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차동엽 신부님

'회색'이라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아픔

김레지나 2011. 1. 10. 21:31

대전제

                                   - 차동엽(노르베르또) 신부




   자연세계에 ‘회색’이라는 색깔이 있다. 이 색깔을 두고 사람들은 묻는다. “이것은 흑인가 백인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것은 흑이야!”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것은 백이야!”
하지만 자연의 실재(實在)는 외친다.
“아니야, 나는 ‘회색’이야. 회색이라구!”
비극은 사람들에게 있다. 아무도 그 색깔을 ‘회색’이라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데 우리 시대의 아픔이 있다. 


   신학교 시절 우리 반에는 서로 물과 기름으로 지내던 두 그룹이 있었다. 한 그룹은 사회참여를 확고한 사명으로 여기면서 당시 시대의 명령이었던 6.10 항쟁 데모를 주동하던 정의파 그룹이었고, 다른 한 그룹은 조용히 기도로 내실을 다지던 성령파 그룹이었다. 색깔이 분명했던 이 두 그룹 멤버들은 무슨 영문인지 서로 어울릴 줄 몰랐다.
나는 정확하게 그 가운데 있었다. 데모가 양심의 명령일 때는 데모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평소에는 성령 기도모임에도 곧잘 참여했다. 선언컨대, 이는 우유부단해서가 아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실 예수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께는 ‘정의’도 중요하고 ‘성령’도 중요하다는 확신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왜 정의와 성령은 ‘다른 것’이어야 하는가? 깊이 파보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인데 왜 서로 원수처럼 지내야하는가?”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는 다시 묻는다. “왜 가운데는 안 되는가?”
나는 확신한다. “가운데가 안 된다면, 오늘 예수님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한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예수님께서 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일정한 개념에 하느님 나라가 매몰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교회는 오케스트라다. 다양한 은사가 모여 아름다운 곡률을 연주하는 협연이다. 관악기 연주자가 현악기 연주자에게 너는 왜 그것을 연주하느냐고 탓하지 않듯이 교회의 모든 특정분야의 투신자들은 다른 특정분야의 투신자들을 포용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최대한 조화를 이루며 합심하여 감동적인 화음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구공동체의 대전제다.


 

무지개 다리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