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혜의 샘/김양진 선생님의 가톨릭교리

제 1과 - 종교가 필요한 우리

김레지나 2010. 8. 2. 12:28

제1과 종교가 필요한 우리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동기와 이유를 가지고 신앙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신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소망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 모든 동기와 이유를 불러일으키신 분은 따로 계신다. 바로 하느님이시다.

중요한 것은 동기나 이유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 때 축구선수들과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혹은 경기장에서 혹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렬히 응원했고,

그 결과 세계 4강이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나’ 라는 존재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나’ 라는 존재의 근거

 

· (나 - 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는가?

- 생명을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 성장할 수 있도록 돌보아준 가족과 친척

- 성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친구, 동료, 이웃…… 지구촌 사람들.

 

이 모두를 ‘너’(You) 라고 통칭하자.

이러한 ‘너’가 있기에 ‘나’가 존재할 수 있었고 지금 생존할 수 있다.

 ‘人間’이란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이다.

그런데도 만약 “부모도,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다 싫다. 나는 그들이 없어도 된다”고 하면서

 ‘너’를 외면하고 관계를 단절한다면 ‘나’란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너’라는 존재를 배척해서는 안 되고 배척할 수도 없다.

 

· (나 - 것) 그런데 ‘나’는 ‘너’와의 관계만 맺으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너’ 말고도 절대적인 무엇이 또 필요하다.

- 공기, 물, 음식, 옷, 집, 가구, 생활용품…… (물질과 재화)

 

이 모두를것’(It) 이라고 통칭하자.

로빈손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다지만

공기, 물, 자연이 주는 음식물, 기본적인 물건들, 즉 ‘것’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절대 필요한 것만 갖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것’과 관계를 단절해서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무시할 수도 없다.

 

· (나 - 님) 나’는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를 존재케 한 ‘너’, 나를 존재케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와 ‘것’들은 과연 스스로 존재한 것인가?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원숭이에서 진화? 그러면 그 원숭이는?

이렇게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너’와 ‘것’들을 존재케 한 ‘절대자’를 인식하게 된다.

그 절대자의 이름을 옥황상제님, 야훼님, 알라님, 하느님, 천주님……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이 절대자를님’이라고 통칭하자.

님’이 계시고,

그 ‘님’의 섭리로 ‘우리’라고 말하는 ‘나’와 ‘너’와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님’을 부정할 수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

‘님’을 부정하는 것은 곧 ‘나’와 ‘너’와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와 너’, ‘나와 것’, ‘나와 님’의 상호관계

 

 나 - 것(경제적 관계 : 소유와 이용의 대상)

물질과 재화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물질 만능주의, 배금주의, 한탕주의, 쾌락주의에 빠지는 사람은 물질의 노예에 불과할 뿐이다.

 

 나 - 너(윤리적 관계 : 존중과 의존의 대상)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극단적 개인주의, 독선적 이기주의, 배타적 우월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인간성이 좋지 않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나 - 님(종교적 관계 : 섬김과 의탁의 대상)

 나 - 너’, ‘나 - 것’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하고 지켜나가기 위해

인간 사회에는 윤리 도덕적 규범, 법, 규율, 전통 등이 기준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기준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민족과 국가에 따라, 사상과 이념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일부일처와 일부다처, 남녀평등과 성차별, 인간평등과 인종차별, 신분평등과 신분계급,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독재체제와 민주체제, 성장론과 분배론, 자연보호와 경제개발 등등)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만을 고집하면서

 ‘나’와 생각이 다른 ‘너’를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하게 된다.

그래서 불화와 다툼, 분쟁과 전쟁이 일어난다.

‘나와 너’, ‘나와 것’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고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국가, 민족, 시대, 장소 등을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기준이 필요하다.

즉 ‘나 - 님’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하고 지켜나가면서

그것을 ‘나 - 너’, ‘나 - 것’이 맺는 관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나- 님’, ‘나 - 너’, ‘나 - 것’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는 사람을 우리는 훌륭한 인격자라고 말한다.

 

타고난 종교적 심성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동물들은 자연의 위력에 그대로 굴복할 뿐이지만,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할 줄 아는 능력과 지혜를 가졌다.

또한 인간은 자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인간은 왜 세상에 태어났으며,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는가?

-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쳐올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고 완전한 행복과 영원한 삶을 누리기 염원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은 극히 제한되어 있고, 능력도 한계가 있으며, 특히 죽음을 거부할 수 없다.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절대적인 힘을 지닌 초월적 존재,

즉 하느님에게 의존함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넘어선 삶의 완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러한 심성을 ‘종교적 심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종교적 심성은 인종이나 민족, 학식이나 재산 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고 보면 인간을 ‘종교적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 17,23-27(교리서 11-12쪽)을 읽는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낯선 분이 아니시다.

인간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미처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해 왔고, 하느님을 예배해 왔다.

그만큼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종교란?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다. 원시종교, 유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등

여러 종교들과 종파들이 저마다 독특한 교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종교들은 가르침이나 조직이나 예배 양식 등에서 서로 비슷한 점도 있지만

공통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의 구원을 스스로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는가 하면,

어떤 종교에서는 하느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종교란 이런 것이다” 하고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종교라는 한자어를 풀어보면 종(宗)은

 “모든 것의 중심, 으뜸, 근본”을 뜻하고(종가, 종손, 종정 등),

 교(敎)는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가르침”, “세상에서 배워야 할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

 “세상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할 으뜸 되는 도리”이다.

