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산책 / 고통 앞에서도 하느님만을 - 송봉모 신부님
세상에 펼쳐지는 고통과 악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음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곧 하느님은 고통과 악을 없애고 싶어도 없앨 능력이 없거나, 능력이 있어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능력도 없고 마음도 없거나.
고통과 악을 없애고 싶은데 능력이 없다면 하느님은 무능한 존재이다. 능력은 있는데 없애려는 원의가 없다면 하느님은 악한 존재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고통과 악을 없앨 능력도 있고, 없애고자 하는 원의도 있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일찍이 고대 철학자 에피크루스가 펼쳤던 논리이며 또한 우리 모두가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던지는 질문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을 그대로 놔두는가?
한 번은 여론조사 전문가가 전국의 그리스도인 성인 남녀 표본 집단을 추출하여 의견을 물었다. “하느님께 딱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하느님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신다면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고 싶습니까?”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은 “세상에 왜 고통이 있습니까?”였다. 모두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답을 얻고 싶은 것이다.
한 자매님이 임신했을 때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자매님은 비만이 되지 않으려고 매일 10킬로미터를 걸었고 출산을 기다리는 엄마들의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세상에 나올 아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해 나갔다. 그런데 출산 과정에서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세상으로 나온 아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랴부랴 중환자실로 옮겨 집중 치료를 받았으나 출산 과정에서 뇌를 다치는 바람에 평생 장애를 갖게 되었다. 지금 네 살이 다 되어가는데 한번도 걸은 적이 없고, 말도 못하고 제 손으로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다.
이 자매님과 남편은 딸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딸아이 또래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들에게 딸아이는 시간과 돈과 온 힘을 다 쏟아 부어도 부족한 존재, 결국에는 모두를 고갈시켜 버리는 존재다. 딸아이 치료를 위해서 돈을 끌어대느라고 재정적 압박이 너무 심하고, 앞으로 얼마나 더 보살필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 때문에 여유로운 마음은 꿈도 꾸지 못한다. 아침마다 부부는 서로의 얼굴에서 깊은 상실감을 본다. 마음으로는 아이를 끝까지 잘 돌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확신도 힘도 없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슬퍼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했지만….
고통이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그 원인을 찾지 못할 때이다. 납득할 만한 원인이 있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받아들일 만할 것이다. 만일 소주 다섯 병을 먹고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 전신마비가 되었다면 이런 처지가 괴롭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취해서 운전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기에. 사랑하는 자녀가 로프도 없이 암벽을 타다가 추락해서 죽었을 경우,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고 괴로워할 테지만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경솔하게 로프도 없이 등반하다 죽었기에.
이렇게 내 앞에 벌어진 고통이 인과관계를 갖고 있을 때는 그 고통 때문에 엄청난 슬픔과 고난을 겪지만 그래도 그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나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로 어느날 갑자기 고통이 들이닥친다면 나는 하느님을 향해서 원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정신건강 문제로 제대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신건강 문제를 제기한 군의관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그 군의관을 쏴 죽였다. 그러고는 병원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까지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다. 헌병들이 출동하여 사살하기까지 그는 4명을 죽였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가 쏜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친 희생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왜 총을 쏘는지도 모르고 희생되었다. 그들이 그날 그 시간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총에 맞은 유일한 이유였다.
이렇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과정도 없이 갑작스레 그곳에 그 시간에 있었던 이유로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정말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이렇게 무작위적이고 무의미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은 결국 하느님과 신앙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고통을 허락하신 하느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우리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느님을 계속 사랑하고 신뢰할 것인가?” 이런 점에서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자문자답은 이해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을 참아주고 믿어주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느님이 악한 인간을 잘 살도록 내버려둘 때 참는 것은 정말 힘들다. 예레미야 예언자도 이렇게 부르짖는다.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배신자들은 모두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합니까? 당신께서 그들을 심으시자 그들이 뿌리까지 내리고 자라서 열매마저 맺습니다”(예레 12,1ㄷ-2).
한 사목자는 말한다. 주변에 어떤 악한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를 보면서 ‘저러다가 곧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승승장구한다. 그러면 우리는 또 생각한다. ‘죽을 때는 벌을 받을 거야’라고. 그런데 웬걸, 죽을 때도 온갖 향락을 누리며 죽는다.
