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기도, 겸손한 기도
2006년 4월 9일 일요일
아이들을 돌봐 주시는 할머니와 아빠에게 맡기고 3차 항암주사를 맞으러 남편과 율리아 집으로 갔다. 답장 메일을 꼬박꼬박 해주시고 기도로 응원해 주시는 신부님께 인사드렸다. 메일 보내서 자꾸 귀찮게 해 드렸고 앞으로도 가끔 보낼 건데, 인사도 안 드리는 게 도리가 아닌 거 같아서‘커밍아웃’했다. 눈썹까지 빠지기 시작하고, 운동이 부족해서 수술 전에 이미 2킬로 찌고, 지금 4킬로 불어 있다. 더 흉해지기 전에 용기를 내야 할 것 같았다.
미사가 끝나고 율리아와 함께 “안녕하세요? ” 했더니
“메일 보내는 레지나 자매님?”하고 몇 번 물으셨다.
“이렇게 밝은 표정인데 누가 암환자라고 하겠어요?”하시며 반가워하셨다.
2006년 4월 10일 월요일
피검사하고, 두 시간 기다려서 내과 진료 받고, 또 두 시간 기다려서 주사 맞기 시작하고, 한 시간 동안 주사를 맞았다. 채혈할 때는 맨날 손등에서 하는데 여러 번 하다 보니 찔렀던 데를 또 찔렀는지 엄청 아팠다. 항암주사실에서 2차 때 혈관을 잘 찾아 주었던 한0미 간호사를 찾았는데 외래병실로 옮겼다고 한다. 앞이 캄캄해졌다. 1차 때처럼 혈관을 못 찾아서 손등에 맞게 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항암주사약이 한 방울만 새도 살이 썩으니 재건수술하기 힘든 손등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했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와서 물었다.
“아니. 뭘 믿고 가슴에 관을 안 꽂으셨어요? 혈관 찾기가 힘든데”
“네, 한0미 간호사님 믿고요”
다행히 팔 깊이 바늘을 찔러서 혈관을 찾았다.
2차 때 몸 회복이 늦게 되어서 그런지 광주로 오는 기차 안에서부터 토하기 시작했다. 항암제 해독을 하기 위해서 하루에 2-3리터씩 물을 마셔야 한다고 했는데 물까지 토하니 몸이 더 피곤했다. 기차에서 까무러치듯이 잠을 잤고 집에 와서도 몇 번 토하고 계속 잤다.
2006년 4월 11일 화요일
새벽에 눈 뜨자마자 먹은 것도 없는데 토했다. 심하게 울렁거려서 괴롭기가 말로 다 할 수 없다.
건방진 기도
“흐미, 하느님
물까지 토하면 이번에는 어떻게 회복하겠어요?
허리 아픈 거 낫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면
뻔히 다른 힘든 증상도 덜어 주라는 말이지.
한 가지 부탁하면 딱 그거 하나 밖에 모르세요?
엉터리 하느님.
토하는 건 멎어야 물을 먹지요.
울렁거려도 좋으니 토하는 것만 멎게 해주세요.”
엉터리 하느님은 딱 집어 부탁한 것만 들어주시는가 보다. 토하는 것만 멎었을 뿐 심하게 울렁거렸다.
이번에는 너무 심해서 견디기가 힘들다.
2006년 4월 12일
낮잠 자고, 오심을 겨우 겨우 견디다가 성당에서 판공성사를 보았다.
2006년 4월 13일 목요일
괴롭게 하루를 보내고 수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미사참례
2006년 4월 14일 금요일
항암주사를 맞으면서부터 토하는 사람이 있다더니, 4차 때는 내가 그럴 것 같다. 너무 힘들어서 병원 생각만 해도 토할 것 같고, 겁이 났다. 남은 항암 맞을 일이 끔찍하게만 여겨진다. 앞으로 견딜 일이 무섭기만 해서 점점 건방져 가는 기도를 이제 그만 두기로 했다. 대신 시간을 제법 바쳐야 하는 9일 기도를 해서 남은 항암기간을 쉽게 버틸 수 있도록 빌기로 했다.
공손한 기도
하느님, 자꾸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한데요.
저 하느님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데
몸이 어느 정도 따라 줘야 하지요.
앞으로는 주사 맞고 심하게 힘들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내가 하느님을 전하는 일이 뭐 대단한 일인가? 별 힘이 되겠는가? 많은 책을 쓰시고, 강의로 바쁜 차 신부님도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 나를 위해서 비는 것 보다는 신부님들이 건강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하느님께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나도 잘 버티게 해 달라고 지향에 살짝 끼워 넣어야지.’
겁나게 공손한 기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
감사해요.
하느님을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하시는 신부님들이
건강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게 해주세요.
특히 차신부님처럼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분들이
건강한 몸으로 신나게 하느님을 알릴 수 있게 해 주세요.
덤으로 저도 조금은 하느님을 위해서 애쓸 열정이 있으니까
제 건강도 좀 끼워서 빌게요.
오늘 하필 예수님이 수난하신 날이네요.
예수님 수난에 동참하지는 못할망정
고통을 피하려고만 해서 죄송해요.
앞으로 54일간 하는 9일기도가
제가 아는 가장 공손한 기도이니
제 정성을 봐서 부탁을 꼭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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