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가치를 깨닫게 하소서.
고통의 가치를 깨닫게 하소서.
다정님! 요즘 ‘성령께 드리는 호칭 기도’를 해요. “성령님, 흘러넘치는 은총의 보고여, 저를 가르치시어 고통의 가치를 깨닫게 하소서.”라는 부분이 있어요. 어제 레지오 회합을 하러 가는 길에 문득 그 가치를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하, 고통이 없으면 훌륭한 사랑을 못하는구나.’그 깨달음이 너무너무 기뻐서 단원들한테 이야기했더니, 다들 저를 맛이 간 사람 보듯 하더라구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엄청 들떠 있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랑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니 얼마나 신이 나는지요. 물론 어설프고 틀린 묵상일 수 있지만, 되는 대로 말씀드릴게요.
고통의 편차가 너무 크지 않나요?
항암 일차 주사를 맞고 주님께서 저한테 거저 주신 기쁨과 평화에 푹 젖어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요. 너무 힘들고, 울렁거리고, 피곤해서 거의 5일 동안은 침대에서 한 발짝도 못 내려왔어요. 팔을 못 움직이고 온 몸이 너무 아팠어요. 그래도 마음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하느님께서 제 감정을 건드려서 완벽한 위로를 해주셨거든요. 어찌나 행복한지 암에 걸린 것이 자랑스러울 지경이었어요. ‘고통은 정말로 은총이구나. 더한 고통이 내게 닥친다고 해도 주님이 주신 벅찬 기쁨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가까스로 일어나 앉아서 텔레비전에서 하는‘디어헌터’를 보았어요.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너무 끔찍하더라구요.‘저렇게 죽는 사람이 그럴만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닐 테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왜 저런 끔찍한 고통을 애초에 허락하셨을까? 사람마다 겪는 고통의 정도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어요.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께 따져봐야겠다 싶었어요.
“하느님, 왜 사탄의 힘을 그렇게 세게 허락하셔놓고, 인류의 죄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하셔요? 고통의 편차가 너무 크지 않나요?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이거나, 이해력이 없어서 하느님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이 오면 원망하고 하느님을 떠나잖아요. 근데 그게 하느님 탓인지도 몰라요. 좀 더 친절하게 가르쳐 주실 수도 있으신데.”
레지오 단원 중에 제 나이 또래의 딸을 유방암으로 떠나보낸 자매님이 계세요. 회합 끝나고 같이 차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자매님들이 저한테 얼굴 표정이 너무 밝다고, 기쁘게 사니까 하느님이 낫게 해주실 거라고들 하는 거여요. 제가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구요. 딸을 잃은 자매님이 듣고 계셨거든요. 그분 딸은 밝고 기쁘게 못 살아서 떠났다는 말로 들릴 것 같아서요. 저는 알아요. 하느님께서 수술 전부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시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설레는 은총을 주신 이유가 제 덕행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냥 제가 그 은총을 통해 하느님 일을 하는데 한 몫을 하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저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에요. 제가 엉망인 것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저보다 더 훌륭하고, 더 맑고, 더 겸손하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런 은총을 못 받거든요. 저는 알 수가 없었어요. 왜 하느님께서 저한테만 친절하신지. 저한테는 강제로 은총을 떠먹여주신 셈이거든요.
고통은‘하느님 사랑의 속성’이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처럼‘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는’훌륭한 존재로 만드셨어요. ‘하느님보다 조금만 못한 존재(창세 1:26, 시편 8:5)’로 창조된 우리에게는 하느님 닮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의지가 있어요.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고 훌륭한 사랑이겠고, 고통과 희생을 받아들이는 사랑이에요. 온갖 역경 속에서도 자식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를 칭송하잖아요. 사랑으로 기꺼이 견디어낸 그 고통 덕분에 그 어머니의 사랑이 훌륭한 거지요.
