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한 말씀만 하소서 - 박완서

김레지나 2008. 8. 28. 21:18

고통의 가치 E.M> 아렐야노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보잘 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욥 40:3-5)

 욥을 회개로 인도한 것은 하느님이 그와 맞서 논쟁을 펼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1) 그 누구도 불운과 재난을 피하기 위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2) 그가 겪는 고통은 창조의 선성(善性)을 문제시하지 말아야 함을 발견하게 된다.

 욥이 하느님을 만나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는 사실로 충분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음을 ,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 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 42:2-6)


유대인의 격언 “유대인이라면 하느님을 위하든지 아니면 하느님을 대적하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지, 하느님의 부재(不在)는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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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아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땅속에 누워 있는 것일까? 내 아들이 어두운 땅속에 누워 있다는 걸 내가 믿어야 하다니, 발작적인 설움이 복받쳤다. 나는 내 정신이 미치기 직전까지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가 어떤 강인한 저지선에 부딪쳐 몸부림치는 걸 여실하게 느낀다. 그 저지선을 느낄 수 없어야 미칠 수 있는 건데 그게 안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정말 있다면 내 아들의 생명도 내가 봉숭아를 뽑았듯이 실수로 못된 순간적인 호기심으로 장난처럼 거두어간 게 아니었을까? 하느님 당신의 장난이 인간에겐 얼마나 무서운 운명의 손길이 된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당신의 거룩한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이렇게 막 가지고 장난을 쳐도 되는 겁니까.

 아이들이 불러서 베란다로 나가 보니 저녁때인데도 대마도가 뚜렷이 보인다. 어제 쾌청한 날에도 안 보이던 대마도가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나타나 보인다. 우리 눈에 안 보일 때도 대마도는 거기 있었을 게 아닌가. 그렇다면 보인다고 다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실재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환상일 것도 같다. 어쩔거나, 이 인생의 덧없음을.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시편 15-16)

주여,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다 왜 이렇게 진한 사랑을 불어넣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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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무렵에 노순자 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들 잃고 나서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울음부터 치밀었다. 내 아들 자라는 걸 어려서부터 지켜보았고 그 또한 외아들을 기르고 있으니 내 비통을 헤아리는 마음도 남다르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욱 북받치는 통곡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몇 마디 하다가 그냥 끊었다. 울음과 함께 온종일 살얼음판을 밟듯이 참아내던 포악과 물음이 복받쳤다.

  내 아들의 죽음의 의미는 뭘까? 죽음 후에도 만남이 있을까? 그 애의 죽음은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신이 있기나 있는 것일까? 인간의 기도나 선행과는 상관 없이 인간으로 하여금 한 치 앞도 못 내다보게 눈을 가려놓고 그 운명을 마음대로 희롱하는 신이라면 있으나마나가 아닐까?

  여지껏 지녀온 신의 개념 중에서 자비로움, 공정성 같은 걸 빼버리면 신 또한 시체만 남게 된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남기신 말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 뜻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작 숨은 뜻은 “하느님, 하느님, 결국 당신은 안 계셨군요?가 아닐까.

  지치도록 울다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서울서 가져온 가방을 뒤지는데 묵주가 만져졌다. 남편의 투병 중 문병을 와준 친구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주고간 묵주였다. 친구가 몇 년 전 성지순례하면서 성모님이 몇 번씩이나 기적을 보이셨다는 유럽의 어떤 성당에서 산 건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묵주로 기도를 바치면 영락없이 잘 들어주시더라는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자기에겐 마음의 든든한 지주 같은 특별한 묵주니 아주 줄 수는 없고 빌려주는 거니 나도 열심히 기도를 바쳐 그런 은총을 받도록 하라고 했다.

  나는 그 묵주로 9일기도도 바쳐보고 단식기도도 바쳐봤지만 남편의 생명을 붙들지는 못했다. 그 묵주가 어떻게 짐 속에 들어 있었을까? 아마 둘째가 짐을 싸면서 에미가 너무 힘들 때 혹시 위로가 될까 해서 챙겨넣은 모양이다.

