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가톨릭교리

제 6과 -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1부)

김레지나 2010. 9. 9. 19:00

제6과 -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1부)

 

마르 8,27-29을 읽는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이나 훌륭한 성인 정도로 여기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주님이심을 믿는다.

예수님은 나이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 목수 일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사셨다.

그러던 그분이 공적 활동을 전개하며 훌륭한 가르침과 놀라운 행적들을 보여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스승으로, 예언자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작 3년을 넘기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을 당하고 무덤에 묻힘으로써

33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돌아가셨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으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시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요 참 하느님으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세주이심을 완전하게 믿게 되었고,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파하게 된 것이다.

 

역사상의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복음서들은 최초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그 신앙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아보게 되면서

그분의 지상 생활 전체 안에서 그분의 신비의 자취를 볼 수 있었고 또 보게 해줄 수 있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팔레스티나 땅은 하느님께서 구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이다. 넓이가 고작 2만 평방km에 불과한 작은 땅으로,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면해 있고, 동쪽으로는 요르단 강이 흐른다. 그리고 북쪽에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남쪽에 사해가 있다. 팔레스티나는 특별히 비옥하거나 지하자원이 풍부한 곳이 아니다.  

그러나 동서를 연결하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군사적, 경제적 교두보가 된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구출해 주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팔레스티나) 땅을 차지하게 해주셨다. 이스라엘은 한동안 부족국가 시대를

보내다가 왕정으로 전환했는데, 이웃의 강력한 부족이었던 필리스티아의 장수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 왕 때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지혜가 출중했던 인물로 유명한데, 다윗을 계승하여 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말년에 사치와 향락, 우상 숭배에 빠져 하느님의 눈에 벗어났다. 

 결국 솔로몬이 죽은 다음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B.C 922)되었다.

 

그 후 중동지역의 패권을 아시리아 제국(BC 750-650)이 차지하였고,

북부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B.C 721)했다.

다시 이 지역의 패권이 바빌로니아 제국(BC 605-539)으로 넘어갔는데,

남부 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B,C 587)했다. 바빌론 제국은 유다 왕국을 철저히

파괴했고, 예루살렘에 살던 유다 백성 대부분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

 

이 사건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었던 계약 자체가 깨어진 것으로 여겨질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했던 가나안 땅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자체도 풍비박산이 나서 내일을 기약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과 자기네 조상들과의 관계

그리고 현재의 자신들의 처지를 깊이 성찰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승 자료들을 꼼꼼히 수집하여 민족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오늘 날 우리가 읽고 있는 구약성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사야 예언자 등 여러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모세를 보내 그들을 구해 주셨듯이,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 바빌론 유배에서 구해 주신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은

50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B.C 538년).  

그러나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페르시아를 제압한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은 팔레스티나를 식민지로 삼았고,

그가 죽은 다음에는 이집트에 의해, 그리고 시리아에 의해 계속적인 지배를 받았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도 무력하게 굴복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을 벌였고, 특히 마카베오 일가의 항쟁으로 잠시 독립국가(B.C 142-63)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B.C 63년에 로마는 팔레스티나를 정복했다. 예수께서는 B.C 7-6년경

아우구스토가 로마 황제로 있을 때 팔레스티나에서 태어나셨다(마태 2,1-7).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는데, 로마 당국의

호구 조사령으로 본적지인 베들레헴으로 등록을 하기 위해 내려왔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방을 구할 수가 없어서 마구간에 거처를 삼았고,

그곳에서 예수를 낳았다.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자라면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상적인 가정생활,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종교생활,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과 함께 육체적 노동생활을 하셨다(루가 2,39-52).

 

복음서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증거하신 행적을 이야기하고자 할 뿐이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유년 시절부터 공생활을 시작한 약 30세까지의 생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약간 자세히 전한다.

 

예수님께서 공적인 활동을 시작할 당시의 로마 황제는 티베리오였다. 로마 당국은 식민지에

그 지방 출신 가운데 통치자를 내세우는 것을 관례로 했기 때문에 헤로데를 유다 지방의 왕으로 

삼았다(루가 3,1-2). 그러나 로마는 그 영토 일부를 떼어 총독으로 하여금 직접 다스리게 했다.  

그 당시 로마 총독은 빌라도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심으로써 로마인들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민족이 가장 번성했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되찾게 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메시아는 다윗 왕의 가문에서 태어나 위대한 왕의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정치․종교 집단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입장에 따라 나뉘어져 때로는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극심한 대립 양상을 보이면서  

당시 사회 구조와 틀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의 등장

이러한 상황에서 그 어떤 정치적, 종교적 파당에도 속하지 않은 유별난 존재가 나타났다.  

