서 운명으로 받아들여햐 한다.

어떤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 아래 모든 고통에는

한 가지 대책이 있거나

아니면 아주 없다.

있다면 찾으라.

없다면 받아들여라.

 

 

 

 

 

 

출처 : 퍼렁별나라공쥬님의 블로그
글쓴이 : 찬미예수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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