 나는 그 묵주가 특별히 영검하다는 걸 믿지 않는다. 처음부터 믿지 않았었다. 내가 그걸 굳게 믿을 수 있었다면 아마 그 묵주로 남편의 병을 고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묵주를 보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아 얼른 주모경을 바치고 나서 작은 주머니 속에다 넣어두었다. 그리고 나서 “주님,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믿어서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계실까 봐. 계서서 남은 내 식구 중 누군가를 또 탐내실까 봐 무서워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라고 내 기도에다 주석을 달았다.

  주를 믿어서도 사랑해서도 아닌, 단지 공포 때문에 올리는 기도란 얼마나 참담한가. 참담 그 자체,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예수는 당신이나 십자가에 매달리고 말지, 왜 수많은 예수쟁이들까지 줄줄이 그의 못박히고 피맺힌 팔다리에 매달리게 하는가. 그래서 그의 몸을 갈기 갈기 찢어 손톱 발톱까지 나눠 갖게 하는가.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메달을 많이 따나 보다. 밤늦도록 손자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아들이 없는데도 축제가 있고 환호와 열광이 있는 세상과 내가 어찌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 혼자가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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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으로 내려가긴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 꽃을 따서 두 개의 꽃다발을 만들었다. 다리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수녀님 묘지가 나왔다. 꽃다발 하나는 젊어서 죽은 수녀님 묘 앞에 바치고 나머지 한 개는 언덕방 책상 위 내 아들의 사진틀 앞에 바칠 거였다. 성수도 젊은 죽음한테만 뿌리고 기도도 거기다면 바쳤다. 젊은 죽음에 대한 이런 편애야말로 내 산책길의 하이라이트였다.

  나는 그 산책길을 <시인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명상의 길>이라는 원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 같은 건 명상하고 싶지 않았다. 내 고난도 벅찼다. 행복에 겨운 자들이나 실컷 명상을 하든지 감동을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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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이렇게 의탁해 있으면서도 여기가 전혀 딴 세상처럼 보이는 것은 여기에는 내가 여직껏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사랑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핏줄로 연결된 부모 형제나 친족 간의 사랑, 본능적이면서도 신비한 이성간의 사랑. 오랜 상호이해와 노력 끝에 도달한 우정 외의, 인간끼리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한다는 박애정신을 믿지 않았다. 그건 인류의 이상일 뿐 실행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실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아니꼬운 위선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엔 가족애로부터 버림받고 친구로부터 소외된 사람도 수없이 많은 걸 어찌하리. 박애에 의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으므로 가족을 떠나 보다 넓은 사람을 실천하려는 사람을 따로 부르실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는 느릿느릿 그리고 골고루 수녀원의 이곳저곳을 싸질러 다니면서 보이지 않는 분의 부르심이랄까 안배의 신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산책의 마지막 쉼터는 유치원 마당이 된다. 빠듯한 그네도 타고 말도 타면서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기도 하고 교실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손자 생각이 난다. 이미 태어난 손자는 물론 태어나지 않은 손자까지. 놀이기구 중 미끄럼틀이 제일 재미있게 생겼다. 코끼리처럼 생겼는데 꼬리 부분으로 올라가서 코로 내려오게 돼 있다. 코를 땅에 대고 있는 코끼리는 실물 크기에 가깝다. 다 타 봤지만 그것만은 안 타봤다. 그 앞에서 손자들하고 사진을 찍으면 재미있는 사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작은 일이지만 미래를 설계한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살고 싶은가? 불안했다. 방으로 돌아와 산에서 만든 꽃다발을 물컵에 꽂아 아들의 사진 앞에 바쳤다. 접을 수 있는 사진틀이어서 사진이 두 장 꽂혀 있는데 둘 다 강가에서 찍은 사진이다. 하나는 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하나는 강을 굽어보고 있어서 뒷모습에 가깝다. 아들의 사진 중 그닥 잘된 사진은 아니나 나는 그 사진들이 좋다. 흐르는 강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들의 생각과 내 생각과 닿는 느낌 때문이다.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그 애가 없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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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중 어린 수녀님이 속세의 친구에게 하는 소리가 문득 내 관심을 끌었다.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 얘기였다. 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비관도 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엔 속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되란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관대....’ 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이 되더라고 했다.