 

서양 언어에서 종교(Religio)라는 말은 “인간이 하느님을 다시 인식한다”,

“인간을 하느님께 다시 묶어 맨다”, 또는 “인간이 하느님을 다시 찾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본래의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

즉 인간이 예전에 알고 믿고 따랐던 하느님께 다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종교를 갖는다는 것을 흔히 “귀의(歸依)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자신의 근본을 알아보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며, 인생을 살아가는 올바른 길을

하느님의 가르침 안에서 찾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참 종교의 조건

세상에는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람들을 현혹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이비 종교 단체도 많다. 참 종교의 조건은

 

첫째, 종교는 이성을 초월할 수는 있어도 이성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죽은 사람에게 교주가 만든 생명수를 먹여 부활시킬 수 있다는 주장.

․교리를 앞세워 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에게 수혈을 못하게 하여 목숨을 잃게 하는 행위. 등등

 

둘째, 종교 때문에 인륜을 거스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교단, 또는 교주)께 많이 바치면 현세에서 복도 그만큼 많이 받을 수 있다면서

가정 파탄에 이르도록 재산이나 헌금을 강요하는 행위.

․한 가족이라도 같은 신앙을 갖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고 위협하여

 결국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 등등

 

셋째, 종교의 진리는 시대나 장소에 따라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종말이 곧 닥쳐오는데

자기 교파에 속하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위협하는 행위.

․세상이 종말 되는 날짜까지 지정했다가, 그 날이 지나가면 계산이 잘못 되었다고 하면서

또 다른 날짜를 지정하는 행위. 등등

 

어떤 사람은 “종교가 별 것 있느냐? 사람 도리를 잘 하고 착하게 살면 되는 것 아니냐?”

하고 말하지만, 종교와 윤리 도덕은 다르다.

윤리 도덕은 인간과의 관계에 국한되지만,

종교는 인간과의 관계는 물론 하느님과의 관계까지 포함한다.

또한 윤리 도덕은 인간을 착한 존재(善)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종교는 선을 뛰어넘어 인간을 거룩한 존재(聖)로 나아가도록 한다.

 

윤리 도덕은 선이라는 목표를 향해 인간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만,

종교가 목표로 하는 거룩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인간이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완성 역시 하느님의 도우심을 통해 이루게 된다.

도덕은 이 세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지만,

종교는 그 완전한 이상이 내세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종교적 삶

종교의 좋은 점은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종교를 갖는다는 것에는 큰 부담을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종교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실하고 올바르게 하도록 가르치는데,

그 가르침대로 살면 경쟁사회에서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주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사회생활을 표현할 때 ‘약육강식’ 또는 ‘생사를 건 전쟁’이라고도 말한다.

이러한 치열한 사회생활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을 밟고서라도 이기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결과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지하철 참사, 부정, 부패, 불의, 사치, 향락, 폭력…).

몹시 어지럽고 불의한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안심하고 살만한 세상인가?

우리는 불의한 사회보다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바란다.

우리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잘 자라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는 정직과 성실로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으면서

늘 기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많다.

또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는 신앙인들이 많다.

(마더 데레사,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 김홍섭 판사 등)

이와 같이 신앙은 사회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되고 활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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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계시종교

“하느님을 본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을 보여달라. 그러면 믿겠다.” 하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 만물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한 송이의 꽃, 한 마리의 새, 한 마리의 물고기… 얼마나 기묘하고 아름다운가?

인간은 그것들의 모형은 만들 수 있으나 그것들의 생명 자체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는 또한 대자연의 웅대함, 우주의 광대함, 그리고 그 운행 질서에 놀라움을 느낀다.

그리고 우주 만물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다스리는 주인은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지혜와 힘을 능가하는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생각에 미친다.

즉, 생명과 자연 질서의 근원이신 절대자,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도 당신을 드러내신다.

양심은 언제나 바른 것을 지향하며, 각자의 내면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규제한다.

올바른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당당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한다.

이 양심의 소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양심은 바로 하느님의 소리이며, 우리는 하느님을 결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이성의 빛으로

우주 만물과 양심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찾음은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흔히 길을 잘못 들어 거짓 하느님에게로 가기 쉽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을 보다 확실하게 알도록 하시기 위해

직접 인간에게로 다가오셔서 당신에 관해 알려주신다.

이것을 하느님의 ‘계시’(啓示)라고 말한다.

 

계시를 가리키는 라틴어 Revelatio는 “휘장을 제거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가면 막이 걷히기 전에 그 안에서

연주 소리, 말소리가 들려 무엇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지만

정확히 어떤 무대장치와 등장인물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막이 걷혀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사실 하느님의 존재, 인간의 생명과 죽음, 죄와 구원, 영원한 삶 등에 관해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진리를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시는 것이 계시인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어떤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터득해서 세운 종교(자연종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손수 진리를 가르쳐주심으로써 이루어진 종교(계시종교)이다.

 

신앙은 계시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인간이 응답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을 보다 확실히 알도록 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직접 당신에 관해 알려 주신다.

그리고 이러한 당신의 계시에 인간이 응답할 수 있도록 비추고 인도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