원수가 잘될 때, 악한 인간이 흥성할 때 우리는 ‘하느님, 도대체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하며 하느님 정의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대답 없는 하느님께 실망하여 무신론자가 되거나 냉담자가 된다. 하지만 무신론자나 냉담자가 되기 전에 먼저 다음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저 세상의 영원한 생명과 이 세상의 편안한 삶 중에서 하느님이 어떤 것을 돌보아 주시기를 원하는가?”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포장이 잘된 8차선 도로와 비포장도로가 있다. 당신은 어떤 길로 달리고 싶은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어느 길’이 아니다. 길은 목적지가 중요하다. 아무리 포장이 잘된 도로라 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면 그 길은 가지 말아야 한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면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끝’은 보지 않고 ‘길’만 비교한다.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하느님은 나를 왜 이리 험한 길로 인도하시냐고 불평한다. 또 세속적으로 잘 나가는 악인들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왜 저런 악인들만 평탄한 길로 인도하시느냐고 원망한다. 이러한 원망이 생길 때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비틀거리고 절면서 바른길을 가는 것이 편안히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한다.
다짐하는 의미에서 또다시 질문해 보자! 우리는 두 갈래 길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첫번째 길은 높은 산과 언덕 그리고 절벽을 통과해서 가야 하기에 몸은 지쳐서 비틀거리고 다리를 삐어 절뚝거리게 된다. 그런데 그 길의 끝은 생명의 문이다. 두번째 길은 아주 평탄하고 곧아 콧노래를 부르면서 경쾌하게 갈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의 끝은 죽음의 문이다. 우리는 두 갈래 길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
-출처- 바오로 딸
세상에 펼쳐지는 고통과 악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음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곧 하느님은 고통과 악을 없애고 싶어도 없앨 능력이 없거나, 능력이 있어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능력도 없고 마음도 없거나.
고통과 악을 없애고 싶은데 능력이 없다면 하느님은 무능한 존재이다. 능력은 있는데 없애려는 원의가 없다면 하느님은 악한 존재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고통과 악을 없앨 능력도 있고, 없애고자 하는 원의도 있다면 어떻게 이 세상에 고통과 악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일찍이 고대 철학자 에피크루스가 펼쳤던 논리이며 또한 우리 모두가 고통 앞에서 하느님께 던지는 질문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을 그대로 놔두는가?
한 번은 여론조사 전문가가 전국의 그리스도인 성인 남녀 표본 집단을 추출하여 의견을 물었다. “하느님께 딱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하느님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신다면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고 싶습니까?”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은 “세상에 왜 고통이 있습니까?”였다. 모두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답을 얻고 싶은 것이다.
한 자매님이 임신했을 때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자매님은 비만이 되지 않으려고 매일 10킬로미터를 걸었고 출산을 기다리는 엄마들의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세상에 나올 아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해 나갔다. 그런데 출산 과정에서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세상으로 나온 아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랴부랴 중환자실로 옮겨 집중 치료를 받았으나 출산 과정에서 뇌를 다치는 바람에 평생 장애를 갖게 되었다. 지금 네 살이 다 되어가는데 한번도 걸은 적이 없고, 말도 못하고 제 손으로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뿐이다.
이 자매님과 남편은 딸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딸아이 또래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들에게 딸아이는 시간과 돈과 온 힘을 다 쏟아 부어도 부족한 존재, 결국에는 모두를 고갈시켜 버리는 존재다. 딸아이 치료를 위해서 돈을 끌어대느라고 재정적 압박이 너무 심하고, 앞으로 얼마나 더 보살필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 때문에 여유로운 마음은 꿈도 꾸지 못한다. 아침마다 부부는 서로의 얼굴에서 깊은 상실감을 본다. 마음으로는 아이를 끝까지 잘 돌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확신도 힘도 없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슬퍼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했지만….
고통이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그 원인을 찾지 못할 때이다. 납득할 만한 원인이 있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받아들일 만할 것이다. 만일 소주 다섯 병을 먹고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 전신마비가 되었다면 이런 처지가 괴롭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취해서 운전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기에. 사랑하는 자녀가 로프도 없이 암벽을 타다가 추락해서 죽었을 경우,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고 괴로워할 테지만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경솔하게 로프도 없이 등반하다 죽었기에.