 ‘왜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와 ‘왜 내 동생이라고 저러면 안되나?’는 간발의 차이 같지만 실은 사고의 대 전환이 아닌가. 나는 신선한 놀라움으로 그 예비 수녀님을 다시 바라보았다. 내 막내딸보다도 앳돼 보이는 수녀님이었다. 저 나이에 어쩌면 그런 유연한 사고를 할 수가 있었을까?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

  어려서 무서운 꿈을 꾸다가 흐느끼며 깨어난 적이 있었다..꿈이었다는 걸 알고 안심하고 다시 잠들려면 옆에서 어머니가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하셨다.

 “얘야, 돌아눕거라, 그래야 다시 못된 꿈을 안 꾼단다.” 돌아누움, 뒤집어 생각하기, 사고의 전환, 바로 그거였다. 앞으로 노력하고 힘써야 할 지표가 생긴 기분이었다. 나는 내 속에 생긴 희미한 희망 같은 것을 보듬어 안고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 먼저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상 혼자가 되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바로 거기서 거기 같던 사고의 차이가 나로서는 절벽 끝에서 다른 절벽 끝을 향해 심연을 건너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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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참으려니 온몸이 격렬하게 요동을 쳤다. 엄숙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에 차마 소리 내어 울 수가 없었고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중엔 명치의 근육이 땡기면서 찢어질 것 같았다. 뭔가 안에서 엄청난 힘으로 파열할 것 같아서 먼저 다락방을 뛰쳐 나왔다. 내 방도 대낮에 엉엉 울 만한 곳은 아니어서 허둥지둥 산으로 올라갔다.평소의 산책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둥치에 몸을 내던지면서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추하고 외롭고 서러운 짐승이 된 느낌이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 응성이라 해도 좋았다. 아무리 미량이라 해도 그 감미로움에는 고통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진통제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오직 참척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끔찍한 극형에 당해서는 그 영문을 물을 권리가 있다. 신의 권위가 장난질칠 권리가 아닌 바에야 의당 그 극형이 무슨 잘못에서 연유했는지 밝혀줘야 한다. 신, 당신의 존재의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 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있는 것처럼 느끼고,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음흉한 힘이다. 영원히 순화될 것 같지 않은 원색적인 포악이 거침없이 치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신의 문제는 나는 무엇일까 하는 나의 내면 응시로 귀착되고 만다. 실컷 울고 나서 한결 개운해진 정신으로 <법구경>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어리석은 이는 한평생을 두고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길지라도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이라도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기면 곧 진리를 깨닫는다

 혀가 국맛을 알듯이.


 신을 느끼는 감수성에 있어서 나는 철두철미 숟가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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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은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고 했다. 수녀원에 들어온 딸은 막내인데 혼기를 앞두고 신병을 얻어 애간장을 태우더니 극진한 치료의 보람으로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수녀가 되겠다고 해서 또 한번 부모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한번 잃을 뻔했던 자식이라 기쁘게 하느님께 바칠 생각을 했노라고 했다.

  그러나 1년도 안돼 다시 신병이 도졌다는 소식을 받고 와보니 암만 해도 집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보낼 때 서운하던 것과는 댈 것도 아니게 속이 상해 밤새 지접을 못하다가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 말동무라도 하려고 나를 깨웠노라고 했다.

  쪼들쪼들 마른 입술과 충혈된 눈으로 그 부인은 나로부터 위안을 얻어내려고 갈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 정도의 자식 걱정으로 그렇게 초췌하고 약하게 구는 부인에게 화가 났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나는 외아들을 잃었답니다. 그래도 이렇게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살아 있습니다. ”내가 듣기에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드라이한 목소리였다. 내 입으로 그 말을 하다니, 차마 어떻게 그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내 입으로 그 말을 하고 그 말을 내 귀로 들었음에 경악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 사실에 승복하고 만 것이 소름끼쳤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몇 남매나 두셨습니까?”라는 예사로운 대화 끝에, 그 말을 해야 할 경우에 수도 없이 부딪히리라.

