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붙들어야 할 것들 (2)
두번째 훈련. -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으로 십자성호 긋기
교부 테르툴리아노가 전해준 이야기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매사에 하느님 현존을 의식하고 사랑하고자 늘 성호를 그었다.
그들은 다른 일을 할 때마다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기 위해 성호를 그었다.
하루를 시작할 때, 집안에 들어가거나 나갈 때, 신발을 신을 때, 책을 펼칠 때,
식탁에 앉을 때, 램프에 불을 켤 때, 침대에 누울 때와 같이 모든 일상 안에서 성호를 그으며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의식했다.
우리도 하루 몇 번씩 성호를 긋는다.
식사 전후, 자동차에 열쇠를 곶고 시동을 걸때, 요즘은 지하철을 타면서도 성호를 긋는다. 우리는 또 주일에 성당에 가면서도 성당 부근에 주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빌면서 성호를 긋기도 한다.
어쨌거나 주님의 도움이 구체적으로 필요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모든 일을 시작할 때 십자 성호를 긋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남들 보란 듯이 성호를 그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마음만으로라도 성호를 그으면 된다.
직장에 도착해서 또는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과 함께 일과를 시작할 수 있다.
거래 상담이나 회합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과 함께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
또 책을 읽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그으며서 주님과 함께 그 책을 읽을 수 있고
전화를 받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과 함께 전화를 받을 수 있다.
세번째 훈련. - 한 가지 일을 마친 후 잠시 멈추어 되돌아보는 스타티오 훈련
스타티오(statio) 훈련은 지금까지 설명한 훈련, 곧 일을 시작할 때마다 성호를 긋는 훈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호를 긋는 훈련이 주님과 함께 앞을 바라도보는 것이라면,
스타티오는 주님과 함께 되돌아 보는 훈련이다.
스타티오란 '머물고 있는 자리'를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이 훈련은 서둘러 다음 행위로 넘어가지 않고 잠시 여유를 갖고 조금 전에 한 행위를 성찰함으로써 그 행위와 하게 될 행위 사이에 공백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까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후 다음 일을 하기 전에 앞에서 했던 대화를 되돌아보고 대화 중의 내 태도와 행위에 대해 성찰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일에서 다음 일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했던 일을 깊이 생각해 보는 행위는 통합된 삶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끊임없이 반응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참된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성취와 경쟁을 우선하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세 가지 훈련을 정리해보면
첫째는 자주 주님의 현존을 기억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훈련,
둘째는 시작하기 전에 마음으로 성호를 긋는 훈련,
셋째는 한 가지 일을 마친 후 잠시 멈추어 되돌아 보는 스타티오 훈련이다.
이 훈련은 세상 한복판에서 정신없이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가
고질적인 망각병에서 벗어나
가장 효과적으로 하느님의 돌보심과 현존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 훈련은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주며 우리를 영적. 인격적으로 성장시킨다.
기도 자리 마련하기
세상 한 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려면 기도할 곳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일손을 멈추고 기도할 곳으로 물러나
고독 속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나약한 인간 본성 때문이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성공을 찾고,
다른 이들과 협력하기보다는 경쟁을 하고,
내적 자유보다는 무질서한 애착에서 허우적 대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당이나 골방을 찾아야 한다.
물론 성당이나 골방은 상징적이다.
실제로 성당이나 골방에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은
지하철 안이든, 가게나 복도 한 구석이든, 어디서든지
주님과 함께하는 고독의 자리를 마련할 수 없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는 그만큼 주님과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입으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속해 살아갈 뿐이다.
앞에서도 말한 로렌스 수사도 주님과 함께 부엌에서 일하기 위해
따로 성당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사님은 설거지하고,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고, 하루 종일 허드렛일을 하면서 지냈지만 하루를 미사로 시작했으며 규칙적으로 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했다.
수사님이 바쁜 부엌일에서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성당에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과 함께하려면 잠시 세상에서 떨어져 주님과 단둘이 마주할 필요가 있다.
