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세상을 이분(二分)하는 태도 (2)
장소는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장소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과 우리의 태도다.
우리가 지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가 않는가에 따라 그 자리가 구분된다.
성당은 가장 영적인 자리로 간주된다.
주일에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마음속에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로 평화롭지 못하다. 하지만 주일 미사에 빠지면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나왔다고 하자.
마음이 그래서인지 미사 참례를 하고 있어도 미사 분위기도 성가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회자가 성가를 4절까지 부르자고 하자 짜증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5절까지 있는 성가를 부르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떤 놈이 성가를 5절까지 만들었어?" 하며 화를 낸다.
게다가 사제의 강론도 지루하기만 하다.
이런 경우 이 사람에게 장소는 지극히 영적인 자리였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누가 보더라도 세속적 장소로 간주되는 축구경기장으로 가 보자.
상암 월드컵 경기장은 하느님 예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다.
어떤 신자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토요일 오후 가족들과 함께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축구장에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구조조정이다 뭐다 해서 실직자들이 많은 이때에 직장을 지켜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 교통사고와 안전사고가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가족들을 모두 안전하게 지켜주신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붉은 악마들과 하나가 되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다 보니 한국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큰 감동으로 밀려온다.
이때 이 사람은 비록 성당이라는 거룩한 장소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그분께 대한 감사와 찬미로 충만한 영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세상을 성과 속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 태도를 버릴 때 하느님 현존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넓어진다.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할 수 있다.
밝게 빛나는 햇살과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찬바람 속에서,
붉게 물든 저녁노을과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학교에서 돌아와 가슴에 안기는 자녀와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친구한테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현존 체험은 우리에게 평화로움을 선사하고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게 한다.
"장소가 성과 속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시선과 태도다"
이러한 명제가 사실임을 보여주는 신앙의 선배 한 분을 소개한다.
17세기 카르멜 수도회의 로렌스 수사다.
수사님이 수도원에서 맡은 소임은 영적인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부엌일이었다. 하지만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믿었기에 하루종일 주방에서 주님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했다.
로렌스 수사에 따르면 부엌에서 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열망이다.
로렌스 수사의 다음 말은 우리가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기도하는 시간이 부엌에서 일하는 시간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기도할 때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 못지않게 부엌에서 일할 때도 철저히 하느님께 매달려야 한다."
로렌스 수사는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프라이팬의 계란을 뒤집을 때도, 지푸라기를 주울 때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
그는 말한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서로 다른 것을 부탁하는 부엌의 소란함과 부산함 가운데서도 나는 무릎을 꿇고 성찬예식에 참례하는 것처럼 깊은 평화 가운데 주님을 모실 수 있다."
로렌스 수사가 처음으로 부엌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아가고 싶어서 여러 가지 실천 방법을 제시한 책을 읽었고 선배 수도자들을 만나 도움말을 들었다.
하지만 책이나 도움말은 오히려 그를 더 혼란스럽고 낙시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그는 밖에서 찾던 것을 중단하고 나름대로 모든 행동에서 하느님을 가장 귀하게 모시겠다는 유일한 지향을 갖고 살기로 결심했다.
구체적으로 부엌에서 일을 시작할 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일하는 동안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기로 했다.
우리 모두는 로렌스 수사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행위가 되도록 지향을 두어야 한다.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고생을 하든, 고통스러워하든, 휴식을 취하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에 하나하나의 행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거룩한 지향을 두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살아가게 된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콜로 3,17)
보통 한 사람이 깨어 활동하는 시간 가운데 영적인 시간, 다시 말하면 미사. 기도. 신앙모임 등 영적 시간은 총 활동시간의 2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을 이분시켜 생각한다면 하느님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시간은 2 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말이다.
이때 우리는 "성육신의 진정한 의미를 박탈하고, 하느님을 먼 하늘로 돌려보내며 아주 가끔씩 초대하게 된다."