  부인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황망히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몇 마디 사과의 말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부인의 얼굴에 생기가 돈 것을 분명히 보았다. 부인도 아마 순식간에 자기의 근심이 가벼워진 것에 놀라고 있겠지. 세상엔 남의 불행이 위안이 되는 고통이 얼마든지 있다. 세상 사람들이 예서제서 자기들의 근심이나 걱정을 위로받으려고 내 불행을 예로 들어가며 쑥덕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남의 고통에 쓸 약으로서의 내 고통, 생각만 해도 끔찍한 치욕이었다.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다지도 미천하게 만드시나이까. 나는 마음으로 무릎을 꺾으며 이렇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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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애를 잃고도 죽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앞날이 얼마나 치욕스러우리라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나는 거러지 만도 못하게 헐벗은 마음으로 오래도록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애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 후 이렇게까지 수치스럽고 피폐한 심정이 되어보긴 처음인 것 같았다. 이곳을 떠나기로 속으로 정해놓고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수녀가 될 수 없는 바에야 세속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 최소한의 염치였다.

  그러나 지금 같아서는 도무지 그럴 엄두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고통을 입초사에 올림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고, 내 불행을 양념삼아 자신의 행복을 더욱 맛있게 음미하고자 대기하고 있을 것 같은 망상에 망상이 꼬리를 물었다. 나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을 적에도 남의 불행에 접했을 때, 마음 아파하기에 앞서 내 행복을 재확인하며 대견해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던가.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세상으로 돌아갈 일은 두려웠고, 나에겐 죽음보다 무서운 고통이 타인에겐 단지 흥미나 위안거리밖에 안 되는 인간관계가 무서워서 떨고 있었다.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지어내셨다는 말씀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그다지도 잔인하고 천박할 수가 있단 말이다. 낮 기도시간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못해 낮 기도에 참여했다. 점심은 카레라이스였다. 그리고 옆방 부인과 겸상이었다. 내가 그 부인에게 결정적인 위안거리가 되었다고 여긴 건 착각이었나? 그 부인은 여전히 수심에 싸인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둘이의 식사는 괴로웠다. 부인은 거의 식사를 하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그 정도의 자식 걱정으로 저다지도 상심을 하다니.

  나는 슬그머니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봐란듯이 카레라이스를 아귀아귀 먹었다. 수녀원에 온 후 그렇게 많이 먹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왜 이럴까? 그 부인의 하소연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에 거짓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말도 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심통이 났고, 내 고통에다 대면 당신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깔보는 마음까지 생겼다. 나는 정말 왜 이 모양일까? 어쩌자고 고통에 있어서조차 교만하고 싶어하는가? 내가 왜 주님을 느낄 수가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주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나는 주의 눈 밖에 날 밉상만 고루 갖추고 있으니까.

  점심에 과식한 게 속에서 보깨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심해졌다. 속이 뒤틀리면서 식은 땀이 나고 목구멍에서 카레 냄새가 치밀었다. 소화제를 먹었지만 가라앉지 않았고, 주방에서 더운물을 갖다가 녹차를 만들어 마셔봐도 카레 냄새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진땀에서도 카레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토해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물만 먹고도 잘만 토하던 버릇이 불과 10여 일 만에 이렇게 달라져 있었다. 가슴에 완강한 빗장이 잠긴 것처럼 배에서 왈칵 치밀다가도 가슴에서 막히곤 했다. 가슴까지 빠개지는 것 같았다. 지난 일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진통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언덕방에서 화장실에 가려면 수부를 통과해야 한다. 수부에서 일보시는 인자한 수녀님이 눈치 챌까 봐 전전긍긍했다. 내가 통 식사를 못한다고 수녀님마다 걱정을 해주시는데 과식하고 체해서 쩔쩔매는 꼴을 보여줄 순 없었다. 그 중에도 그런 체면을 차리려 들었다.