그가 세례자 요한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해방시키시고 율법을 충실히 지킨 사람들로 하여금 승리자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은 오히려 메시아가 오시면 지금 상태의  

이스라엘 백성은 재난과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의 잘못된 행위에 화가 나셔서 단죄하신다”고 역설했다(루가 3,2-18).

 

요한은 메시아가 오실 때 구원을 받으려면 개개인의 인격적인 변화, 즉 회개를 함으로써  

용서받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회개의 표시로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나오는  

세례를 베풀었다. 이 세례는 회개의 표시로서, 더러운 것이 물에 의해 씻겨지듯이,

하느님 앞에서 죄가 씻겨지기를 바라는 일종의 정결 의식이었다.

후에 그리스도교는 이 의식을 입문 의식(세례성사 의식)으로 받아들여 행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며,

자신은 메시아의 길을 닦기 위해 왔노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인간 구원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시기 전에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루가 3,21-22).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신 

메시아이시지만, 참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인간 조건을 그대로 따르신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이 사명을 위해 공적인 활동에 나서게 되셨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광야에 나가 40일 동안 단식하며 머무르셨다(루가 4,1-13).

성경에서 ‘광야’는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을 깨닫는 장소를 가리킨다.

그리고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준비와 수련의 기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세 차례 받으셨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 …… 재물에의 유혹

“내 앞에서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 …… 권력에의 유혹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 명예에의 유혹

 

악마의 유혹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인간적인 약점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방법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사람을 속이고 하느님을 빙자하여 자기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유혹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유혹을 거부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삶을 짐작케 한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당하시면서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구원 계획에 완전히 따르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이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이 생애 전체의 유일한 유혹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복음서를 통해 볼 때 예수께서는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닥쳐온 유혹과

싸우셨으며, 언제나 그러한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광야에서의 시련을 이겨내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출신 지역인 갈릴래아 지방에서부터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하셨다(루가 4,14-15). 예수님은 전도 활동 초기에 당신 고향인 

나자렛 마을의 회당에서의 안식일 예배 때 구약성경의 예언서인 이사야서의 61장을

낭독하셨다(루가 4,16-21). 그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메시아가 수행할 임무를 알려주는 것이다.

 

낭독을 마침 예수님은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다. 즉 당신이 메시아로 왔으며, 당신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곧 하느님께서 주신

기쁜 소식 곧 ‘복음’(福音)인 것이다.

 

 

예수님은 전도 활동을 하시면서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주고 나병환자를 고쳐주는 등

많은 병자를 낫게 해주셨다(루가 4,38-40 ; 5,12-16). 그러나 이러한 치유는,

단순히 질병 그 자체의 치유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인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이다(루가 5,17-26).

사람들이 중풍 들린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는 데 집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지붕을 벗기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 그런데

중풍병자에게 “너의 병은 치유되었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에 걸리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병자를 낫게 하신 눈에 보이는 행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죄에 묶여 있는

상태를 풀어주신다는 것, 즉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풍병자의 치유는 단순히 질병의 치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결정적인 구원,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신다. 중풍병자가 치유되면 마비되었던 몸을 일으켜 제 발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인간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중풍병자 치유는 죄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새 출발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예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도 행하셨다. 

야이로의 딸과 라자로를 살리신 것이 그 사례이다(요한 11,38-44).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병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모든 사람을 살리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권능,  

기적과 표징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한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을 사람들의 기적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기적장이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셨다.

자신이 배고픔과 목마름과 궁핍을 겪으셨던 예수님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고, 그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당시의 지배 계층과도 상당한 친분을 갖고 계셨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시 사회적으로 접촉해서는 안 될 더러운 사람, 죄인으로 규정된

세리․창녀․간음한 여인․태생소경․사마리아 여인 등을 아무런 차별 없이 대하시고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세리였던 레위(마태오)를 부르신 이야기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루가 5,27-32).

그 당시 세리란 단순한 세금 징수원이 아니라 민족 배신자로 여겨졌다. 거지들도 세리들한테는

적선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레위를 단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로 삼으셨다. 레위가 단지 세리라는 이유 때문에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이스라엘 지도층의 편견과 고정 관념을 깨버린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을 안아주셨고

한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셨다. 그리고 이를 비난하는 유다교 지도자들에게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무서운 질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편견과 고정 관념을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만한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올가미인 것이다.

자신이 나약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매달림으로써 위로를 얻고

용서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신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