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 우리가 내려야 할 결단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들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는 것을 피하고 복을 받아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인생사가 자기 뜻대로,
자기 능력이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인륜대사를 앞두고 있거나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선택의 결과를
미리 알고 싶어 하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실한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올바른 삶의 기준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직장인들은 “오늘 점심은 뭘 먹지?” 가정주부들은 “오늘 저녁 반찬거리는 뭘 장만하지?”
이처럼 익숙한 일상사는 판단과 선택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자기 스스로
“내가 어떤 판단을 하고 무엇을 선택하고 있다”라는 의식조차 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판단과 선택의 기준도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어제 곰탕을 먹었으니, 오늘 점심은 자장면으로 하지!”
“봄이 왔으니, 저녁 반찬으로 냉이무침이 좋을 거야!”
그러나 인생사에서 비중이 큰일에 부딪치면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평생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나 자녀들의 대학 선택에 대한 당신의 기준은 무엇인가?
(경쟁률, 수능성적, 학교의 명성, 본인의 적성, 장래의 직업선택…)
본인이나 자녀들의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당신의 기준은 무엇인가?
(용모, 학력, 직업, 재산, 집안배경, 출신지역, 성격, 건강, 인격…)
판단과 선택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각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그 기준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에 있어서도 이성적인 평가의 기준대로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의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막상 원서를 낼 때가 되면 대학의 간판에 좌우되고 만다.
결혼 상대자의 인격이 중요하다는 점은 수긍하면서도
직업이나 집안 배경을 우선적으로 따진다.
부정부패가 옳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은밀하게 뇌물과 청탁을 주고받는다.
이런 현상을 가치관의 파괴, 가치관의 전도라고 말한다.
사막을 여행했을 때의 경험이다. 컴컴한 새벽, 막막한 모래언덕뿐인 사막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가고자 하는 목표를 행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자칫 길을 잘못 들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와 나침반을 사용하거나 유능한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딪치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뚜렷한 기준이 필요하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들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때 그릇된 가치관에 떨어지고 만다.
물질적 소유나 권력의 쟁취가 인생의 최고 가치가 아니라는
확고한 기준을 갖게 될 때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다.
신앙은 우리가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앙을 갖게 되면 하느님의 가르침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생활의 지침이 되기 때문에 참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게 된다.
참된 가치관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므로 신앙은 우리의 올바른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기준이다.
천주교는 우리에게 참된 인생관과 가치관을 심어줄 것이다.
신앙과 불신앙
신앙을 갖기를 권유했을 때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저런 이유를 댄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다. 힘이 세야 남을 굴복시키고 뭐든지 할 수 있다!”
조폭들의 생리가 이것이다. 세계적인 무쇠주먹 무하마드 알리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으며,
가라데와 레슬링에서 천하무적이었던 역도산도 칼에 맞아 숨졌다.
“하느님이 밥 먹여 주냐? 돈만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돈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돈 자체가 참 행복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한다.
그 돈 때문에 불화와 반목, 투기와 도박, 강도와 살인이 저질러진다.
“하느님 빽이 빽이냐? 하다못해 면장 빽도 하느님 빽보다 낫다. 권력이 최고다!”
그러나 권력 또한 만능이 아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전권을 휘둘렀던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말로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가 동원되고,
엄청난 비자금이 불법적으로 조성되어 정치인들에게 몰래 제공되는 부정과 부패가
우리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세상에는 즐기고 놀 일도 많다. 그런데 하느님 눈치나 보면서 고리타분하게 살아?”
하지만 쾌락을 좇다가 가정이 파괴되고 가산을 탕진하여 패가망신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돈과 권력과 쾌락의 추구는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를 안겨준다.
루가 16,13(교리서 18쪽)을 읽는다.
우리는 우리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한다.
그리고 부모님의 당부 말씀은 언제나 올바르게 살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임을 잘 알고 있다.
부모님의 말씀을 거꾸로만 행했다는 ‘청개구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라는 말씀은, 재물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하느님으로 모시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죽어서 천당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으로 보살펴주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것, 삶과 죽음까지 온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로막는
일체의 행위를 끊어버리겠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미신행위와 우상숭배의 거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기로 다짐한 사람은 우상숭배나 미신행위를
끊어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점쟁이에게 찾아간다.
정초에는 1년 운세를 보고, 이사할 때는 손 없는 날을 잡고, 결혼을 앞두고는 사주 궁합을 본다.
그리고 무슨 액운이 끼었다느니 손재수가 있다느니 하는 말에 놀아나 굿을 한다.
신앙인은 이런 유혹들을 물리쳐야 한다.
조상의 묘자리를 잘 써야 복을 받고 잘못 쓰면 재앙을 받는다는 식으로 풍수지리설을
맹신한다거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부적을 몸에 지닌다거나 하는 미신행위도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에도 컴퓨터의 역술 싸이트들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심지어 로또 복권을 살 때도 점을 쳐보고 사라고 하는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이 쉽게 미신행위에 빠져드는 가장 큰 이유는 현세에서 복락을 누리려는 데 있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등장한 것이 ‘역학’이니 ‘통계학’이니 하며
마치 과학적 근거라도 있는 듯이 그럴 듯하게 포장된 ‘운명론’이다.