 마침내 가슴에 걸린 빗장이 부러지는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오면서 점심 먹은 걸 고스란히 토해냈다. 복통이 없어지자 내 존재도 소멸한 것 같았다. 완벽한 평화였다. 고통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변기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짚고 무릎 꿇은 자세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만이었을까, 한 생각이 떠올랐다. 텅 빈 머리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어서인지 그건 내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기보다는 계시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미사시간에도 기도시간에도 산책하면서도 긴긴 밤 잠 못 이루면서도 신에 대한 내 물음은 딱 한가지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했기에 이런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포악이요 항의였다. 그러니까 내가 신의 부당함을 항의하고 내가 억울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나는 그닥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죄가 있다면 어디 말해보시지 하는 신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었다. 십자가 밑에서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구해도 얻어낼 수 없었던 응답이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굻고 앉았을 때 들려올 게 뭐였을까? 그때 계시처럼 떠오른 나의 죄는 이러했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 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위선으로 사랑한 척한 적조차 없었다. 물론 남을 해친 적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모르고 잘못한 적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의식하고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신에게도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나는 그 정답에 머리 숙여 승복했다. 나중에 나의 간지(奸智)가 또다시 빠져나갈 구멍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건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그리고 구원이었다. 고통도 나눌 가치가 있는 거라면 나누리라.   

  "주여, 나를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내게 있는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소서. 나의 고통까지도. 당신이 내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나이다."

  이윽고 기운을 차리고 화장실을 나왔다. 침대에 누우니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난 육신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몸이 아무 데도 불편하거나 아프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야 마땅할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즐거움에 뜻이 없다고 여겼는데 몸에 아픈 데가 없다는 사실에 거의 행복감에 가까운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감미로운 잠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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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에서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을 읽었다. 읽다 만 <십자가의 성 요한> 때문에 성인에 대한 이야기라면 읽기도 전에 뜨악하여 경원하는 마음이 앞섰는데 이 성녀의 자서전엔 깊이 빠져들었다.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거나 초인적인 고행으로 자신을 단련하지 않고도 성녀가 된 소화 데레사의 천진난만은 얼마나 유쾌한가. 고행은 흉내라도 낼 수 있지만, 성녀가 죽는 날까지 잃지 않은 어린애 같은 투명한 직관력과, 무지하지 않은 천진난만은 아무도 함부로 꾸며서 할 수 없는 성녀만의 것이었다. 하느님이 아무리 그를 특별하게 어여삐 여기신다 해도 하느님다움에 흠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질 만큼 그 성녀의 품성엔 만인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어린애다움과 거룩함의 행복한 조화라고나 할까. 세상의 불공평에 대해 고민하던 소녀 적 테레사가 얻어낸 대답은 또 얼마나 귀여운지.