이렇게 내 앞에 벌어진 고통이 인과관계를 갖고 있을 때는 그 고통 때문에 엄청난 슬픔과 고난을 겪지만 그래도 그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나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로 어느날 갑자기 고통이 들이닥친다면 나는 하느님을 향해서 원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정신건강 문제로 제대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신건강 문제를 제기한 군의관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그 군의관을 쏴 죽였다. 그러고는 병원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까지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다. 헌병들이 출동하여 사살하기까지 그는 4명을 죽였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가 쏜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친 희생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왜 총을 쏘는지도 모르고 희생되었다. 그들이 그날 그 시간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총에 맞은 유일한 이유였다.
이렇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과정도 없이 갑작스레 그곳에 그 시간에 있었던 이유로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정말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이렇게 무작위적이고 무의미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제기하는 질문은 결국 하느님과 신앙에 대한 질문이다. “이런 고통을 허락하신 하느님은 도대체 어떤 분인가? 우리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느님을 계속 사랑하고 신뢰할 것인가?” 이런 점에서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자문자답은 이해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을 참아주고 믿어주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느님이 악한 인간을 잘 살도록 내버려둘 때 참는 것은 정말 힘들다. 예레미야 예언자도 이렇게 부르짖는다.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배신자들은 모두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합니까? 당신께서 그들을 심으시자 그들이 뿌리까지 내리고 자라서 열매마저 맺습니다”(예레 12,1ㄷ-2).
한 사목자는 말한다. 주변에 어떤 악한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를 보면서 ‘저러다가 곧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승승장구한다. 그러면 우리는 또 생각한다. ‘죽을 때는 벌을 받을 거야’라고. 그런데 웬걸, 죽을 때도 온갖 향락을 누리며 죽는다.
원수가 잘될 때, 악한 인간이 흥성할 때 우리는 ‘하느님, 도대체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하며 하느님 정의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대답 없는 하느님께 실망하여 무신론자가 되거나 냉담자가 된다. 하지만 무신론자나 냉담자가 되기 전에 먼저 다음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저 세상의 영원한 생명과 이 세상의 편안한 삶 중에서 하느님이 어떤 것을 돌보아 주시기를 원하는가?”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포장이 잘된 8차선 도로와 비포장도로가 있다. 당신은 어떤 길로 달리고 싶은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어느 길’이 아니다. 길은 목적지가 중요하다. 아무리 포장이 잘된 도로라 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면 그 길은 가지 말아야 한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면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끝’은 보지 않고 ‘길’만 비교한다.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하느님은 나를 왜 이리 험한 길로 인도하시냐고 불평한다. 또 세속적으로 잘 나가는 악인들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왜 저런 악인들만 평탄한 길로 인도하시느냐고 원망한다. 이러한 원망이 생길 때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비틀거리고 절면서 바른길을 가는 것이 편안히 서서 그릇된 길로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한다.
다짐하는 의미에서 또다시 질문해 보자! 우리는 두 갈래 길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첫번째 길은 높은 산과 언덕 그리고 절벽을 통과해서 가야 하기에 몸은 지쳐서 비틀거리고 다리를 삐어 절뚝거리게 된다. 그런데 그 길의 끝은 생명의 문이다. 두번째 길은 아주 평탄하고 곧아 콧노래를 부르면서 경쾌하게 갈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의 끝은 죽음의 문이다. 우리는 두 갈래 길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
-출처- 바오로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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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생 동안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행복할 때에만 감사하는 것은 조금도 위대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매우 괴로울 때 다른 사람들은 욕하고 실망하는데 반해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감탄해 마지 않을 일이다.
어떤 것에 감사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지혜와 덕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런 감사를 통해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마귀를 부끄럽게 한다!
당신은 이미 생긴 일이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이 불행에 대해 감사의 말을 하자마자,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아픔을 가져 가시고, 마귀는 물러날 수 밖에 없다.
당신이 실망에 빠져 있으면,마귀가 당신의 목덜미에 앉아 있게 된다.
왜냐하면 마귀는 자기의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이 감사를 하면, 마귀는 물러난다.
왜냐하면 마귀는 할 짓어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풍성하게 갚아 주신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느님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기뻐진다.
왜냐하면 올바른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영혼은 당장 해맑은 양심의 평안함에 기뻐한다.
해맑은 영혼에서는 어두워 보일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보다 더 거룩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보다
더 거룩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