즉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운명이 있다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한 날 한 시에 몇 명이 태어날까? 얼마 전 통계에 따르면 1만 명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루에 2,400명 정도의 어린아이가 태어나는데,
한날한시에 태어나는 아기만 100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들의 운명이 모두 똑같은가?
아니다. 그런데도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보고 그 사람의 사주가 어떻다느니
궁합이 어떻다느니 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신이 없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점술이나 운명론에 의존하면서 요행수를 바라거나, 팔자타령을 하거나
남의 탓(귀신 탓, 조상 탓, 환경 탓, 다른 사람 탓…)이나 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사람들이 나무나 바위, 소나 뱀 따위를 신령한 존재, 영험한 존재로
신격화하여 우상으로 섬겼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숭배하지는 않지만,
또 다른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다. 그것은 돈과 권력과 명예, 성과 쾌락, 이념과 국가,
건강과 미모 따위이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도구요 수단에 불과한 것들을
오히려 삶의 목적으로 삼고 절대시할 때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주시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선행과 덕행을 쌓는 등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도외시한 채 하느님께 복채나 던져주면서 “내 병 낫게 해주십시오!”
“우리 아들 합격시켜 주십시오!”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빌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이고, 하느님도 별 수 없구나!” 하고 불평을 하는 등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기적적으로 복을 내려주시기만을 바랄 때
그것을 ‘기복신앙’(祈福信仰)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마치 자기의 소망을 이루는 데
사용하는 도구쯤으로 여기고 이용하려 한다면이는 미신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시한종말론의 거부
시한부 종말론이란 세상 종말의 날짜가 미리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다미 선교회’라는 단체에서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난다고 하면서
신도들을 현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혔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 뒤로도 여러 번 날짜를 번복하다가 세상의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시한부 종말론은 대개 구약성경의 ‘다니엘서’나 신약성경의 ‘요한묵시록’ 같은
예언서들의 일부 내용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세상 끝 날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를 미리 알려주는 점술서적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르13,32) 하고 가르치셨다.
개신교의 어느 종파에서는 “하느님께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를 144,000명으로
미리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빨리 자기 교회에 들어오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한묵시록(14,1-5)의 내용을 그 근거로 내놓는다.
그들은 성서에서 상징적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숫자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거나
고의적으로 왜곡하여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의 ‘144,000’명은 구원받을 사람들의 실제적 숫자가 아니다.
‘144’는 완전을 뜻하는 ‘12’의 제곱이며, ‘1,000’은 충만함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즉 “하느님은 온 세상의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종말신앙은,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하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라,
세상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과 만나서 참 행복과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부터
죄를 멀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그 기쁜 날을 맞이하도록 준비하라고 가르친다.
전생과 윤회사상의 거부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근본 문제이며, 가장 큰 수수께끼이다.
“죽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후에는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장나는가, 아니면 저승살이가 또 있는가?” 등등.
대부분의 종교는 사후세계를 믿지만 그 내용은 각각 다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왕)가 죽으면 배를 타고 빛의 나라를 향해 항해를 하게 되는데
그곳에 도착한 다음 다시 이 세상으로 환생한다고 믿었다.
그리스도교는, 불교나 힌두교와 달리, 전생이나 윤회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사는 동안 쌓은 업보에 따라 다른 인간이나 동물로 다시 환생하는데,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끝없이 환생을 되풀이한다는 것이 윤회 사상이다.
그런데 인생은 ‘고통의 바다’(苦海)이기 때문에 윤회를 끝내기 위해서는
모든 업보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곧 ‘해탈’이다.
이와 같이 윤회사상은 자기구원과 자기완성의 교설이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구원되거나 완성될 수 없는 노릇이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참 행복과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하여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환생을 통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기 위한 단 한 번의 기회이다. 그리고 이 결정적인 만남을 위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을 알고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요가․선(禪)․기공(氣功)․단전(丹田) 호흡 등과 같은 건강요법이나
정신수련 방법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동양 전래의 방법으로 심신을 수련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건강 수련법이 점차 ‘초능력 개발법’으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서는 ‘종교적 의미’까지 붙여서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구나 기(氣)를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 여겨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거나,
‘기 체험’을 ‘신(神) 체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모든 물체는 에너지로서의 ‘기’를
갖고 있으며 이 에너지는 물체가 소멸되더라도 다른 물체에 전이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된다는 일종의 ‘환생’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분명히 배치된다.
신앙인의 자세
세상은 우리에게 “힘이 세고 가진 것이 많아야 잘 살 수 있다”, “자기만, 자기 가족만,
자기 지역만, 자기 나라만 편히 살 수 있다면 그만이다”라고 가르친다.
세상은 “하느님의 목소리인 양심의 소리 따위는 귓등으로 흘려버리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 아니며, 참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잣대로 삼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또한 이제부터는 우리 삶의 참된 주인은 자기 자신이나 우상 따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차별 없이 대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참된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 등등 모든 것이 다르게 변화된다.
가치 기준이 올바르게 세워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온갖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끊어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따라 살기로 결단함으로써 시작된다.
'성경, 지혜의 샘 > 김양진 선생님의 가톨릭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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