  "예수께서는 그 신비를 제게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는 제 눈앞에 자연이란 책을 펴주셨고, 저는 그가 조성하신 모든 꽃이 아름답다는 것과 장미의 화려함이며 백합화의 결백함으로 인해서 작은 오랑캐꽃의 향기나 들국화의 순박한 매력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만일 작은 꽃들이 모두 장미가 되려 한다면, 자연은 그 봄단장을 잃어버리고, 들은 이미 가지가지의 작은 꽃으로 꾸며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얼마나 단순 소박하고 귀여운 발상인가. 그러나 가장 심오하고도 난해하다는 노자의 세계관과 신기하도록 닮아 있지 않은가. 이 자서전에 빨려든 나는 낮 기도시간도 아까워서 가지 말까 했다. 그러나 기도시간을 거르면 점심도 굻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성당에서 기도시간을 마치고 나서, 들어간 문과 반대쪽 문으로 나가면 바로 손님들을 위한 식당이고 그 식당엔 그 시간에 맞춰서 따뜻한 점심이 차려져 있게 마련이었다. 기도는 빼먹고 무슨 염치로 밥을 먹으러 어정어정 식당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아무리 기도시간이 싫어도 그럴 용기는 없었다. 나는 순전히 점심을 얻어먹으려고 성당으로 올라갔다. 기도시간 내내 성무일도 소리는 듣는 중 마는 중 부엌 쪽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밥 냄새와 된장국 냄새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건 어쩌면 환각일 수도 있었다. 점심에 된장국은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된장국보다 더 맛깔스러워 보이는 비빔밥이었다. 나는 짐승 같은 식욕을 느꼈다. 뱃 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옆에서 시중드는 수녀님에게 숨기려고 나는 괜히 밭은 기침을 하면서 몸을 흔들었다. 색색가지 나물에다가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듬뿍 비비고 싶었지만 수녀님 눈치가 보였다. 내가 식사를 너무 조금 한다고 늘 근심스러운 얼굴로 지켜봐주던 수녀님 앞에서 그렇게 잘 먹으면 수녀님은 더는 내 걱정을 안할 게 아닌가. 나는 더 오래 수녀님의 근심에 응석부리고 싶었다. 또 엊그저께의 악몽과 같은 복통도 나의 식욕을 자제토록 했다. 좀 모자라는 듯 싶게 밥을 덜어다 비볐다. 기막힌 맛이었다.

  집에서는 자식들이 성화를 해대서, 수녀원에서는 수녀님들이 조심스럽게 걱정을 해줘서 할 수 없이 먹는 척 해왔다고 여기고 있었다.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먹어준 거였다. 아니꼽게도 선심을 쓰듯이 먹어준 거였다. 먹어준다는 의무감만 없으면 죽 한 모금 입에 넣고 싶지 않을 만큼 식욕이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참척을 겪은 에미는 그래 야 마땅했다. 살고 싶지 않은 게 거짓이 아닌 바에야 육체가 정신의 소망을 따라 주는 건 당연했다. 나는 이렇게 내 식욕 없음에 체면과 자존심을 걸고 있었다. 아니 희망까지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먹기 싫으니 차츰 쇠약해지면서 죽어가겠지하는, 그리하여 나의 식욕 없음은, 미구에 아들 뒤를 고통 없이 따라갈 수 있으리란 희망이었다.

