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 한국 천주교회
우리가 개인의 일기장, 가족들의 앨범, 가문의 족보 등을 잘 보관하고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까닭은 그 안에 개인, 가족, 조상의 소중한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 안에는 시작과 성장, 성공과 실패, 전통과 가르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보면 그 사람, 그 가족, 그 민족과 국가를 알 수 있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여러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독일과 달리,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반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과거의 침략 역사를
또다시 되풀이할 수 있으리라는 우려를 씻을 수 없는 것이다.
천주교의 유래
천주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는 그분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메시아)는 '구세주’ 즉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생전에 훌륭한 가르침과 놀라운 행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았지만,
불과 33살의 나이에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신이 미리
약속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자 그들은 마침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라는 믿음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예수님에 관한 이러한 증언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초창기 신앙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천주교의 시작이다. 이때가 서기 30년경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곧 유다교 지도자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다른 지방이나 이웃 나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박해가 교회공동체를 약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이스라엘 각 지방과 시리아, 그리스, 로마 등 해외로까지
급속히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사도들도 열성적인 전도 여행으로 그리스도교 전파에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은 여러 신들을 숭배했고, 황제들도 신으로 자처했다.
따라서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와의 종교적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교세 확장은 로마의 황제들에게 정치적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로마 제국은 이민족의 침략이나 식민지의 독립투쟁, 노예들의 반란에 늘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의 여러 신들과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불경스런 존재로
인식하고, 그들이 국가에 적대 행위를 한다고 단정하여 극심한 박해를 가했다.
네로 황제(제위 54-68년) 때인 서기 64년 7월,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시중에서는
“네로 황제가 새로운 도시를 건축하기 위해 빈민가를 태웠다”는 소문이 떠돌아 민심이 흉흉해졌다.
정치적 위기를 느낀 네로는 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뒤집어 씌워 박해를 가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 역시 무고한 조선인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워 무차별 학살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붙잡혀 검투사들의 칼에 희생되거나 맹수들에게 던져졌다.
이처럼 혹독한 박해는 거의 3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은 동굴이나 지하묘지(까따꼼베)에 숨어 형제적 사랑을 나누면서 신앙을
굳건히 지켜냈다. 그토록 가혹한 처지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은 로마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자연스럽게 신도수가 급속히 늘었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로마 제국 전체에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소수 집단의 종교에서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중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세속화되었고,
이에 대한 개혁의 외침과 쇄신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도 교회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16세기에 마르틴 루터 등에 의해 일어난 일련의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이 천주교 내부에서 이루어졌다면 쇄신과 발전이 보다 빠르게 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종교분열로 이어짐으로써
1,500여 년 동안 하나로 이어져오던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고,
거기에서 또 무수한 분파를 낳는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수많은 분파로 나누어진 개신교 신자들을 ‘갈라진 형제’ 라고 부르면서
언젠가 다시 일치를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물론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쇄신에 박차를 가하여 교회의 참 모습을 되찾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보다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 왔다.
가톨릭교회는 전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신앙의 진리를 천명하고 교회의 쇄신을 위해
논의하는 회의를 끊임없이 가졌으며,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현대세계에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위상을 재정립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천주교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인 사도들로부터 이어온 정통 그리스도교로서,
지난 2천 년 동안 서구 문화와 문명의 정신적, 사상적 토대가 되어 왔다.
또한 학문과 예술에도 지대한 공헌을 해 왔다. 그리고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애의 증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여 왔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교회는 또한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들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 역시 인간적인 실수와 잘못도 저질러 왔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한 인간적인 조직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가 저질렀던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고 용서를 청했다.
이렇듯 교회는 자신의 잘못을 겸손히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약 12억 명의 신자들이 같은 믿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천주교의 한국 전래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220년 전인 조선왕조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천주교의 가르침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서(西學書)를 통해서였다. 이 한문 서학서들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고, 서양의 문명 즉 지리․천문․역사․과학․수학 등을 소개하는 책들이다.
이 가운데 특히 유명한 서적은 ‘마태오 리치’ 신부에 의해 한문으로 쓰여진
‘천주실의’(1603년 발간)이다. 이 책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천주교와 유교․불교․도교와의
관계를 밝혀 중국 지식층에게 천주교 신앙을 알리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러한 서학서들은 당대의 조선 학자들에게도 널리 읽혔다.
그런 상황에서 이벽․이승훈․권철신․정약용․정약종․이가환 등 주로 남인에 속한 학자들은
주어사 천진암(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에 모여 강학회를 갖고
학문적 연구 끝에 천주교야말로 참다운 종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주공경가’(교리서 24쪽․이벽 지음. 이 때가 1779년이었다)를 만들어서 기도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였다.
[천주공경가] 교리서 24쪽을 읽는다.