불우한 어린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아이들을 돌보며 함께 살고 있는
한 살레시오회 수사 신부님은 이렇게 자신의 체험을 나누었다.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과 제가 한 시골 마을로 피정 겸 소풍을 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꼭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일을 하는 제 천성은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떠나기 전날 오후에야 부랴부랴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시장도 보고 차도 점검해야 했습니다.
정작 중요한 피정 프로그램은 밤 11시가 되어서야 짜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니 벌써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습니다.
출발 바로 직전에 겨우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지요.
아무튼 승합차에 아이들을 빼곡히 태우고 시동을 거니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정체가 심한 서울 시내를 막 빠져 나와 속도를 내려는데 그만
미사도구를 빼놓고 왔다는 생각이 미쳤습니다.
할 수 없이 다음 교차로에서 차를 돌릴 수밖에 없었지요.
차에서 내린 저는 다급한 마음에 수도원 성당 문을 박차고 들어가
제의방으로 돌진하려는 순간
주방 자매님이 고요히 성체조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 것입니다.
오랜만에 수도원이 비면서 한가한 시간을 갖게된 자매님이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제 마음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늘 바쁘게 돌아만 다녔지,
주님 앞에 차분히 앉아 본 적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말만 수도자지 주님께는 거의 시간을 내지 않은 제 모습,
세상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제 모습이 참 부끄러웠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주님께 나아가는 주방 자매님의 영적 삶과
일중독에 빠져 잠시도 주님 발치에 머물지 못하는 저의 부끄러운 삶의 모습이
극명하게 교차되면서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양승국,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때까지)
우리는 대부분 너무 바빠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주님과 마주할 시간이 없다.
주님은 우리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바쁘다며 등만 보여드리고,
마음을 드리기보다는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일 자체를 위해서 일하거나 활동 자체를 위해서 활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파견하신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활동할 뿐이다.
일이나 활동이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며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신학자 챔버스(Oswald Chambers)는 "주님을 향한 봉헌의 최대 경쟁자는 놀랍게도
주님을 위해서 한다는 바로 그 일일 수 있다"고 말했다.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다.
우리는 자주 하늘 왕국을 건설한다고 하면서 어느새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이들을 본다.
챔버스가 계속한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유일한 목적은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지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무엇인가?
땀 흘리며 이랗는 것인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 여기저기를 열심히 뛰어다니는 수고인가?
물론 주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바라시는지 모른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의 관심을 받는 것이다.
우리와 한마음이 되어 인격적인 만남, 곧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어느 가족이 아버지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계획을 짰다.
엄마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큰아들은 집안 청소,
딸은 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작은아들은 카드를 그리기로 했다.
드디어 생일날 아침 아버지가 직장에 나가자 엄마와 아이들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점심때 돌아왔다.
그리고 부엌에 가서 아내에게 물 좀 달라고 했다.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는 엄마는 "나 지금 바쁘니까 직접 따라 드실래요?" 라고 했다.
거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큰아들에게 "아버지 실내화 좀 가져다 주련?" 하고 부탁했다. 그러나 큰아들은 "저 지금 바쁜데 아버지가 갖다 신으세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그렇게 했다.
아버지가 집안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딸에게 "담당의사에게 전화 좀 해서 아버지가 평소 먹던 약을 처방해 달라고 해주렴." 하자 딸이 "저 지금 바쁘니까 아버지가 직접 하세요." 했다.
아버지는 힘없이 "그러지"하고 말하고는 이층 침실로 올라갔다.
그때 작은아들이 자기 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뭐하니?" 하고 아버지가 물었다.
작은 아들이 "아무것도 안해요. 근데 아버지, 저 혼자 있고 싶으니까 문 좀 닫고 나가 주실래요?"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침대에 가서 누웠다.
드디어 저녁때가 되어 파티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엄마와 아이들이 침실에 들어와 아버지를 깨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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