 지금은 남을 위해 먹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먹고 있다는 자의식이 나를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하게 했다. 싫은 사람과 마주 앉아 커피만 마셔도 속이 거북하던 내 육신이 아니던가. 이렇게 정신과 밀접하고도 예민하게 맞물려 있던 육신의 이 뜻하지 않은 반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비빔밥을 꿀같이 달게 먹고 내 방으로 도망치듯 돌아온 나는 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는 이제 살고 싶으냐’고.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라고 나는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저녁 기도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다시 배가 고팠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하루를 반성하기 위해서도 아닌, 단지 식욕을 채우기 위해 허위허위 성당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양을 자제했기 때문에 더욱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내려오면서 나는 내 육신과 정신의 분열이 한없이 창피하고 슬퍼서 몸둘 바를 몰랐다.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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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날 날을 정해놓자 딸이 본당 신부님한테 인사나 여쭙고 떠나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아들의 장례 때 그 어른의 도움을 많이 받았노라고 했다. 사제관 응접실에서 신부님을 뵙고 긴 위로의 말씀을 들었으나 자식도 낳아보지 않은 분이 내 마음을 어찌 알까 싶어 그저 괴로운 마음으로 경청했다. 그러다가 탁자 위에 놓은 백자 필통이 눈에 띄었다. 거기 쓰인 <밥이 되어라>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신부님이 손수 쓰신 건지, 아니면 어떤 주교님이나 추기경님이 쓰신 건지 그건 분명치 않았다.  누가 썼건 실상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밥이 되어라. 밥이 되어라.’를 입 속으로 되뇌면서 나는 분도수녀원에서 맡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 냄새를 떠올렸고, 어쩌면 주님이 그때 나에게 밥이 되어 오시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났다. 그때 나는 몇 날 며칠을 밤이나 낮이나 주님을 찾아 대들고 몸부림쳤었다. ‘내가 왜 이런고통을 받아야 하나? 한 말씀만 하시라.’고 애걸복걸도 해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끝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어쩌면 나직하고 그윽하게 뭐라고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늦게 난 철처럼 슬며시 왔다.  그래, 분명히 뭐라고 그러셨을 거야. 다만 내 귀가 독선과 아집으로 꽉 막혀 못 알아들었을 뿐인 것을.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던 거야. 우선 먹고 살아라 하는 응답으로. 그렇지 않고서 그 지경에서 밥 냄새와 밥맛이 그렇게 감미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국으로 떠나면서 아이들에게 겨울이나 나고 오겠다고 말했지만 내 속셈은 내 감정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였다. 나에게 가장 시급한 건 감정의 독립이었지만 그 시기는 기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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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설적인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의 홀로서기는 내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가까이서 멀리서 나를 염려해준 여러 고마운 분들을 비롯해서 착한 딸과 사위들, 사랑스러운 손자들 덕분이다. 나만이 알고 느끼는 크나큰 도움이 또 있다. 먼저 간 남편과 아들과 서로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그 좋은 추억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설사 홀로 섰다고 해도 그건 허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요즈음 들어 어렴풋하고도 분명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이런 도움이야말로 신의 자비하신 숨결이라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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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경 <통곡과 말씀의 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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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 우리는 이 글에서 절망과 고통에 들어찬 그녀의 말이 서서히 그 안에서 스스로 사랑과 생명의 싹을 피워내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때 그녀의 글은 우리의 척박한 가슴에 던져진 하나의 작은 씨앗이 된다. 절망과 대면하는 법, 죽음과 대면하는 법, 신과 대면하는 법, 그녀는 자신의 고통스런 기록을 통해 이를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다듬어진 것이 아닌 날것으로서의 고통이며 증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울림을 갖는다. 고통은 우리를 작게도 만들고 크게도 만든다고 하였거니와, 중요한 건 고통이나 절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깨달음의 깊이일지 모른다. 이글은 절망과 고통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작가가 조금씩 그 수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고통스런 절규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서 그녀는 새로이 생명을 만나고, 신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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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에서 삶으로, 세상 밖에서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 이 같은 과정은 사실 수도원의 산책길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다. 숲과 계곡과 다리를 지나면 묘지가 자리잡고 있고, 그곳을 지나면 유치원 마당에 마지막 쉼터가 마련되어 있으며, 돌아내려오면 수녀님들의 빨래터가 보이는 그 길을 따라 그녀는 새벽 산책을 다닌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이미 죽음을 지나 아이들의 세상을 만나고 다시 일상의 세계로 귀환하고 있었던 것이니, 그것이 그녀에게 죽음에서 삶으로, 죽은 아들에게서 살아 있는 손자들의 세계로 귀환해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뿐만 아니라 삶의 바깥으로 도망가기 위해 선택한 수도원이 딸네 집에서 10여분 정도밖에 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그 안에는 세상과 담쌓은 근엄하고 우울한 수녀들이 아니라 생기발랄한 수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에서도 드러나듯, 수도원은 그 자체로 신이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계심을,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고뇌와 불행으로부터의 초월이 아니라 얼싸안음이며, 자기 혼자만의 평화가 아니라 지상의 평화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은 침묵하는 분이 아니다. 신은 사랑과 나눔의 행위 속에, 생명의 모든 움직임 안에 살아 계시면서 말씀하신다. 사랑은 똥을 한 송이 꽃으로 바꾸어놓을 수도 있는 것이며, 생명은 그 자체로 축복된 것이라고. 작가 박완서가 통곡 속에서 얻어낸 이 깨달음은 우리를 숙연케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생명과 사랑의 작은 씨앗이 되어 자리 잡는다. 그리고는 상처를 보듬고 일어나라고. 고통과 상처가 너를 맑게 할 것이라고 속삭인다. 어느새 그녀는 영혼을 치유하는 말을 꿈꾸는 작가로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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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3-5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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