빛이 가치가 있으려면 어둠이 있어야 하고, 어둠을 이겨야 해요. 행복이 가치가 있으려면 불행이 있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을 이길 수 있어야 해요. 삶이 가치가 있으려면, 죽음이 있어야 하고, 그 죽음을 이기는 삶이라야 해요. 사랑이 가치가 있으려면 고통이 있어야 하고, 그 고통을 사랑으로 견뎌낼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탄도 허락하시고, 고통도 허락하셨어요. 가치 있는 사랑을 하라고 고통이 있는 거예요. 고통이 세상에 없다면 훌륭한 사랑을 못하잖아요. 고통은 사랑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사랑의 속성이고 재료라고 할 수 있어요. 최고로 가치 있는 사랑은 최고의 고통을 최고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어요. 그래서 고통의 편차가 그렇게 큰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구원 사업과 성인들의 통공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실 때부터 죄들을 예견하셨어요.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예수님의 역할을 계획하셨고 성인들의 통공을 섭리하셨어요. (예수님은 예수님 탄생 전의 영혼들도 다 구원하신 거예요. 하느님께서는 시간에 갇히지 않으시니 소급 적용은 문제없어요. 창조 전부터 정해진 일을 때마침 2000년 전에 계시하신 거예요.)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드러내셨고, 모든 영혼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대속적 고통의 값을 나누어 받았어요. 또한 성인들의 사랑과 대속적 고통의 값도 나누어 받았어요. 하느님께서는 죄가 있으면 희생과 고통과 기도로 그 죄를 보속할 수 있도록 만드셨어요. 그런 통공의 신비는 하느님의 자비로 마련된 섭리에요. 우리는 희생과 고통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구원에 합당한 사랑의 충분량’을 채울 수도 있고, ‘인류 구원에 필요한 사랑의 충분량’에 기여할 수도 있어요. 훌륭한 영혼들은 하느님처럼 사랑을 위해서 고통을 짊어지려고 하지요. 그런 값진 고통은 인류 구원을 위한 큰 공이 돼요. 예수님의 구원 사업과 성인들의 통공을 통해 ‘우리 모두’는 구원에 필요한 사랑의 충분량을 채울 수 있게 된 거여요.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와 안배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구원에 필요한‘사랑의 충분량’을 채울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주셨어요. 각 영혼들은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랑의 충분량을 영원 속에서 채울 수 있게 돼요. 인류 전체도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모든 시간 속에서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의 충분량에 도달하게 돼요. 영혼들은 고통, 희생,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 목표하셨던 사랑의 충분량을 채우도록 서로를 도울 수 있어요. 고통을 겪는 이유는 나 혼자만 구원받는 게 아니라, 다같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고통이 없으면 훌륭하고 값진 사랑을 못하고, 다른 영혼들을 위한 보속을 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는 영원에서부터 마련된, 개인과 인류에 필요한 사랑의 충분량을 채우기 위한 시련과 고통이 있어요. 가치 있는 사랑을 하도록 천국에서부터 섭리된 고통이지요. 사랑으로 그 고통을 받으면 정말로 훌륭하지만, 그렇지 않고 당하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값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소명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인류가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의 충분량을 채우는 때에 와요. 세상 끝날 때까지 영혼들 각자는 하느님 사랑에 맞갖은 성화를 이루어야 하고, 인류 전체의 역사도 성화가 되어야 해요.
성인들은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보속을 위한 고통을 열망하지요.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대신 고통을 받고 싶어지잖아요. 그 고통은 사랑이고 가치 있고 영광스러워요. 고통을 사랑 때문에 기쁘게 참아 받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의 양을 넘치도록 채우지요. 그 넘치는 양만큼 천국에서 기쁨과 영광을 더 누리게 돼요. 우리 모두는 그렇게 훌륭한 사랑을 하는 성인이 되도록 불림 받았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하셨지요. 사랑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에요.
공평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니까 결국에는 각 영혼에 걸맞는 행복과 사랑을 가득 채워주셔요. 이 세상에서 슬퍼하고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은 영원 속에서 다 갚아주셔요. 그 슬픔과 괴로움을 통해서 알게 모르게 자기 자신과 인류역사 전체에 요구하시는 사랑의 충분량에 기여한 셈이니까요. 갚아주시는 방법은 하느님만이 아세요. 모든 인간이 다 다르듯이, 그 방법도 다 다를 거예요.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빛깔도 영혼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어요. 구원이 맞춤형인 거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전능하시니까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가 잊었던 사소한 것들까지 다 갚아주셔요. 그러니 우리 기준으로 판단해서 불공평하네, 이해를 못하겠네, 고약하네, 할 필요가 없어요. 영문도 모르고 고통 속에 죽어가거나, 급사한 사람들은 영원 속에서 다 보상 받아요.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이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불공평한 것들도 영원 속에서 보면 다 공평해요. 하느님의 길은 저 높이 있어서 하느님의 섭리 또한 이 세상만 볼 수 있는 우리들은 다 이해하지 못해요. 분명 영원에서부터 이 세상에서 채울 몫으로 정해진 십자가, 고통이 있어요. 결국에는 모두 영원 속에서 사랑의 충분량에 도달하게 돼요. 다만 이 세상에서 각자의 능력과 몫과 때가 다를 뿐이어요.
어떤 사람이 성령은사를 많이 받고 기적도 행하지만, 사랑으로 행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좋은 일을 했다면, 연옥에서 보속해야 해요. 가치 있는 사랑을 세상에서 못 이루었으니까요. 세상에서 은총을 많이 받았어도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이 많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사랑의 충분량을 채우려면 고통의 십자가를 져야 해요. 비록 믿음이 없는 채로 고통 받다 죽은 영혼들이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 일을 많이 했다고 자부하는 영혼들보다 더 천국과 가까울 수 있어요.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적게 받은 사람에게는 적게 요구하시지요. 하느님은 공평하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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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님! 뒤죽박죽 말씀 드렸네요.^^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신학적 근거도 없는 엉터리 가설일지라도 나무라지는 마셔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오직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것, 고통도 악도 사랑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일인지요. 기분이 좋아서 자꾸 히죽 히죽 웃음이 나요.
제가 몇 달 전에 예수님께 자꾸 의심이 가서 죄짓는 것처럼 죄송하다고 했더니, 저한테 괜찮다고 하셨어요.“토마스가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겠다고 해서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모르면서 아는 셈치고 살거나, 못 믿으면서 믿는 체 하는 것보다는 낫다. 용기 있고 솔직한 행동이기 때문에 더 기뻐한다.”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았어요. 제가 뭘 모르면서 아는 척 한다고 혼날 수도 있지만, 제 나름으로는 하느님 입장을 변호해드린답시고 애써 설명해본 거니까 하느님께서 좀 봐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전개한 설은 틀렸을지라도, 분명 고통도 악도 사랑 때문에 창조된 것이라고 의심 없이 믿기로 했어요. 울 하느님 만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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