그들은 천주교 서적을 통한 교리 연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마침 그 때에 이승훈이
사신으로 중국에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이승훈은 북경 성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천진암에서 함께 교리를
연구하던 학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지금의 명동 성당 부근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갖고 신앙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때가 1784년으로, 이 해를 한국 천주교회 창립 연도로 잡는다.
세계 천주교의 선교 역사를 보면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 나라에 입국하여 신앙을 전파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스스로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발견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세계 교회사에서 유일한 일이다.
천주교의 새로운 가르침
조선 왕조는 국가와 사회의 이념적 근본을 유교에 두고 있었다. 유교의 경전들을 익혀야
과거를 볼 수 있었고, 그 가르침에 따라야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유교에
회의를 품는다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 사회는 지배 계급의 학문이던 주자학이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공리공론으로 흘렀고,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 등 당파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병자호란, 임진왜란 등 외국의 침략으로 인한 파괴와 혼란이 겹치고,
문벌과 권력의 횡포가 극에 이르렀다.
이때에 유교 이념을 개혁함으로써 실용적인 사상 체계를 찾는 운동이 ‘실학 운동’이었고,
이러한 실학파 학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서 그 길을 찾았던 것이다.
조선 사회는 양반과 중인 그리고 노비와 같은, 신분에 따른 여러 가지 차별을 당연하게 보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 상업 자본이 대두되는 등 사회적, 경제적 변화로 인해 신분 제도가
빠르게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똑같은 자녀들이라는,
‘평등사상’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처음에 젊은 양반 계급의 지식층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그 후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어 중․하층 계급의 사람들과 아녀자들도 천주교 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중인이나 상민 계층들이 양반과 동등한 자격으로,
더구나 아녀자들이 남자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천주교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온갖 박해를 딛고 성장한 한국 천주교회
천주교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신분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와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천주교란 군신과 부자간의 의를 파괴시키고,
남녀 귀천의 신분 질서를 어지럽혀 전통적인 윤리 도덕을 뿌리째 흔드는 종교로 보였을 것이다.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한 주요한 종교적 요인은 조상제사에 관한 문제였다. 당시 엄격한
유교 형식의 조상제사는, 주로 양반 집안을 중심으로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가문의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 행했던 것이지, 일반 서민들까지 보편적으로 지내던 풍습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상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양반들에게 있어서 신분의 포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조상제사 문제는 천주교의 유일신 사상과 유교적 전통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선교에 임했던 서양인 선교사들은 유교적 조상제사에서 단순한 사후 효도가 아니라
조상을 신으로 여기거나 조상의 혼을 달랜다는 미신적 행위를 보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신자들에게 제사를 바치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천주교를 탄압한 정치적 요인으로는 천주교를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파악한 데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가 시작되자 숨어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양인 선교사들을 영입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했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천주교를 서양의 무력을 동원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이적 단체로 인식했다.
그밖에도 당파 싸움, 세도정치 싸움 등 치열한 내부적 권력다툼과 쇄국주의 정책이
천주교를 박해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의 천주교는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4대 박해를 비롯하여 100여 년 동안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박해를 겪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흥선 대원군에 의해 주도된 병인박해는 가장 처참했다.
불과 수개월 사이에 그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불란서 신부 12명 가운데 9명이 참살 당했고,
조선인 신자 8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계속되는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은 사제 영입에 힘써, 1794년 중국 북경에서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주 신부가 1801년 4월 순교한 이후 33년 동안
조선의 천주교회는 사제 없이 신앙생활을 지켜냈다. 1834년에야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하였고, 차츰 불란서 외방선교회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했다.
그들은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상주차림을 하고 다녔다.
마침내 1845년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중국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되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김 신부는 이듬해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천주교 신자의 수는 끊임없이 늘어나
1850년 신자수가 1만 1천여 명이었는데, 1865년 신자 수는 2만 3천여 명에 달했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외딴 산골로 들어가 교우촌을 형성하고
옹기그릇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더라도
이를 견디어내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신앙을 증거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것을 ‘순교’(殉敎)라고 한다. 박해 시대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한국의 순교자들 가운데 103명은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이 되는 1984년에
전세계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 공경하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
쇄국정책을 펴오던 조선은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1886년 한불조약을 맺음으로써
국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천주교는 전국 각지에 성당을 짓고 선교 활동에 나섰으며, 교육 운동과 언론 운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오늘날에도 한국 천주교는 순교 선열들의 믿음과 사랑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적극적인 선교 활동은 물론이려니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활동, 사회 정의 수호와 인권 보호 활동 등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는 약 500만 명이라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봉사하고, 남북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북한 형제들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천주교 신자들은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하고 있다.
천주교는 단순히 사상이나 생활철학이 아니다. 천주교란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삶 자체를 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서로 사랑을 나누며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 지혜의 샘 > 김양진 선생님의 가톨릭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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