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봉모 신부님이 쓰신 책 <상처와 용서> p.42-52 에서 옮겼습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에게 값싼 용서를 베풀자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값싼 용서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값싼 용서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애써 좋게 봐주는 것이다. 애써 좋게 봐준다는 것은 저지른 악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래, 어머니도 인간이지. 어머니가 내게 잘못한 것은 그분의 인간적 결함 때문이야. 그분도 자기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다가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했겠지. 어머니도 어렸을 때 나름대로 상처를 받았을 테고 자라면서 그런 인격을 갖게 되었기에 당신도 어쩔 수 없이 아픔을 주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값싼 용서요, 애써 좋게 봐주는 행위이다.
한편 진정한 용서는 저지른 잘못이나 악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위의 예에 대한 적극적인 용서는, ‘어머니가 나에게 한 짓은 어떤 이유에서든 잘못이야. 어머니는 내게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도, 그런 잘못을 저지른 거야. 내 인생에 큰 해를 입히고, 큰 상처를 주었어. 하지만 나는 이제 어머니를 용서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가 이뤄지려면 먼저 유죄판결이 있어야 한다.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용서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가에서 종교적 깨달음의 여러 단계를 표현하는 유명한 명제가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로다.’,‘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만물의 실상을 보려는 사람들, 즉 산과 물이 끊임없이 부식되고 풍화되면서 그 모양을 달리함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는, ‘산이 산이 아니요, 물이 물이 아니다.’ 이렇게 본질의 세계를 바라보는 단계가 더 깊어지면, 그 다음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산과 물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무상하게 변한다 해도 눈에 보이는 그것은 분명 산과 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과정도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와 비슷할지 모른다. 내게 절대적인 의지처였던 어머니가 언젠가부터 어머니가 아니었지만, 깊은 이해를 갖는 시점에서 어머니는 다시금 어머니인 것이다.
이해하고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내게 잘못한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분노하여야 한다. 분노는 마치 상대의 범죄 사실에 대해 심판을 내림과 같다. 그런데 이 분노를 오해 품게 되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상처를 입게 된다. 분노를 느끼고 나면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하여야 한다.
한 사람이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학대받았거나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상담치료사들은 그 사람에게 “참 안됐군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인정한 그 고통은 궁극적으로 그를 건강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과정에서 용서 콤플렉스에 빠지면 안된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용서라는 말 앞에서 종교적 콤플렉스를 느낀다. 용서라는 말만 들으면 왠지 움츠러들고 자신이 없어진다. 자신이 위선자 같고, 엉터리 신자 같고, 하느님 앞에서 죄송스러움을 느낀다. 사순절이나 대림시기에 판공을 본 많은 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 시달린다. ‘나는 정말로 용서하였는가?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여전히 아프고 섭섭한 것일까?’ 이런 자문자답이 있고 나서 ‘그래,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거야.’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오해가 바로 용서에 대한 오해이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였다면 더 이상은 그 사람 때문에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행위로서 용서한다는 것과 느낌 차원에서 용서한다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용서하는 행위는 하나의 종교적 선택이요 결심이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주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내리는 종교적 행위이다. 그런데 느낌으로 상대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한 종교적 행위의 용서와는 관계가 없다.
우리가 용서를 한다고 해도 몸 자체가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신앙 안에서 용서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아픈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만나면 여전히 얼굴을 굳어지고 아픈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가 느낌 차원, 몸 차원에서 상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 상처가 아물기 위해 시간이 걸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만약 박은 상처가 아주 크고 깊다면 아무는 시간은 그만큼 더 걸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이용당했을 때,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을 때, 명예 훼손을 당했을 때... 이 모든 상처들은 시간이 걸려야만 아물 수 있는 상처들이다. 비록 종교적 행위로서 상대방을 용서하였다 해도 이렇게 큰 상처들이 아물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다.
미움과 증오의 감정으로 괴로울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은 평화를 얻기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내가 이미 상대방을 용서했어도 마음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대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만약에 자기 마음을 들어주는 일이 안 되면 자기를 죽이게 된다. 곧 자신이 참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고 자기 비판과 비난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방 때문에 상처를 받아 피를 흘리고 있는 마당에 내 스스로 또 생채기를 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한 번 다음 사실을 자각하여야 한다. 용서하는 행위는 하나의 종교적 결심으로서 분명히 행동화할 수 있지만 느낌과 몸으로까지 용서를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만약 이 점을 모르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늘 용서할 줄 모르는 못난 사람으로 탓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위선자라고 단죄할지도 모른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을 용서할 필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상처받은 내가 바보지. 그런 내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를 단죄하고 벌을 줌으로써 우리는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보잘것 없는 사람, 실패한 인물로 만든다.
자기 단죄는 파괴적이고, 병적이고, 비그리스도교적이다. 자기 멸시, 자기 학대에 빠질 때 우리는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단죄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무리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려 해도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용서는 무색할 뿐이다. 유다를 보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죽이게끔 넘겨준 자들(또는 배반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 중의 한 사람인 유다를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하지만 유다는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에 결국 자살해 버린다.
한편 자신을 용서한 자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일어섰다. 성서의 훌륭한 인물은 다 스스로를 용서한 자이다. 다윗, 베드로, 막달라 마리아, 바오로 등. 이들은 얼마나 부끄러운 죄를 지은 자들이었는가! 다윗의 경우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베드로의 경우는 스승을 배반하고 저버린 죄를, 막달라 마리아는 성범죄를,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죄를 지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자기 자신을 용서했으며 새롭게 태어났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용서라는, 용서의 깊은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고 자신을 용서할 때에 구원의 충만함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의 경우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여인아, 너를 단죄한 사림이 있더냐?” 불으시고 “나도 너를 단죄치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단죄치 않으니, 그 여인도 스스로를 단죄치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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