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세 번째 걸음, ‘믿는 이’가 되라.
믿음이 성장하는 세 번째 방법은 ‘믿는 이가 되라!’다.
기억하고, 들었다면, 이제 실행에 옮겨서 믿는 이가 되어야 한다.
‘믿는 이’라는 말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필자가 그 뜻을 알아들은 것은 부활 2주 복음을 묵상할 때였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나타나tu서 말씀하셨다. “샬롬!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참조)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다시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그런데 이때 제자들 중에 토마스는 없었다. 후에 제자들이 토마스에게 알렸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어, 당신 없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어.”
하지만 토마스는 믿지 못했다. “나 못 믿어. 나는 창에 찔린 예수님 옆구리, 손바닥에 난 못 자국 만져보고, 손으로 넣어봐야 믿을 수 있어.”
토마스가 기본적으로 의심을 하였던 건 사실이지만, 그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섞여 있었다. 바로 삐쳤기 때문이었다.
“왜 나 없을 때 나타나시냐고, 왜? 왜! 이건 무효야. 나 있을 때 다시 나타나셔야 해. 예수님 너무 섭섭해!”
이 마음을 저렇게 “못 믿겠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토마스의 이런 마음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바로 여기, 이 대목을 주의해서 묵상을 잘 해야 한다. 분명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과 토마스가 함께 있는 자리에 나타나셨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진행되는 대화를 보면 마치 혼자 있는 토마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듯하다. 바로 이런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일대일로 상대해주시는 분인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이 대목을 아무리 묵상해 봐도 은혜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시는 말씀이었다.
누가 의심을 버려야 하는 줄 몰라서 못 버리는가. 안되니까 못하는 것이다. 의심이 있는 성격을 가진 사람한테 의심을 하지 말라니. 이건 평소 예수님께서 쓰시는 말투가 아니다. 분명 예수님은 그 정도 차원의 말씀을 하시고 마실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복음서 원문을 확인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문장이 달랐다.
원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토마스야, 아피스토스apistos가 되지 말고 피스토스pistos가 되어라.”
여기서 아피스토스는 ‘안 믿는 이’란 뜻이고, 피스토스는 ‘믿는 이’란 뜻이다. 즉, 안 믿는 이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라는 말씀이셨던 것이다.
“옳거니!” 필자는 여기서 무릎을 턱 쳤다.
“그래 이 말씀이셨구나. 나는 이제 2010년 농사 다 지었다. 이 말씀 하나 가지고 일 년 먹고 살겠구나.”
무슨 뜻인가. 믿음은 하나하나의 ‘case by case'로 믿는 것이 아니라, 통으로 믿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한 사건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통으로 “안 믿는 이냐, 믿는 이냐”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이‘가 되기로 선택하고 나면, 모든 것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 축복이고 다 은총이고 다 행복이고 다 잘된다. 반면 ’안 믿는 이‘의 눈으로 보면 다 불행이고 다 실패고 다 좌절이고 다 불평거리다.
이를 세상 사람들을 통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객관적인 근거를 갖고 판단하여 반응하지 않는다. 이미 그 사람의 태도에서 결정이 되어 반응이 나온다. 그래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평소 불평불만을 일삼는 사람은 꼭 거기에서 빈 부분을 찾아낸다. “오늘은 다 좋은데 좀 짜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나도 거기에서 항상 아쉬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반면, 믿음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안 좋은 일이 생겨도,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로 여긴다.
차동엽 신부님의 책 <믿음, 희망, 사랑>중에서 p.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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