이 2 퍼센트의 영적 시간은 나머지 98퍼센트의 세속적 시간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일상에서 하느니과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제대로 성경을 읽었는지, 기도를 했는지, 미사에 참례했는지 하는 것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는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이 끝나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나의 달라진 모습으로 영적 시간을 제대로 보냈는지로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98 퍼센트에 해당하는 삶의 현장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강도에게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비켜 지나간 레위와 사제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지 위해서 가고 있는 중이다.
곧 깨어있는 시간 중 2 퍼센트에 해당되는 영적 시간을 위해서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한 채 말이다.
한 번은 감자를 깎고 있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에게 동료 수녀가 다가와서 말했다.
"수녀님, 저는 조금 전 성체조배하면서 주님께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황홀한 영적 체험을 주셨답니다. 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오."
그러면서 황홀한 표정을 짖자 데레사 성녀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수녀님이 감자를 깎을 차례입니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2 퍼센트의 시간은 다시 세상에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주님과 깊은 일치를 이룬 뒤에 다시 세상으로 나가 그 일치를 살아가기 위해서다. 단순하고 반복된, 그래서 무의미하기까지 한 일상에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다.
다시 한번 자문해 보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감동적으로 통성기도를 하면서? 아니면 성경을 끌어안고 다님으로써?
자동차에 신자임을 증명하는 표시를 달고 다니면서?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감으로써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증명해햐 한다.
2 퍼센트의 영적 시간은 일터나 가정에서 생활할 때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은총을 얻는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려는 우리의 시선이다.
다음과 같은 영성시가 있다.
구도자가 술집에 들어가면 그 술짐은 곧 그의 구도장이 될 것이며
주정뱅이가 구도장에 들어가면 그 구도장은 곧 그의 술집이 될 것이다.
어느 주부는 자기가 늘 일하는 주방 싱크대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여 놓았다.
"신적인 봉사가 하루 세 번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이 얼마나 자긍심이 가득 담긴 표현인가!
이 주부는 부엌일이 '신적인 봉사',
곧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봉사임을 깊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부엌의 그릇 속에서 행동하신다."고 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 사람에게 누가 전업주부라며 무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주부라면 하느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칠 것이다.
냄비와 밥그릇의 주님,
저는 철야기도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밖에 나가
착한 일을 할 시간도 없습니다.
동이 트는 이른 시간 새벽기도를 하며
하늘 문을 두드릴 시간도 없습니다.
저는 가족들을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식사 준비와 설거지로
성인이 되게 해주소서.
....
정성을 다하는 식사 준비에
함께하시는 당신께 시선을 둘 수 있도록
제게 필요한 은총을 주소서!
성화는 성당과 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화는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그 일을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데 있다.
한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살았던 마더 데레사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이런 말씀을 했다.
"사람들은 종종 저를 오해합니다. 제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찬의 전례 때 사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가 우리의 모든 행위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중대한 결정에서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완전히 변화된다.
여러분이 교사라면, 하느님을 위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칠 것이다.
오, 주님!
제가 교실에 들어갈 때
지식 이상의 지혜를 주시어
제가 준비한 지식을 아는 데 그치지 않게 하시고
제게서 배우는 학생들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소서.
...
저에게 통찰력을 주시어
저는 어른이라는 것과
학생들은 저만큼 자제력이 없으며
원하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게 해주소서.
...
학생들이 제게서 당신 모습을 발견할 때
비로소 저는 훌륭한 교사가 됨을
알게 해주소서.
...
이 땅에서 당신을 빛낸 공로로
제가 가르친 학생들과 함께
천국에서 별처럼 빛나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교실에 들어가는 교사는 모르긴 몰라도 그러지 않은 교사와 다르게
학생을 대할 것이다.
모든 교사가 똑같은 마음, 똑같은 태도로 학생들을 대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주님과 함께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교사는
사랑의 시선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고 가르치며 그들의 선을 위하여 마음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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